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단어 girl을 한글로 쓸 수 없을까. 걸? 뭔가 어색하다. 조금 더 혀를 구부려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써보면 어떨까. ‘거ㅓㄹㄹ’이다. 이게 뭐냐고? 그래도 발음을 하려고 하면 girl과 더 가깝지 않을까.
이번엔 file이다. 한국인이 어려워하는 f발음이 들어 있다. 파일? 화일? 윗니 끝을 아랫입술에 살짝 댔다 터트리는 방식으로 파일? 이건 어떤가.
'ㅎㅂㅏ이ㄹㄹ’. 헉, 이건 또 뭐냐고? 바로 한글로 세계의 모든 언어를 발음대로 쓸 수 있는 ‘확장한글’의 예다.
확장한글은 지금 쓰고 있는 한글 자모 24자를 늘려 글자의 범위를 확장하자는 것이다. 도대체 한글에 무슨 문제가 있기에 확장하자는 걸까. 우리는 말하고 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외국어 때문이다.
세종대왕의 꿈이 이루어진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처음 만들 때부터 조선 사람만 염두에 두지 않았다. ‘훈민정음 해례’에서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자가 있다’ 라고 한 것을 보아도 글자의 적용 범위를 매우 넓게 잡았다. 실제로 당시 중국어를 포함한 외국어 표기를 위해 우리가 쓰지 않던 순경음()등을 만들었다든지 명나라 옥편 홍무정운에 훈민정음으로 발음토를 달아 번역한 것도 그 증거다. 이러한 글자들은 모두 ‘확장 훈민정음’이었다.
이렇게 외국어 발음까지 표기하려했던 훈민정음 정신은 반포 후 60년이 지나 연산군의 언문근압 정책이 시작되면서 지하로 들어가 버렸다. 임진왜란 이후 국세가 약해지고 근대에 들어와 쇄국정책이 시작되면서 외국어 걱정할 형편이 못 되었다. 급기야 19세기말 들어 일제에 나라를 뺏길 지경이 되면서 주시경 선생은 나라를 잃더라도 민족의 혼은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언문을 근대화해 한글로 발전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 때 주시경 선생은 어떻게 하든지 한글을 간단하게 만들어 백성들에게 빨리 심어줄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당시 쓰지 않거나 대치할 수 있는 4개의 훈민정음 글자를 빼고 24자 체제로 정리했던 것이다. 이 24자가 일제강점기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한류가 온 세상으로 퍼지고 외국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외국어 사용이 일상생활이 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한글로는 p 와 f 를 모두 ㅍ으로 표기해야 하며 b 와 v, r 과 l을 구별하지 못한다. 영어 자음 21개 중 6개를 제대로 못 쓴다면 언어 장애인 취급을 면하기 어렵다. 우리가 일본 사람들과 함께 세계에서 영어를 제일 못하는 나라로 평가받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 사람들이 fan 발음을 못해 ‘후앙’ 이라고 한다며 흉을 보는 필자도 TV에 ‘포스’ (force) 나 ‘베리 굿’ 이라는 자막이 나오면 남 흉 본 것이 부끄러워진다. 글로벌한 세계에서 확장한글은 반드시 필요하다.
미래의 컴퓨터 자판에 확장한글을
그렇다면 한글을 어떻게 확장해야 할까? 지금까지 한글확장자판 표준위원회가 제시한 것은 주로 영어의 f, r, v 발음에 대한 것이었고 우리 발음에 없는 sh, th, z 도 거론되었다. 현재 위 상자기사와 같이 3가지 주장으로 정리되며 이들을 혼합하자는 안도 있다. 어떤 의견이 더 옳은지 판단하는 뾰족한 방법은 아직 없다. 홍콩의 한 전문가는 기술적 우월성보다 우리 사회가 어떤 안을 용납하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이 충고는 미래형 컴퓨터 자판의 설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새로운 아이디어라고 내 놓는 자판은 거의가 자기가 더 직관적이라거나, 손가락 이동 거리가 짧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정도 장점 때문에 쓰던 자판을 버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미래형 자판은 특히 확장한글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것이다. 확장한글이 나온다면 새로운 자판은 확장한글을 입력하는 데 적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통일된 사양으로 세계에 내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지금 생각을 뛰어넘는 새로운 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나는 151쪽 표에 보인 10개의 기본 자음, 기본 모음 그리고 억양으로 세상의 모든 글자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세상에 존재하는 30만 글자와 150개 발음기호를 확장한글이 1:1로 대신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컴퓨터라는 지원군이 세세한 일은 맡아주기 때문에 해볼만한 게임이 된다. 나는 이를 한글기반의 만국어 발음표기 시스템(Hangul-based Universal Phonetic System, HUPS) 혹은 ‘흅스’라 부르기로 했다.
흅스는 기본적으로 앞서 말한 1번 안과 비슷하며, 기본 글자수를 줄이고 이들을 합용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확장한글 어떻게 만드나
확장한글을 만드는 방법을 살펴보자. 한글의 기본 자음은 10개며 다른 소리는 이들을 조합해 만들 수 있다. 경음 ㄲ,ㄸ,ㅆ, ㅉ은 이미 쓰고 있으니 따로 설명이 필요 없고 격음 ㅋ 은 ㄱ과 ㅎ의 합이다. ‘각하’ 나 ‘가카’ 는 같은 소리인 것이다. 영어의 v 발음은 ㅂ과 ㅇ의 합으로 본다(이를 ㅂ의 연음이라 하자). 위에 있는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기본 10개의 자음에 대해 모두 격음, 경음, 연음과 이들의 혼합을 이용하면 확장 한글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한글을 확장해도 문제는 남는다. 같은 ‘ㄱ’ 음이지만 유성음으로 발음할 때가 있고 무성음으로 발음할 때가 있다. 또 영어의 bear 와 bare를 흅스로는 모두 ‘베어’ 라고 적을 텐데 어떻게 구별하나. 즉 동음이의어 문제다. 그리고 발음을 따라 적으려면 똑 떨어지지가 않을 경우가 많다. 위 예에서 어떤 이는 bear 를 ‘베어’ 라고 쓰고 어떤 이는 ‘배어’ 라고 쓸 텐데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리다 해야 할까.
이러한 문제들을 다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글자 없이 말만으로도 의사소통이 되는 것을 생각하고 그 원리를 컴퓨터에 응용하면 많은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다. 문맥으로 판단한다든지 개인의 어휘 사용 기록을 참조하는 방식 등이다. 이런 일을 컴퓨터에 맡기자는 것이다.
컴퓨터에 인지능력을 주는 것은 초보적이지만 이미 사용하고 있다. 맞춤법이 틀리는 글자에 빨간 밑줄을 그어준다든지 자동으로 고쳐주는 것이 예다. 그러나 흅스는 이런 정도로 만족하지 않는다. 필자는 흅스 방식대로 다국어 사전을 만들어 컴퓨터에 내장해 보았다. 이 사전은 여러 언어의 어휘들을 뜻에 따라 함께 모으고 단어마다 흅스로 발음을 붙여 놓는다. 기존 사전과 달리 어느 나라 단어가 됐건 발음만 알면 찾아 낼 수 있고 또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 즉 소리만 알면 글자를 몰라도 읽고 쓰고 검색할 수 있는 것이다(girl이라는 철자를 몰라도 발음을 알면 찾을 수 있다).
단, 사용하기 위한 조건이 있다. 한글(흅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용도라면 한글을 배워서라도 쓰려 하지 않겠는가. 내 주장은 확장 한글의 목표를 이와 같이 용도에 두자는 것이다. 더구나 한글은 과학적이어서 원리를 가르치면 한두 시간 안에 깨우친다. 나는 이러한 원리를 담은 ‘흅스’라는 스마트폰 앱을 최근 개발했다.
한글이 세계로 퍼지는 날
정확히 2년 전, 그러니까 2010년 10월 9일 한글날이었다. 한국어정보학회가 세종대왕능(영능)이 있는 여주에서 학술회의를 열었는데, 중국조선어신식(‘정보’라는 뜻의 중국어)학회장이 “중국 정부가 조선어의 자판입력방식을 표준화 하려고 한다”고 말하면서 난리가 났다. 그러나 정녕 탓할 대상은 중국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었다. 그들에게 3가지 자판(천지인, 나랏글, 그리고 스카이 문자판)으로 혼동을 준 것은 사실은 우리였다.
두 달이 지나 우리 국회는 부랴부랴 ‘모바일 정보기기 한글 문자판 표준화 추진 공청회’를 열었고 1, 2단계 계획을 제시했다. 2단계 계획이 미래형 한글 표준문자판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 후 1년 하고도 6개월이 지났다. 미래형 문자판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우선 문자(한글) 자체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확장한글이다. 그러나 관련 위원회가 몇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고 밝혔을 뿐 확실한 결과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확장한글의 핵심을 언어는 물론 컴퓨터 세계에서 영어 기반의 기술에서 탈피하는 데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따라가는 입장을 피하기 어렵다. 삼성이 기술이 뛰어나도 애플을 압도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글이라는 음성과학의 결정체와 월등한 하드웨어 실력을 갖춘 우리라면 능히 독자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 확장한글 자판이 표준으로 장착되고 기존 영어식 쿼티 자판은 한참 찾아야 나오는 그런 컴퓨터가 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는 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