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128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왕오천축국전은 신라 승려 혜초가 남긴 세계적인 여행기다. 제목을 해석하면 ‘고대 인도였던 천축의 다섯 나라인 오천축을 여행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오천축을 넘어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의 파미르(중앙아시아 남동쪽에 있는 고원)를 지나 죽음의 땅 타클라마칸 사막에까지 이르렀다. 선조의 얼이 담긴 소중한 문화유산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글에 대한 내용도, 역사적인 의미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중국 북서지방 간쑤성의 둔황 제17굴(천불동) 석불에서 발견했다. 그는 앞뒤 부분이 잘려나간 이 고문서를 발견하자마자 과거 ‘일체경음의’에서 읽었던 내용을 기억했다. 일체경음의는 불교 어휘를 설명하는 사전인데, 여기에 혜초가 오천축국을 여행하면서 여정을 기록해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내용이 나왔다.
파란 눈의 동양학자가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그 소중하고 대단한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돼 공개되지 않다가 마침내 한국에 왔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실크로드와 둔황’ 특별전에 전시돼 있다. 앞뒤가 잘려 일부만이 남아 있지만 글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잘 보존돼 있다. 혜초의 육신은 타향에 묻혔지만 그의 영혼은 약 1300년 만에 이렇게 다시 고향 땅을 밟았다.

실크로드 여행 중 만난 혜초
혜초는 무슨 이유로 그 먼 길을 여행했을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고난의 과정은 어떻게 극복 했을까. 그 모든 것이 왕오천축국전 안에 담겨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스란히 남았다.
필자는 2006년부터 혜초의 흔적을 따라 먼 길을 여행하며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가 걸어간 길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대했고 험난했다. 지금은 온갖 교통수단이 발달했지만 그의 길을 찾아나서는 일은 여전히 탐험이자 고행이다. 낯설고 험한 이역을 향한 그의 여정에는 실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내가 처음 혜초를 만난 것은 수년 전, 실크로드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동경을 품고 떠난 여행길에서였다. 그때는 자전거를 타고 한국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끝인 포르투갈의 로카 곶까지 가는 1만 8000km의 대장정 중이었다. 거대한 대륙을 건너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겪었고 수많은 사막과 산을 넘었으며 문화와 관습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때로는 지독히 거친 자연 앞에서 만신창이가 됐고 이방인의 방문을 경계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때마다 필자는 오래 전 이 길을 넘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지친 자신을 달래는 동시에 긴 역사 동안 이 길을 걸었을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을 줬다. 내가 달리고 있는 이 길, 문명과 문명이 교류되던 실크로드엔 수많은 대상과 승려, 그리고 정복을 위한 전사들의 이야기가 묻혀 있다. 난 그들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고 그 안에서 우리의 것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내게 용기가 될 만한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혜초는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났고 나는 그를 따라가게 됐다. 그의 여정을 따르면서 혜초라는 인물이 단지 승려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호기심 많은 청년이었고 용감한 탐험가였다. 시대를 기록한 여행가였다. 또한 감성이 풍부한 시인이기도 했다.
혜초는 무슨 이유로 그 먼 길을 여행했을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고난의 과정은 어떻게 극복 했을까. 그 모든 것이 왕오천축국전 안에 담겨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스란히 남았다.
필자는 2006년부터 혜초의 흔적을 따라 먼 길을 여행하며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가 걸어간 길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대했고 험난했다. 지금은 온갖 교통수단이 발달했지만 그의 길을 찾아나서는 일은 여전히 탐험이자 고행이다. 낯설고 험한 이역을 향한 그의 여정에는 실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내가 처음 혜초를 만난 것은 수년 전, 실크로드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동경을 품고 떠난 여행길에서였다. 그때는 자전거를 타고 한국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끝인 포르투갈의 로카 곶까지 가는 1만 8000km의 대장정 중이었다. 거대한 대륙을 건너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겪었고 수많은 사막과 산을 넘었으며 문화와 관습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때로는 지독히 거친 자연 앞에서 만신창이가 됐고 이방인의 방문을 경계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때마다 필자는 오래 전 이 길을 넘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지친 자신을 달래는 동시에 긴 역사 동안 이 길을 걸었을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을 줬다. 내가 달리고 있는 이 길, 문명과 문명이 교류되던 실크로드엔 수많은 대상과 승려, 그리고 정복을 위한 전사들의 이야기가 묻혀 있다. 난 그들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고 그 안에서 우리의 것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내게 용기가 될 만한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혜초는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났고 나는 그를 따라가게 됐다. 그의 여정을 따르면서 혜초라는 인물이 단지 승려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호기심 많은 청년이었고 용감한 탐험가였다. 시대를 기록한 여행가였다. 또한 감성이 풍부한 시인이기도 했다.





1300년 전 그의 숨결을 느끼다
혜초는 704년(신라 성덕왕 3년)에 태어나 16세에 당나라로 갔다. 당시에는 공부하기 위해 또는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로 가는 신라인들이 많았다. 당나라에 머무르려 했던 혜초는 스승인 금강지의 권유로 천축을 가기로 결심했다. 천축은 인도를 가리키는데, 혜초가 살았던 시대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의 5개 지역으로 나눠서 오천축이라 불렀다.
723년 혜초는 스승이 지나온 뱃길을 따라 인도로 향했다. 그리고 약 4년 동안 인도는 물론, 현 파키스탄을 거쳐 신세계나 다름없었던 이교도들의 땅 페르시아를 거쳤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에 그가 여행하면서 보고 들었던 종교와 문화, 언어, 지리, 식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예를 들면 “돌궐(투르크)은 불법을 알지 못해 절이나 승려가 없으며 모직을 입고 고기를 먹는다. 성곽을 거처로 하지 않으며 펠트 천막으로 집을 짓는데, 천막을 들고 물과 풀을 따라 다닌다”고 기록돼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훌륭한 여행기일 뿐 아니라 고대 동서양의 교역로(실크로드)에 대한 정보가 담긴 귀중한 문헌이다.
혜초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은 쉽지 않다. 약 1300년이 지나는 동안 지명이 많이 달라져 기록에 나오는 곳이 어디인지 불명확하다. 여행하기 위험한 지역도 많다. 대표적인 곳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지역인 카시미르 일대와 여행 금지국인 아프가니스탄이다. 필자는 1999년 북인도를 탐사하면서 카시미르의 깊숙한 곳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길은 지금껏 막혀 있다. 2006년 6~8월에 중국 서부에서 파미르를 넘어 파키스탄 산악지대를 지나 이란으로 향했다. 이후 2009년 10월에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와 그 중심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2010년 4~6월 갠지스 강을 따라 불교 번성기 때의 유적과 혜초가 들렀던 장소를 답사했다. 같은 해 8~9월에는 혜초가 인도를 향하면서 지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말라카 해협과 수마트라 섬 일대를 탐사했다. 그 길들은 혜초의 여정에서 가장 행복했고 동시에 가장 고단함이 묻어 있는 지역이었다. 승려 혜초에게 불교 번성기의 인도는 부처의 숨결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겠지만 파미르의 눈보라와 타클라마칸의 뜨거운 모래바람은 벗어나고픈 지옥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혜초는 704년(신라 성덕왕 3년)에 태어나 16세에 당나라로 갔다. 당시에는 공부하기 위해 또는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로 가는 신라인들이 많았다. 당나라에 머무르려 했던 혜초는 스승인 금강지의 권유로 천축을 가기로 결심했다. 천축은 인도를 가리키는데, 혜초가 살았던 시대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의 5개 지역으로 나눠서 오천축이라 불렀다.
723년 혜초는 스승이 지나온 뱃길을 따라 인도로 향했다. 그리고 약 4년 동안 인도는 물론, 현 파키스탄을 거쳐 신세계나 다름없었던 이교도들의 땅 페르시아를 거쳤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에 그가 여행하면서 보고 들었던 종교와 문화, 언어, 지리, 식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예를 들면 “돌궐(투르크)은 불법을 알지 못해 절이나 승려가 없으며 모직을 입고 고기를 먹는다. 성곽을 거처로 하지 않으며 펠트 천막으로 집을 짓는데, 천막을 들고 물과 풀을 따라 다닌다”고 기록돼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훌륭한 여행기일 뿐 아니라 고대 동서양의 교역로(실크로드)에 대한 정보가 담긴 귀중한 문헌이다.
혜초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은 쉽지 않다. 약 1300년이 지나는 동안 지명이 많이 달라져 기록에 나오는 곳이 어디인지 불명확하다. 여행하기 위험한 지역도 많다. 대표적인 곳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지역인 카시미르 일대와 여행 금지국인 아프가니스탄이다. 필자는 1999년 북인도를 탐사하면서 카시미르의 깊숙한 곳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길은 지금껏 막혀 있다. 2006년 6~8월에 중국 서부에서 파미르를 넘어 파키스탄 산악지대를 지나 이란으로 향했다. 이후 2009년 10월에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와 그 중심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2010년 4~6월 갠지스 강을 따라 불교 번성기 때의 유적과 혜초가 들렀던 장소를 답사했다. 같은 해 8~9월에는 혜초가 인도를 향하면서 지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말라카 해협과 수마트라 섬 일대를 탐사했다. 그 길들은 혜초의 여정에서 가장 행복했고 동시에 가장 고단함이 묻어 있는 지역이었다. 승려 혜초에게 불교 번성기의 인도는 부처의 숨결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겠지만 파미르의 눈보라와 타클라마칸의 뜨거운 모래바람은 벗어나고픈 지옥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곳
혜초가 걸었던, 그리고 필자가 걸은 이 길은 약 1300년 동안 얼마나 달라졌을까. 변하지 않은 것은 거대한 자연이다. 히말라야와 파미르는 여전히 그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고, 갠지스의 강물은 바다로 흘러간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은 번성과 쇠퇴를 거듭하고 사라지거나 새롭게 탄생했다. 필자는 그곳 사람들의 모습과 삶의 방식, 강과 산, 계곡, 사막, 모래바람 속에 파묻힌 고대도시들의 흔적들을 바라보면서 혜초가 보았을 풍경을 상상했다.
혜초의 여정은 크게 현재의 인도 파키스탄 지역과 이란,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 서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이 지역들 역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흥과 쇠를 거듭했지만 오랜 전통과 종교적 관습은 여전히 생활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현대화된 우리들의 생활에서는 시골에서조차 옛 생활방식을 찾기 쉽지 않다. 그러나 위의 지역들은 전통적 생활양식이 현재까지 비교적 잘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인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현재 이슬람 국가라는 공통점도 있다.
인도는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매우 독특한 곳이다. 불교는 이미 오래전에 쇠퇴해 유물에서만 흔적을 느낄 수 있지만,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신에 대한 찬양과 수행자들의 모습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강물에 꽃을 띄우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신께 바친다.
파키스탄과 이란, 중앙아시아 무슬림의 아낙들은 여전히 검은 차도르 속에 표정을 감추고 있다. 남자들은 매우 강인하며 종교적인 신념이 무척 강하다. 파미르를 넘으며 눈물을 흘렸을 것 같은 혜초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 곳은 여전히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며 험준한 파미르 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승려였던 혜초에게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가 지배하는 낯선 땅은 더욱 차갑게 느껴졌을 것이다. 타클라마칸의 오아시스는 여전히 중요한 사막의 도시 역할을 하며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다만 이전에 번성했던 도시들은 카라부란(중앙아시아에서 봄과 여름에 부는 흙먼지 폭풍)의 위력을 당하지 못하고 모랫더미 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 후예들은 아직도 사막에 기대어 살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래 바람을 따라 혜초의 발자국은 지워졌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지워지지 않았다. 또 그가 걸었던 5만 리의 여정과 그의 정신은 왕오천축국전으로 지금껏 살아 있다.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품을 수 있는 힘찬 기운을 전하는 선현의 선물로 말이다.
혜초의 여정은 크게 현재의 인도 파키스탄 지역과 이란,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 서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이 지역들 역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흥과 쇠를 거듭했지만 오랜 전통과 종교적 관습은 여전히 생활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현대화된 우리들의 생활에서는 시골에서조차 옛 생활방식을 찾기 쉽지 않다. 그러나 위의 지역들은 전통적 생활양식이 현재까지 비교적 잘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인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현재 이슬람 국가라는 공통점도 있다.
인도는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매우 독특한 곳이다. 불교는 이미 오래전에 쇠퇴해 유물에서만 흔적을 느낄 수 있지만,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신에 대한 찬양과 수행자들의 모습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강물에 꽃을 띄우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신께 바친다.
파키스탄과 이란, 중앙아시아 무슬림의 아낙들은 여전히 검은 차도르 속에 표정을 감추고 있다. 남자들은 매우 강인하며 종교적인 신념이 무척 강하다. 파미르를 넘으며 눈물을 흘렸을 것 같은 혜초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 곳은 여전히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며 험준한 파미르 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승려였던 혜초에게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가 지배하는 낯선 땅은 더욱 차갑게 느껴졌을 것이다. 타클라마칸의 오아시스는 여전히 중요한 사막의 도시 역할을 하며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다만 이전에 번성했던 도시들은 카라부란(중앙아시아에서 봄과 여름에 부는 흙먼지 폭풍)의 위력을 당하지 못하고 모랫더미 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 후예들은 아직도 사막에 기대어 살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래 바람을 따라 혜초의 발자국은 지워졌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지워지지 않았다. 또 그가 걸었던 5만 리의 여정과 그의 정신은 왕오천축국전으로 지금껏 살아 있다.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품을 수 있는 힘찬 기운을 전하는 선현의 선물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