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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랜턴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히어로지만, 잘 둘러보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띈다. 미국의 시트콤 ‘빅뱅이론(과학동아 4월호 ‘똑똑한 팝’ 참고)’을 봤다면 주인공 쉘든이 들고 다니던 녹색랜턴을 기억할 지도 모른다. 더 관찰력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쉘든이 평상시에 입고 다니는, 가슴에 이상한 마크가 있는 녹색 티셔츠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에도 네 권의 그린랜턴 만화책이 출간됐고, 케이블방송 ‘투니버스’에서 방영한 ‘저스티스 리그’에도 그린랜턴이 등장한다.
그린랜턴은 DC 히어로 중에서도 분위기가 제법 독특하다. 그린랜턴은 기본적으로 B급 스페이스 오페라의 분위기를 띤다. 이야기의 무대는 지구나 도시가 아닌 은하 전체다. 우주에서 가장 오래된 종족인 ‘가디언’이 있고, 이들은 우주 전역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3600명으로 구성된 ‘그린랜턴 군단’을 만든다. 이들은 반지를 통해 상상하는 것을 구현할 수 있다. 반지는 자신의 의지로 주인을 찾고, 주인이 죽으면 새로운 주인을 찾아 떠난다. 한 랜턴이 지구에 불시착하면서, 최초로 지구인이 반지의 주인이 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이한 점은 그린랜턴이 상상력을 무기로 싸운다는 것이다. 주인의 생각이 반지를 통해 현실에 나타난다. 랜턴 중에는 어린 소녀도 있고, 벌레나 지성체 박테리아도 있다. 3대 그린랜턴인 존 스튜어트는 건축가였고 5대 카일 레이너는 만화가였다. 물론 그 중 만화가가 뛰어난 상상력으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랜턴의 힘은 사실상 한계가 없다. 랜턴은 말이나 로봇을 만들어 타기도 하고, 우주 괴물이나 제트기, 미사일을 소환하기도 한다. 작가의 상상력에 따라 그린랜턴의 이야기에는 다양하고 예측 불가능한 전략이 등장한다.
설정에 의하면 그린랜턴의 힘은 ‘의지’에서 나오고, 그 때문에 랜턴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을 선택한다. 그린랜턴의 창작자는 ‘의지’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두려움’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그린랜턴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을 기반으로 하는 옐로우랜턴 군단이고, 또 두려움의 화신인 패럴렉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린랜턴의 이야기는 우주 전체를 무대로 하는 의지와 두려움, 정신과 정신의 싸움이다. 싸우는 상대는 늘 적이 아닌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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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영웅의 뛰어난 재창조가 필요
그린랜턴이 태어난 DC코믹스는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이 태어난 회사다. 엑스맨, 스파이더맨이 태어난 마블코믹스와 함께 히어로 회사의 양대산맥으로, 이들은 캐릭터의 저작권이 개인이 아니라 회사에 있는 독특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한 캐릭터의 이야기를 한 작가가 쓰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가들이 함께 한다. 이들은 머리를 맞대 함께 연재하기도 하고, 다른 작가가 쓴 이야기를 이어받기도 한다. 설정만 공유한 채 자기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여 재창작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형태로 종결을 내기도 한다. 캐릭터들은 회사의 결정에 따라 죽기도 하고, 다음 후계자에게 지위를 넘겨주기도 하고, 부활하기도 하고, 처음부터 다시 연재되기도 한다. 한 회사가 소유하는 캐릭터가 많다보니, 그들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고, 슈퍼맨과 배트맨, 원더우먼이 한 이야기 속에 등장하
는 일도 흔하다.
이런 제작방식 때문에 미국 히어로의 이야기는 개인의 창작품이라기보다는 민간신화나 전래동화와 비슷하다. 사람마다 알고 있는 토끼전, 춘향전의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듯이, 기본 줄기는 모두가 공유하고 있지만 직접 듣거나 본 이야기는 모두 다르다.
슈퍼히어로의 이야기는 현대에 만들어진 신화와 같다. 이 신화 속에서는 마법 대신 과학이 등장하고, 천사와 악마 대신 외계인이 등장하고, 판테온 대신 외계 행성과 평행우주가 등장한다. DC코믹스는 실제로 52개의 평행우주를 가정하고있고, 각기 다른 평행우주 속에서 히어로들이 각기 다른 삶을 산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어느 우주를 받아들이는가는 독자의 자유다.
히어로 팬들에게 히어로 영화를 보는 심리는 우리가 익히 듣고 알아왔던 신화 속의 주인공을 만나러 가는 심리와 같다. 늘 만나던 친구를 다시 만나러 가는 것이다. 슈퍼맨에 대해 조금 익숙한 팬이라면 슈퍼맨 영화를 보러 갈 때에는 ‘크립톤 행성이 폭발하고 슈퍼맨이 지구에 도착해 미국 캔자스 주의 옥수수 밭에 떨어진 뒤 켄트 부부 밑에서 자라 어른이 된 뒤 안경을 쓰고 메트로폴리스에 있는 데일리 플래닛 신문사로 들어가 로이스 레인과 만나 사랑에 빠질 줄’ 알고 자리에 앉는다. 단지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어떻게 재창조되었을지 궁금해 하며 영화관에 들어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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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상상력이 원작 망쳐
하지만 그린랜턴은 이런 기대에 못 미친다. 영화는 만화에 나온 이야기를 단순히 나열만 한다. 한 외계인이 지구에 불시착해 사망하고 그의 반지는 할 조던이라는 퇴출된 조종사에게 넘어갔다. 할 조던은 행성 ‘오아’로 가 훈련을 받고 지구로 돌아와 히어로 활동을 하고……. 영화는 71년을 살아온 사람의 일대기를 중요한 장면만 5분씩 보여주고 넘어가는 것처럼 정신없다. 너무 빨리 지나가 어떤 이야기에도 몰입할 시간이 없다. 이야기가 많아서 속도감이 오는 것이 아니라 지루함만 온다. 팬이 아닌 사람에게는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를 사건이 그저 흘러가기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본질은 가져오지 않고 겉모습만 가져왔다. 그린랜턴은 우연히 운이 나빠 거미에게 물렸거나 방사능 실험을 하다가 실수로 녹색괴물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반지는 자신의 의지로 주인을 선택하고, 그 조건은 ‘정신력’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관객이 납득할 만큼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오히려 주인공이 두려움을 극복해내는 성장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만약 주인공이 그런 사람이라면, 왜 반지가 200만 년 동안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는 인간 중에서 하필 그 사람을 선택했단 말인가.
주인공 할 조던은 원작에서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모험심이 가득한 사람으로, 사고뭉치이기도 하고, 어딜 가나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지만, 우주 한 가운데 떨어져도 낙천적이다.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배트맨의 원작자 프랭크 밀러가 스토리를 쓴 ‘올스타 배트맨 앤 로빈’에서 할 조던은 끊임없이 주변에 뭔가 우스꽝스러운 것을 만들어대는 멍청이로 등장한다. 할은 하늘에 초록색 배트맨 시그널을 만드는 장난을 쳐서 배트맨을 화가 머리끝까지 나게 한다. 할에 대한 배트맨의 평가는 “클락 켄트(슈퍼맨의 이름)보다 주인공 할 일원이 됐다.
그린랜턴은 상상했던 모든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상상만 하면 멍청한 녀석”이다.
이것은 프랭크 밀러만의 자유로운 해석이지만 오히려 영화보다 정확하고, 팬들도 납득시킨다. 프랭크 밀러가 ‘두려움이 없는 사람’ 그린랜턴의 속성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장 큰 적인 ‘두려움의 화신’ 패럴렉스가 원래 숙주로 삼은 사람도 원작에서는 할 조던 자신이었다. 할 조던은 자신이 살던 도시가 파괴되자 반지의 힘으로 재건하려 한다. 하지만 가디언이 힘의 남용이라며 반대하자 정신이 나가 그린랜턴 군단의 힘을 모두 자기 것으로 하려 했고, 그때 두려움의 화신인 패럴렉스가 그를 삼켜 버린다. 이 사건은 그린랜턴 군단의 파멸로, 나아가서는 할 조던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비극을 초래한다.
패럴렉스를 이기는 진정한 방법은 자기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의지를 되찾는 것이다. 영화처럼 미사일을 쏘거나 태양에 던져 버리는 것 같은 빈약한 상상력은 아무리 액션이 멋있다고 해도 오히려 힘이 빠지지 않는가.
영화가 원작을 솜씨 좋게 풀어가지는 못했지만 그린랜턴은 원래 매력적인 친구다. 관심이 있다면 국내에 출간된 만화책 ‘그린랜턴: 시크릿 오리진’과 ‘그린랜턴: 리버스’를 찾아보기 바란다. 각기 그린랜턴의 탄생, 할 조던과 패럴렉스와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이야기는 영화의 내용과 유사하지만 훨씬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