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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기술로 살아난 백제의 혼

‘2010 세계대백제전’서 공개된 백제 고성 복원기



기원전 18년. 한강 유역에 터를 잡은 백제는 도읍을 웅진(지금의 공주, 475∼538년), 사비(지금의 부여, 538∼660년)로 옮기며 문화를 꽃피웠다. 백제인의 예술적 역량이 함축된 백제금동대향로가 만들어진 사비시대는 세련된 공예가 발달한 백제 문화의 절정기였다.



고대문화의 극치를 달리던 백제의 문화, 예술에 대해 한국 고고미술사학계의 태두로 꼽히는 고 삼불(三佛) 김원용 선생은 ‘우아한 인간미’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시대와 사상을 녹여낸 백제의 모습은 그저 두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면 그만. 그것이 백제를 느끼는 최고의 수단이다.



하지만 그러자니 아쉬움이 남는다. 1400년 전의 모습을 어찌 온전히 살펴볼 수 있을까. 찬란했던 문화를 조악한 상상도나 부족한 유물 한두 점만으로 만족하던 선배들에 비해 우리 세대들은 백제의 도읍을 두 눈으로 바라보고 두 발로 걸어볼 수 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이 최근 되살아났다. ‘디지털 사비성’은 9월 18일부터 부여군, 공주시 일대에서 열리고 있는 ‘2010 세계대백제전’에서 선보이고 있다. 1400년 전 고대 수도를 두 눈으로 마음껏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 디지털 복원 마쳐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술을 이용해 복원한 최초의 ‘도시’는 어디일까. 2007년 6월 미국 버지니아대 버나드 프리셔 박사팀은 서기 320년경 콘스탄틴 대제 시절의 로마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이 ‘로마의 재탄생(Rome Reborn)’ 프로젝트를 위해 연구팀은 남아있는 로마의 유적을 레이저 스캐너로 읽어 모두 3차원(3D) 데이터로 바꾸고 부족한 정보는 고고학자들과 상의해 보완했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를 비롯해 독일, 영국, 이탈리아에서 온 고고학자, 건축가, 컴퓨터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10년 동안 200만 달러를 투입한 ‘모니터 속의 로마’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길이 21km에 달하는 성벽, 7000여 개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100만 명이 거주했다는 거대 도시 로마의 모습을 충실하게 전달했다.



‘문화재 디지털 복원’이란 현재 남아있는 정보를 최대한 활용해 과거의 도시, 문화재 등을 3차원 입체영상으로 복원해 내는 일이다. 작은 소품 하나에서부터 크게는 도시 하나를 완벽하게 재현하기도 한다.







이런 복원기술을 이용하면 이미 사라져 버린 과거 유적을 마치 현장에 가 있는 듯 생생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 상품을 개발할 수 있다. 또 무형 문화재 보존에도 활용될 수 있다. 국내에서는 문화재청과 공동으로KAIST 문화기술대학원(이하 CT대학원)에서 주로 연구하고 있다. 필자가 일을 하고 있는 곳도 이곳이다.



문화재 복원에서 CT대학원의 수준은 로마를 복원해 낸 버지니아대 연구팀 못지않다고 자부하고 있다. 연구팀은 과거에도 페르시아 왕궁, 석굴암 동상 등 문화재를 디지털로 복원했다. 다만 도시 규모의 디지털 복원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팀이 이번 세계대백제전을 목표로 디지털 복원한 자료는 모두 두 가지다. 하나는 수도 사비성의 모습. 그리고 1993년 능산리 절터 발굴조사에서 나온 국보 제 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였다



고대 도시 지도 바탕으로 5단계 복원



처음 사비성 복원 의뢰를 받았을 때는 조금 난감했다. 로마는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다. 2000년 전 고대 도시지만 아직까지 현대 로마 곳곳에 흔적과 윤곽이 뚜렷해 디지털 복원이 상당히 수월하다. 이에 비해 부여에선 1400년의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상가, 아파트, 도로 등 각종 현대 건축물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복원을 진행하기 위한 객관적인 기준자료는 꼭 필요했기에 먼저 백제 고대 도시지도를 기본으로 삼았다.



디지털 문화재 복원을 진행하려면 흔히 5가지 단계를 거친다. 먼저 기본조사가 필요하다. 백제 도읍지의 당시 지형, 유물, 건축양식 등 자연이나 역사자료를 철저하게 고증하는 단계다. 연구팀은 궁궐, 사찰, 민가 등 당시의 건축양식을 조사했으며 일제 강점기 시절 건너간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일본소재 백제유물도 조사했다. 이 결과 적잖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부는 일제 강점기인 1935년부터 2004년까지 수십 년에 걸쳐 백제 유적지역을 정밀하게 조사했다. 백제시대 사비도성을 살펴보기 위해 19개의 주요유적과 26개의 시굴조사 지점을 지정해 운영했다. 이런 기록을 정리해 관련정보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사비도성 유적지도 지리정보시스템’을 만들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조사된 유적의 상세도면을 디지털로 바꿨다. 그리고 정확한 위치측량을 추가로 실시해 5000분의 1 크기의 수치지도까지 만들었다. 유적과 시설물의 정확한 실물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서다. 그런 건물을 하나 둘 씩 모아 ‘1400년 전의 계획도시’라 불렸던 사비성을 복원해 냈다.







기본 조사가 끝나자 시나리오와 콘티작업에 들어갔다. 앞서 조사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 시나리오 및 스토리보드를 제작하는 단계다. 백제 유적과 유물 중 가장 핵심적인 사항을 간추려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절대로 지루해선 안됐다. 관객이 도시 내부를 가상현실을 통해 구경할 때 지침이 되는 일종의 디지털 지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까지 작업이 진행되자 연구팀은 세 번째 단계인 ‘해외답사’를 떠났다. 실제로 건축물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세한 영상 이미지가 필요하다. 동 시대에 백제와 교류를 거쳤던 외국을 조사하기 위해서다. 특히 일본의 자료가 큰 도움이 됐다. 6~7세기 당시 일본 건축양식 등을 충분히 조사하고 사진을 찍었다. 일본 나라, 아스카 시대 유적에는 백제의 건축양식이 숨어있다. 백제 기술자들의 손으로 일본 나라시에 건축한 법륭사를 촬영해 오기도 했다. 이런 사진들은 복원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자료가 됐다.



다음 단계로는 ‘실사 촬영’이 필요했다. 스토리가 있는 생생한 복원을 위해서는 영상 내에 사람이 등장할 필요가 있다. 등장인물들이 백제시대의 복장을 입고 ‘연기’를 하는 장면을 영화 제작용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이다. 게임 캐릭터를 만드는 것과 유사하다.



마지막 단계는 지금까지 모든 자료들을 모두 실제 3D영상으로 바꾸어내는 ‘CG 디지털 복원작업’이다. 이에 앞서 철저한 고증과정을 거친다. 조사 결과와 실사 촬영을 밑그림 삼아 가상건물의 형태와 색깔, 크기 등을 결정하고 실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3D모델링 과정이다. 복잡한 컴퓨터그래픽 작업을 통해 3D영상과 실사 화면을 합성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이런 CG작업은 헐리우드에서 영화 ‘반지의 제왕’ 과 ‘슈퍼맨 리턴즈’ 특수 효과를 담당했던 노준용 CT대학원 교수가 맡았다.



고대 유물 지키는 3D 스캔



영화 ‘아바타’ 이후 영상흐름의 대세는 ‘3D입체’다. 하지만 영화에서 사용되는 3D화면은 일반적인 2차(2D) 화면을 두 개로 나누어 보는 사람에게 입체감을 선물하는 일종의 눈속임이다.



문화제 복원과정에서 사용하는 3D는 개념이 전혀 다르다. 물체의 모습과 크기, 색채 등을 전후좌우 모든 영역에서 정밀하게 수치화한 진정한 3D데이터를 갖춰야 한다. 이 데이터를 이용하면 3D영화와 같은 웅장함을 선사할 수도 있고, 정밀한 사진 같은 2D화면을 재현할 수도 있다. 원한다면 실물이 없이도 똑같은 복제물을 만드는 자료로 사용할 수 있다. 이미 현실에서 사라져 버린 사비성 같은 경우는 과거 유적과 전문가 의견 등을 따라 컴퓨터 속에서 3D데이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아직 현실에 존재하는 문화재는 3D스캐너를 통해 정밀한 데이터를 확보해 놓는 편이 유리하다. 이런 데이터가 있다면 무엇보다 실물 문화재가 손상을 입었을 경우 복원과정에서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다. 만일 숭례문 화재 이전에 건물 전체를 3D데이터로 스캔해 두었다면 복원은 물론 사고에 대비하기도 더 쉬웠을 것이다.



특히 정밀한 소품은 3D스캔을 반드시 해 두는 것이 좋다. 일반적인 사진을 찍어 둔다고 해서 문화재의 정확한 기록을 남겼다고 보긴 어렵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 렌즈도 미세한 왜곡은 피할 수 없다. 실제로 자를 들고 기록을 꼼꼼히 남긴다고 해도 복잡한 형태의 유물은 정확한 실측 자료를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3D 레이저 스캔을 활용하면 실측이 어려운 부분이나 전체 형태를 3D 데이터로 바꿔 영구히 보관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KAIST CT대학원 연구팀은 문화재 3D스캔연구에도 특기를 갖추고 있다. 2010 세계대백제전에 맞춰 사비성 복원과 함께 백제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백제금동대향로’를 3D스캔하고, 그 정보를 활용해 3차원 영상 역시 제작해 두는 연구 역시 맡게 됐다.



3D데이터 얻으려고 2박 3일간 촬영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충남 부여읍 능산리 유적터에서 발견됐다. 7세기 초에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 향로는 문화재등록명칭이 부여능산리출토백제금동향로(夫餘陵山里出土百濟金銅香爐)로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라고도 한다. 글자 그대로 백제의 얼이 담긴 대표적인 문화재다. 1996년 5월 30일에 국보 제287호로 지정됐으며 높이는 64cm, 무게는 11.8kg이나 나간다. 향로로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작인 셈이다. 안에 140개에 달하는 진귀한 조각품이 새겨져 있어 백제인의 문화와 정신세계를 찾아볼 수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를 스캔하기 위해서는 먼저 향로의 원본이 보관돼 있는 국립부여박물관의 협조를 받아야 했다. 작업이 쉽진 않았다. 시간적 제약 때문이다. 2009년 8월 17일부터 19일까지 2박 3일에 걸쳐 작업을 실패했다. 촬영장비로는 독일 슈타인비클러의 광학스캐너를 사용했다. 이런 3D스캐너는 빛을 반사시킨 뒤 되돌아오는 각도를 읽어 물체의 표면 상태를 알아낸다. 레이저 장비가 흔히 쓰이지만 백제금동대향로는 반사율이 높은 금으로 만들어져 있어 광학스너를 쓰는 것이 더 유리하다.











촬영은 국립부여박물관 수장고 내부에서 진행됐다. 향로를 상단과 하단, 두 부분으로 나눠 정밀하게 스캔했다. 3D스캐너는 중대형 카메라와 비슷하게 생겼다. 촬영을 할 때는 삼각대나 비계 등으로 튼튼하게 고정해야 한다. 장면을 하나 촬영하는 데 2~3초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카메라의 위치를 변경해 다시 스캔작업을 반복한다.



디지털 백제금동대향로는 지금까지 지구에서 진행했던 어떤 3D데이터와 비교해도 가장 정밀도가 높다. 스캔 받은 데이터는 총 3200만 개의 폴리곤(다각형)이 나왔다. 백제금동대향로 전체를 3200만 개의 다각형 구조로 나눠 디지털 화면으로 입력한 것. 원본의 양이 너무 커서 영상처리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원본 데이터를 그대로 남겨두고, 우선 500만 폴리곤 정도로 정밀도를 낮추어 3D영상을 제작했다. 이 정도 자료로도 육안으론 실물과의 차이를 알아 볼 수 없다. 앞으로 누구든 이 데이터를 받기만 하면 영화, 드라마 등을 제작할 때 실감나는 백제금동대향로 영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가상공간속에 백제 문화재를 복원하는 과정은 ‘디지털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생각한다. 고대백제 민족의 원형을 묘사한 백제금동대향로에서 우리 문화의 원초적(原初的)인 유형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도시도, 아름다운 백제의 향로도 가상공간을 통해 전달할 수 있게 됐다. 비록 디지털이 만든 가상의 모습이지만 이런 가상현실이 만들어 줄 수 있는 문화산업, 즉 문화컨텐츠 산업의 영역은 분명한 현실이다. 모든 문화 소비자들에게 ‘디지털 타임머신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CT대학원 문화재 디지털 연구팀의 목표이자 각오다. 1

2010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박진호 문화재 디지털 복원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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