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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강사 춥고 배고프지만 양지를 기다리며…

새해들어 「나의 길 나의 인생」시리즈를 마련했다. 이 칼럼은 각계에서 꿋꿋이 일하는 과학·기술계 사람들이 고백하는 사적인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함께 자신과 주위를 성찰해 보는 공동의 광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시계

처음 만나는 사람과 서로 자기소개를 할 때에 나는 내자신을 소개하는 방법이 꽤 여러가지라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곤 한다. "무엇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선 더욱 그러하다. 질문자가 나를 알고 있는 정도나 또 내가 그를 만나는 목적에 따라 그 대답은 전혀 다른 것이 되기도 한다.

"아직 공부하는 학생이지요"라는 대답은 내가 학생의 신분(박사과정 학생도 학생이라면)임을 강조할 때 사용한다. "과학사를 공부하고 있읍니다"는 대답은 내가 '과학사'라는 조금은 낯선 영역을 공부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을 때 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엔 내 직업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할 때가 있다. 특히 나와 비슷한 또래지만 일찍 사회에 진출해서 자신의 전문분야를 쌓아 올리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받거나 만날 경우엔 웬지 아직 학교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쑥쓰럽다는 생각도 든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자신을 다음과 같이 점잖게 소개한다.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읍니다." 상대방의 눈은 휘둥그레진다. "벌써 전임강사? 어느대학…" 나는 그럴 때마다 상대를 안심시켜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닙니다…. 시간강사에요."

많은 경우 나는 상대방의 고개가 끄덕거리며, 그의 표정에서 '그럼 그렇지'라는 안도의 기분을 읽곤 한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조금 친절하고 또 남의 기분을 맞추어 주는 사람이면 "시간강사도 교수지요. 요즘 대학에서 강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던데요. 아무렴요!" 라고 조금 추켜주기도 한다. 내가 지금 공부하고, 또 강의하는 분야는 '과학사'이다. 나는 내 전공인 과학사에 누구보다도 애착과 집념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내 강의를 듣는 학생부터 우리 부모님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이 과학사가 어떤 분야이며, 그것의 연구영역에는 어떤것이 있고, 또 그 의의는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지 못할 때는 조금은 안타깝다.


시간 강사
 

●―과학과 역사의 중간에서

내가 자주 듣는 질문중엔 "과학사가 과학인가 역사학인가"라는 질문이 있다. 또 대개 강의 첫시간에 학생들에게 과학사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그것이 '과학'인지 또는 '역사'인지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어렵지 않게 듣는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어떤학생은 '과학사란 과학과 역사가 반반씩 섞인 분야'라고 자신있게 대답하는 경우도 있다.

하긴 과학사가 '과학의 역사'이기 때문에 과학과 역사가 반반씩 섞인 분야라고 볼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대답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직도 우리나라에선 과학사가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우선 과학사란 분야에 대해 조금 이야기 해 볼까 한다. 과학사는 역사학의 한 분야이다. 물론 과학사는 과학과 관련된 역사를 주로 연구하는 분야이다. 이점에서 과학사는 과학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아니 다른 어떤 학문보다 과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학사가 자연과학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며, 또 과학과 역사학이 반반씩 섞인 분야도 아닌 것이다.

과학사와 관련되어 내가 느끼는 안타까움은 그것이 어느 학문분야에 속하는가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보다 10여년 전에 비해서 과학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놀라울만큼 높아졌다. 여러 선생님들의 노력의 결실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아직 많은 사람들이 '과학사'라 하면 전문적인 연구를 필요로 하는 전공분야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교양'이나 '흥미있고 동시에 유익한 에피소드'를 찾아내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자연과학 기술을 대상으로 하는 많은 전문매체 대중매체에서 과학사는 대개 '과학사의 뒷얘기' 또는 '과학사의 숨겨진 일화'와 같은 난에서 언급된다. 그것도 대부분 에피소드 일화 흥미거리 위주로 이야기된다.

물론 과학사가 할 수 있는 큰 역할중 하나는 과학사가 과학을 이해하기 힘들어하고, 과학에 접근하기를 꺼려하는 사람에게 과학의 개념, 내용, 과학과 사회와의 관계를 보다 쉽게 이해시켜 준다는 사실이다. 단지 나는 이런 부분만을 보고 마치 그것이 과학사에서 연구하는 전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이야기와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경험이 몇가지 있다. 얼마 전에 어떤 잡지사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전화를 건 기자는 과학사와 관련해서 꼭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나는 얼마든지 물어봐도 좋고 또 내가 아는 한 성실히 대답해주겠다고 했는데 그 질문이 꽤나 당혹스런 것이었다.

"고대 과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가 '나에게 지렛대만 주면 지구를 움직이겠다'고 주장했는데, 근대에 이르러 아르키메데스의 이 주장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과학자가 누구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당황했다. 잠깐 동안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런 사실을 읽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르키메데스가 지구를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은 국민학교때 어린이잡지에서 본 것 같은데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비판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잘 생각이 안나는데 찾아보고 연락해주면 안되겠느냐"고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 대답이 시원치 않았떤지 그 기자는 '알겠다'고 하면서 "과학사를 전공하는 사람이 모른다고 이야기하면 누구한테 물어보나…"라고 중얼거리면서 전화를 끊는 것이었다. 나는 끊어진 전화기에 대고 "과학사가 그런 것을 연구하는 분야인줄 아나"라고 중얼거렸지만, 마음 한쪽에는 명쾌하게 대답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남아 있었다.


강의를 듣고 아무 것도 머리에 남지 않은 것 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웬지 씁쓸해진다
 

●―에피소드만 나열된 답안지

강의를 하면서도 종종 이와 비슷한 경우가 생긴다.
강의 도중 나는 가끔 과학사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준다. 강의를 너무 따분하지 않게 하려는 것도 그 이유중 하나이지만, 그것보다는 이러한 에피소드가 당시 과학, 과학자와 사회에 대한 다른 측면에서의 이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근대화학의 성립을 설명하면서 단두대에서 사형을 당한 근대 화학의 아버지 라보아지에의 이야기를 하거나, 진화이론을 설명하면서 다윈의 가계나 그의 켐브리지대학 생활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라보아지에의 경우는 당시 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프랑스 사회와 과학의 관계의 한 측면에 대해 이해할 수 있으며, 다윈의 가계와 그의 대학생활은 빅토리아(Victoria)시기의 영국의 독특한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와 당시 과학교육에 대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의를 끝내고 시험이나 리포트로 평가를 해보면, 꼭 이해를 해야 할 대목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 시간에 강의한 내용중 재미있다고 생각한 내용만을 기억해서 적어 놓는 경우가 많다. 강의를 듣고 아무 것도 머리에 남지 않은 것 보다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웬지 씁쓸한 기분을 지워버리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과학사연구의 중요한 부분은 과학의 개념 법칙 이론 등이 역사를 통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과정을 거치며 발전 전파 수용되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어떻게 나타났으며, 어떤 발전과정을 거쳤는가'. '뉴턴의 역학체계는 데카르트의 역학과 어떻게 달랐는가'와 같은 과학 내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과학자들이 남긴 저서 논문 편지 노트 등을 분석하여 가장 설득력있는 해답을 얻어내는 것이다. 이것을 통상 '내적(internal) 과학사'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가진 과학지식을 통해서 과거의 과학을 바라보면, 옛날 과학자들이 과학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많은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다. 더욱이 우리 눈에는 사이비과학(pseudoscience)이라고까지 보이는 것도 과학의 영역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과학사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과거의 과학이 과학이었다 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왜 자연세계를 그렇게 보았는가라는 질문인 것이다. 이런 질문에 해답을 내리다 보면 우리는 그들이 생각했던 자연관, 그것과 당시사람들의 믿음과의 상호영향, 또 그들의 사고를 결정지었던 여러가지 요인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결국 한 시대의 과학의 개념 법칙 이론과 같은 과학의 내용에 대해 연구를 하다보면 당시의 과학이 그 시대의 철학사상 문화 기술을 비롯한 생산력의 수준 생산관계 사회적 요소들 그리고 심지어 종교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때문에 과학사의 연구대상은 과학내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 시대의 과학과 과학 외적 요소들과의 연관, 상호영향을 살펴보는 것을 '외적(external) 과학사'라고 한다.

외적 과학사와 내적 과학사의 두가지 연구는 서로 결합해서 서로를 보완해 준다. 앞서 든 예를 다시 언급한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형성과 수용과정은 르네상스시기의 신플라톤주의와 같이 당시 널리 퍼져 있었던 사상과 관련시켜 생각할 때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다. 뉴턴의 만유인력도 당시의 연금술, 신플라톤주의의 배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다윈의 진화론의 성립에도 당시 영국사회의 사회 경제적 분위기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과학 알레르기를 치료해

연구 대상이 되는 지역에 따라 과학사는 서양(유럽 및 미국 등)과학사, 동양(중국 일본 등)과학사 그리고 한국과학사로 구분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어느 시기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가에 따라 고대과학사 중세과학사 근대과학사 현대과학사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 물리학사 생물학사 의학사 지질학사 천문학사…처럼 과학의 내용에 따른 구별도 할 수 있다.

과학사의 연구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특히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과학의 다양한 특성들을 역사적으로 규명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연구주제이다. 과학과 기술과의 관계, 과학과 대학 산업체 정부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또 과학단체나 과학자 사회, 과학과 정치, 과학정책, 과학기기(instrument), 과학과 전쟁…. 이런 모든것들이 과학사 연구의 훌륭한 주제가 된다.

대개 한 학기 강의를 시작하면서 나는 이러한 얘기와 함께, 과학사의 의의에 대해 두가지 정도를 말해준다. 먼저 과학의 역사를 통해 과학의 내용뿐만 아니라 과학의 사상, 사회체계, 생산관계, 기술, 문화등의 상호작용을 살펴봄으로써 인간의 활동중 하나인 '과학'의 본질에 대해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두번째 의의로서, 과학사를 통해 우리는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중 하나인 과학기술을 보다 깊게 이해할수 있고, 결국 이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사회를 폭 넓게 이해하는 길로 통한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는 인문, 사회계열 학생들은 '과학'이란 말만 들어도 접근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과학에 대한 경원이 지나쳐 현대 과학을 적대적으로까지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들에게 과학사가 '과학 알레르기'를 없애주며, 과학의 다양한 모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가지 예를 들어, 많은 학생들이 현대과학은 인류의 가장 큰 해악인 핵문제 공해문제의 주역이 아니냐고 묻는다. 어떤학생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비인간화, 인간의 소외를 필연적으로 낳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들에게 과학과 그것을 이용하는 이용구조를 분리해서 생각해 보라고 말하곤 한다. 이런 문제를 과학에 돌리는 것은 결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무런 실천도 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에겐 나는 조금 다른것을 강조한다. 전공에 파묻혀 있는 과학도는 자신이 앞으로 연구하게 될 분야가 사회속에 어떻게 위치해있고, 사회속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다. 많은 자연과학도가 자신들의 학문은 사회와는 무관하며, 따라서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 역시 사회와는 무관하다는 생각을 하는 학생도 있다.

이러한 생각은 종종 '과학만능주의'(scientism)와 연결되어 있다. 즉 과학이야말로 진리이며, 가장 순수하고 객관적이라는 생각이다. '과학', '과학적'이란 말만 붙으면 무엇이든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려하는 태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나는 과학이 사회와 유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여타 활동처럼 사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발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려고 노력한다. 특히 과학기술의 힘이 역사상 어느 시기에 비해서도 훨씬 커진 현대사회에는, 과학기술자들의 과학과 사회에 대한 인식과 그들의 책임이 막중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강의가 항상 내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다. 강의를 들어가기 전에는 항상 긴장되며 이번 시간에 꼭 설명해야 할 내용과 그것의 의의에 대해서 되 씹어 보지만, 끝나고 나오면서는 생각했던대로 강의 내용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후회가 항상 뒤따른다. 또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훨씬 더 많은 것을 공부한 뒤에 강의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나를 부담스럽게 한다.

●―19세기 과학에 반해

5년전 과학사를 전공하겠다고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에 비해선 내 자신의 관심 또한 많이 변했다. 처음엔 막연히 과학사를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박사과정을 이수하는 지금으로서는 무척 흥미있는 분야나 주제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지금 어렴풋하게는 19세기 과학과 관련된 주제를 더욱 깊게 공부하고 싶다. 19세기는 보수와 진보, 관념론과 유물론, 과학과 형이상학간의 대립과 투쟁이 얽히면서 현대로 넘어오는 역사의 중요한 이정표를 남긴 시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과학'과의 연관을 주장했고 상대방을 비과학적이라고 규정했다. 나는 19세기 과학을 살펴보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강의가 모두 끝나고 방학이다. 소위 시간강사들에겐 '춥고 배고픈' 계절이다. 88년엔 강사들의 노동조합도 생기고 권익을 찾기위한 노력도 있었다. 새해에는 강사들이 강의와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길 바란다. 아니 내 자신이 새해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 시간강사들의 보다 나은 여건을 만들기위해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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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홍성욱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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