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간은 어느 수준까지 실현될 것인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가상 인간을 만드는 컴퓨터 기술이 어디까지 가능한지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인간의 섬세하고 개성적인 몸짓을 인식하는데 익숙하다. 예를 들어 걸음걸이만 보고도 멀리서 오는 친구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을 주연으로 등장시키는 애니메이션을 볼 때 등장인물의 행동이 어색한지 여부를 금방 알아챈다. 잘못된 것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부자연스럽고 납득하기 어려운 액션을 금방 가려내는 까닭은 애니매이션 동작의 규칙성 때문이다. 사람은 똑같은 체격의 남성이라도 성격, 환경, 심리 상태에 따라 걸음이 달라진다. 따라서 컴퓨터로 연출되는 동작이 사실적으로 보이려면 가상 배우들 역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토이 스토리’의 비밀
인간 동작을 가상 공간에서 만드는 기술은 애니메이션, 가상 환경, 비디오 게임과 같은 응용분야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통해 애니메이션 기술자들은 어린이가 장난감 놀이를 즐길 때처럼 장시간 지루함 없이 구경할 수 있는 ‘토이 스토리’ 같은 만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운동 코치는 가상의 경쟁자를 동원해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열심히 훈련시킬 수 있다. 그리고 비디오 게임 디자이너들은 매력적인 고도의 대화형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 나아가 인간 동작에 대한 모의 실험은 인간공학, 운동선수들의 걸음걸이 분석, 그리고 신체 회복 능력과 같은 중요한 과학 분야에 응용된다.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위한 기초 기술은 크게 키프레이밍(keyframing), 모션 캡처(motion capture), 시뮬레이션의 세가지로 구분된다.
키프레이밍이란 용어는 손으로 일일이 각 행동의 낱장(프레임)을 그리던 전통적인 셀애니메이션 기법에서 발전된 것이다. 물건을 들어올리는 손동작을 애니메이션으로 나타낼 때 동작 단계별로 무수히 많은 프레임을 모두 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주요(key) 프레임을 설정해 그린 후 키프레임 사이의 유사 동작을 생략한 채로 이를 연속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 물론 관객의 입장에서는 화면이 부드럽지 않게 넘어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일본의 초기 애니메이션 형태(12 프레임/초)가 한 예다.
그런데 최근에는 컴퓨터가 각 프레임 사이를 자동적으로 부드럽게 채우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캐릭터가 물건을 들어올릴 때 컴퓨터는 팔꿈치와 어깨 각도를 적절하게 계산해 각 프레임 사이를 ‘알아서’ 메꿔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95년에 제작된 영화 ‘토이 스토리’. 주인공 캐릭터의 자연스런 동작을 위해 각 신체 부위별로 다양한 제어가 적용됐다. 눈썹 동작 하나를 표현하는데도 눈 주위 근육의 움직임이나 눈의 크기를 비롯해 여러가지 제어가 이뤄졌다. 캐릭터 하나에 동원된 전체 제어 포인트는 70개 이상에 달했다.
키프레이밍의 장점은 뭐니뭐니 해도 컴퓨터를 통해 자동적으로 중간 동작을 미세하게 메꾸어 화면에 보여준다는 점. 하지만 제아무리 컴퓨터가 계산했다 해도 실제 사람의 자연스런 동작과는 차이가 나기 쉽다. 따라서 키프레이밍 기법의 경우 제작자는 애니메이션 동작과 실제 환경 속의 동작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또다른 기법인 모션 캡처에서는 제작자가 이런 고심을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나 동물의 각 운동 부위에 부착한 센서가 운동 정보를 자동으로 컴퓨터 화면에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기술 때문에 스포츠 비디오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수많은 유명한 운동선수의 행동의 특징을 자연스럽게 연출하고 있다.
어깨 으쓱거림을 표현
모션 캡처는 비교적 쉽게 평범한 사람들의 행동을 기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아직 개선해야 할 문제점이 많다.
우선 피부와 옷에 부착된 센서들의 위치가 연기자의 움직임과 함께 바뀌는 경우가 빈번하다. 따라서 인체의 동작을 정확하게 측정하기 까다롭다. 이를 개선키 위해 모션 캡처 대상에게 몸에 꼭 달라붙는 옷을 입혀 센서를 부착하기도 한다.
또 연기자와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크기(예를 들어 관절 사이의 길이)가 다르다는 점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예컨대 연기자가 탁자를 만지는 장면이 기록된 경우 화면에서는 캐릭터의 손이 탁자속에 가라앉는 일이 벌어진다. 화면의 캐릭터 크기가 실제 인물보다 작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기술 수준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움직임이 있다. 센서가 케이블을 통해 연기자와 연결된 탓에 연기자의 행동 범위가 제한을 받게 마련이다. 최근에는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선이 달리지 않은 센서를 부착하고 적외선카메라로 동작을 촬영하는 기법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 만든 화면 동작은 유선인 경우에 비해 섬세함이 떨어진다는 결점이 있다.
또 이 시스템은 달리는 대상의 모션 포착을 위해 사용되는 금속성 장비가 가까이 있을 때 잡음(noise)이 섞인 데이터를 만든다. 센서 속에 마그네틱 성분이 있기 때문에 자기 작용이 발생한 탓이다.
한편 키프레이밍이나 모션 캡처와는 달리 시뮬레이션은 관절이나 근육 등 실물의 운동 구조를 토대로 모션을 만든다. 가상 인간은 신체를 이루는 기본 단위들의 집합으로 표현된다. 이를테면 몸의 하체는 허리와 무릎, 발목의 회전 관절로 연결된 몸통, 다리의 상·하부, 그리고 양발로 구성된다.
하지만 화면에 등장한 모델의 모습은 외관상으로 그럴듯하게 보여도 단지 인체의 근사치에 불과할 뿐이다. 기본 단위들의 집합은 뼈와 연관된 신경과 근육 덩어리의 다양한 움직임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간의 쇄골과 어깨뼈의 움직임을 통해 이뤄지는 ‘으쓱거림’과 같은 복잡한 동작을 정확히 실현할 수 없다.
따라서 가상 인간을 만들 때 근육이나 운동신경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한 명령어 체계인 ‘제어 시스템’이 요구된다. 제어 시스템은 매 순간마다 인체의 관절들이 제각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한다.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관절들이 적시에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든다. 예를 들어 달리는 동작은 한 발로 땅을 딛는 단계와, 어느 발도 땅에 닿지 않는 단계의 반복이다. 발디딤 단계에서는 지면과 접촉하는 발목과 무릎, 허리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다리가 공중에 떠있을 때는 허리가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면서 착지하기 위해 팔을 다리와 반대 방향으로 흔들어야 한다.
시뮬레이션 기법은 가상 인간의 움직임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 우선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초당 5m를 달리던 가상 인간을 4m로 달리는 형태로 바꾸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키프레이밍이나 모션 캡처에서는 화면에서 재생되는 속도를 빠르게 조절함으로써 실현이 가능하다. 따라서 운동하는 모습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시뮬레이션 기법은 아예 초당 4m를 달리도록 입력 데이터를 바꾸면 되기 때문에 이런 부자연스러움이 사라진다.
신체가 처한 특수한 상황들도 간단한 데이터 조작으로 쉽게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쪽 다리가 불편한 환자의 행동을 실현하려면 정상인 모델에서 한쪽 다리에 관한 데이터를 적절하게 고치면 된다. 키프레이밍이나 모션 캡처의 경우 처음부터 그런 모델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현재 개발된 기본적인 제어 시스템은 도약, 재주넘기, 착지, 그리고 균형잡기 등 4가지다. 컴퓨터는 이들 시스템을 결합해 공중제비와 다이빙과 같은 보다 복잡한 동작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실생활에 응용 가능성
시뮬레이션의 정확한 모델을 만들기 위해 생체역학적인 데이터를 사용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 예로 미국 조지아공대의 홋진스 교수팀이 연구하고 있는 가상 성인 남성의 팔뚝 무게와 길이는 각각 1.1kg과 0.24m, 평균 둘레는 약 0.25m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제어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연구자들은 실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서 발생한 중요한 질문들에 해답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조만간 물리치료사들은 특정한 부위의 근육이나 관절의 손상으로 생긴 걸음걸이의 유형과 원인을 간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전거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디자인을 위해 시제품을 만드는 시간과 수고를 줄여 자전거의 성능과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다. 또 다이빙 코치들은 특정 선수의 데이터를 입력한 다이빙 시뮬레이션을 통해 그 선수가 새로운 난이도의 기술을 익히거나 표현할 수 있는지 여부를 미리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상 인간의 세계를 지켜보면서 인간과 함께 무궁무진하게 전개될 세계를 그려보는 일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