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에서 40km정도 떨어진 이스이초등학교의 운동장. 이곳의 방사능 오염도는 12.29μSv였다. 연간 누적량으로 환산하면 107mSv로, 기준치의 100배가 넘는다. 일본 정부가 추가 대피기준으로 정했다가 시민들의 반발로 철회한 기준인 20mSv보다도 5배 이상 높다(어린이만 철회. 어른은 여전히 20mSv).]
[현지조사 2일째, 사고 원자로 방향으로 접근하다가 20km지점에서 경찰 통제선을 만났다. 20km와 30km사이는 실내대피 구역이지만 실제 대부분의 주민들은 자치단체의 안내로 외부로 대피했다. 상점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집집마다 커튼이 드리워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원전 50km 지점에 위치한 고리야마시 종합운동장 ‘빅 팔레트’의 피난민 임시 거처. 질서는 잘 유지되고 있었다.]
가장 높은 수치는 셋째 날(15일)에 찾아간 지역에서 측정할 수 있었다. 이 날은 후쿠시마 북서쪽을 집중적으로 찾았는데, 약 20km 떨어진 나미에마치 지역의 지표 부근에서는 한 시간에 99.89μSv까지 측정됐다. 이는 약 0.1mSv로, 10시간만 생활하고 있어도 1년 허용 인공피폭한도(1mSv)를 넘기게 되는 높은 수치다. 두려운 마음에 차에서 내리지않고 안에서도 측정해 봤는데, 36.16μSv가 나왔다. 나미에마치보다 더 북서쪽에 있는 아타테무라는 30km 이상 떨어진 지역이었는데, 이곳의 개울가에서도 29.78μSv라는 높은 수치가 나왔다(97쪽 지도 참고).
이날 조사단은 주민 강제 대피구역인 20km 안쪽 지역에 들어갔다. 20km 지점에는 경찰 통제선이 있지만 작은 도로는 열려 있었다. 점심 무렵 들어가서 오후 2시 넘어 되돌아 나올 때까지 조사단은 원전이 있는 후타바마치 시가지를 둘러봤다. 지도를 보니 후쿠시마 제1원전이 바로 1km 앞이었다. 철조 울타리만 넘으면 원전 바로 코앞까지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조사팀은 야외에서 측정할 때마다 방호복을 입고 방진 마스크를 쓰고 차에서 나갔다. 하지만 20km 안으로 들어온 뒤부터는 되도록 차 안에서 실내 측정만 하고 실외로 나가지 않았다. 실내에서는 대략 바깥의 4분의 1에서 2분의 1정도로 차폐되기 때문이다. 방사선 수치는 가까이 갈수록 높아졌다. 1.5km 지점에서 차 안에서 재 보니 33.43μSv가 나왔다. 용기를 내서 딱 한번 실외 측정을 하기로 했다. 두려운 마음에 측정기와 카메라를 들고 뛰었다. 다시 차 안에 들어와 확인한 수치는 94.75μSv. 대기 중 수치에서는 가장 높은 수치였다. 오전에 나미에마치에서 측정한 값은 지표면 부근으로, 대기보다 2~3배 높게 나온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값이 가장 높은 수치였다. 원전 1km 지점이니 지역에 따라 더 높은 수치도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조사단은 주민 강제 대피구역인 20km 안쪽 지역에 들어갔다. 20km 지점에는 경찰 통제선이 있지만 작은 도로는 열려 있었다. 점심 무렵 들어가서 오후 2시 넘어 되돌아 나올 때까지 조사단은 원전이 있는 후타바마치 시가지를 둘러봤다. 지도를 보니 후쿠시마 제1원전이 바로 1km 앞이었다. 철조 울타리만 넘으면 원전 바로 코앞까지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조사팀은 야외에서 측정할 때마다 방호복을 입고 방진 마스크를 쓰고 차에서 나갔다. 하지만 20km 안으로 들어온 뒤부터는 되도록 차 안에서 실내 측정만 하고 실외로 나가지 않았다. 실내에서는 대략 바깥의 4분의 1에서 2분의 1정도로 차폐되기 때문이다. 방사선 수치는 가까이 갈수록 높아졌다. 1.5km 지점에서 차 안에서 재 보니 33.43μSv가 나왔다. 용기를 내서 딱 한번 실외 측정을 하기로 했다. 두려운 마음에 측정기와 카메라를 들고 뛰었다. 다시 차 안에 들어와 확인한 수치는 94.75μSv. 대기 중 수치에서는 가장 높은 수치였다. 오전에 나미에마치에서 측정한 값은 지표면 부근으로, 대기보다 2~3배 높게 나온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값이 가장 높은 수치였다. 원전 1km 지점이니 지역에 따라 더 높은 수치도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사단이 측정한 방사선 수치 60km 떨어진 후쿠시마시까지 주요 지점의 방사선 농도를 지도에 표시해 봤다. 대피기준인 20km 밖이라도 북서쪽 지역의 수치는 대단히 높았다.]
조사팀은 피난민이 생활하고 있는 곳이나 학교가 보이면 방문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살펴봤다. 또 원전 종사자 등 전문가들을 찾아 인터뷰를 했다. 둘째 날 (14일) 들른 고리야마 시의 피난처 ‘빅 팔레트’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원래 시립 종합운동장이었는데, 1500명의 피난민이 임시 거처로 생활하고 있었다. 바닥에 담요를 깔고 종이 상자로 개인 공간을 나눈 채 생활하고 있었다. 홈리스 그 자체였다. 질서는 비교적 잘 유지되고 있었고, 공무원들이 수시로 인원을 파악하고 있었다. 한켠에는 종이박스에 매직으로 ‘임시진료소’라고 적힌 곳이 있었는데, 증상에 따라 요일별로 진료를 해 주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였다. 사람들이 저마다 작은 종이 상자를 들고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오후 간식시간이라 케이크 한 조각과 음료 한 잔을 배급 받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간식을 입에 물고 닌텐도 게임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현장에서는 원전 인근마을의 전직 공무원 시라도 쇼우이치 씨를 만나 인터뷰를 했다. 생활환경과장으로 근무했던 그는 “원전사고에 대비한 계획이 허술해 여러 차례 개선을 요구했지만 듣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조사팀은 피난민이 생활하고 있는 곳이나 학교가 보이면 방문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살펴봤다. 또 원전 종사자 등 전문가들을 찾아 인터뷰를 했다. 둘째 날 (14일) 들른 고리야마 시의 피난처 ‘빅 팔레트’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원래 시립 종합운동장이었는데, 1500명의 피난민이 임시 거처로 생활하고 있었다. 바닥에 담요를 깔고 종이 상자로 개인 공간을 나눈 채 생활하고 있었다. 홈리스 그 자체였다. 질서는 비교적 잘 유지되고 있었고, 공무원들이 수시로 인원을 파악하고 있었다. 한켠에는 종이박스에 매직으로 ‘임시진료소’라고 적힌 곳이 있었는데, 증상에 따라 요일별로 진료를 해 주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였다. 사람들이 저마다 작은 종이 상자를 들고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오후 간식시간이라 케이크 한 조각과 음료 한 잔을 배급 받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간식을 입에 물고 닌텐도 게임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현장에서는 원전 인근마을의 전직 공무원 시라도 쇼우이치 씨를 만나 인터뷰를 했다. 생활환경과장으로 근무했던 그는 “원전사고에 대비한 계획이 허술해 여러 차례 개선을 요구했지만 듣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