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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읽는 ‘정의란 무엇인가’

지난 5월 출간된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수개월째 베스트셀러를 달리고 있다. 결코 읽기 쉽지 않은 인문서적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마저 누를지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최근 사회에서도 정의의 가치가 급부상하고 있다. 총리후보와 신임 장관후보 2명이 청문회에서 불거진 ‘과거 허물’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퇴했다.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딸의 석연치 않은 특채가 드러나면서 이틀 만에 사표를 냈다. 대통령 역시 연일 ‘공정한 사회’를 부르짖고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정의 열풍’을 앓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일들이 최근 갑작스럽게 폭발한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부당한 건 못 참는’ 존재들이다. 때로는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주변의 불공정을 바로잡기도 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갖게 됐을까. 그리고 정당함을 판단할 때 우리 뇌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최근 심리학자와 신경과학자들은 철학의 주제로만 여겨졌던 ‘정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정의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온 여러 에피소드와 관련된 최신 연구 결과를 들여다보자.







정의, 이성만으로 설명할 수 있나



정의란 무엇인가  1강   옳은 일 하기 브레이크가 고장난 전차가 선로를 보수하는 인부 5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철로를 변경하는 스위치를 누를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선로에도 한 사람이 있다. 당신은 스위치를 눌러야 할까. 문제를 조금 바꿔서 이번에는 철로 위 다리난간에 기대 있는 덩치 큰 사람을 밀면 인부들을 구할 수 있다고 하자. 당신은 그 사람을 밀어야할까.



“사람이 짐승과 다른 건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다.”

비겁한 행동이나 염치없는 짓을 했을 때 흔히 듣는 말이다. ‘이성(理性)적 존재’인 인간으로서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해서 되겠느냐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안의 정당함 여부를 판단할 때 전적으로 ‘이성’에 의지할까.



이런 물음에 답을 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는 유명한 예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나오는 ‘전차 문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는 공리주의에 따르면 두 경우 모두 도덕의 관점에서는 동일한 결과다. 단지 차이는 스위치를 누르느냐 몸을 미느냐다.



스위치를 눌러야 할지를 결정하는 상황에서는 사람들 대다수가 스위치를 누르겠다고 답한다. 5명 대신 1명이 희생하는 건 그 사람에겐 안 됐지만 정당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을 밀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상황에서는 사람들 대다수가 밀지 않겠다고 답했다. 5명을 살리자고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의 또는 도덕에 대한 판단은 이성의 영역이라는 많은 철학자들 주장은 이런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2001년 미국 프린스턴대의 연구자들은 기능성자기공영상법(fMRI)을 써서 사람들이 이런 도덕적 판단을 해야 할 순간에 감정에 관여하는 뇌의 영역도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즉 내측 전두이랑, 뒤쪽 띠이랑, 모이랑이 활성화 됐는데 이곳은 슬픔이나 두려움 등 감정의 동요에 관여하는 부분이다. 스위치를 누를지 말지를 선택해야 할 때보다 사람을 미느냐 마냐를 결정해야 할 때 위의 영역들이 훨씬 강하게 활성화됐다.



즉 두 상황 모두 결과(한 명을 희생해 다섯 명을 살리는)를 놓고 보면 마찬가지라는 ‘합리적인 이성’에 비해 스위치를 누를 때 느끼는 감정 동요는 미약하지만,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내 손으로 직접 밀어야 할 때 느끼는 감정 동요는 이성을 압도한다는 것. 연구자들은 “도덕 심리학의 오랜 합리주의 전통은 도덕 판단에 이성의 역할을 강조해왔다”며 “그러나 실제로는 이성과 함께 감정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2007년 미국 아이오와대 마이클 쾨니그스 교수팀은 위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네이처’에 발표했다. 즉 감정을 처리하는 영역인 복내측 전전두피질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전차문제를 낼 경우 스위치 문제에서는 정상인과 비슷했지만 사람을 미는 문제에서는 “밀겠다”는 대답이 2배 더 높았다고. 즉 감정의 영향력이 줄어들 때 도덕적 판단도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브라질 도르 병원의 신경과학자 조르즈 몰 박사는 복내측 전전두피질이 죄의식이나 동정심 같은 ‘친사회적 정서’가 관여하는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 자선을 할 때도 이 부분이 활성화된다.2007년 몰 박사팀은 우리의 도덕적 감정에는 호소하지만 특별한 판단이 필요없는 경우에도, 예를 들어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의 사진을 볼 때도 이 부분이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의 판단은 일관성이 있나



정의란 무엇인가  2강   최대 행복 원칙 | 공리주의



1884년 여름, 영국 선원 네 명이 작은 구명보트에 올라탄 채 육지에서 1600km 떨어진 남대서양을 표류했다. 이 가운데는 17살짜리 소년 리처드 파커도 있었다. 비상식량은 떨어지고 마침내 표류 20일이 되는 날 파커는 살해됐고 세 사람은 인육을 먹으며 연명해 24일째 되는 날 구조됐다.



실화인 이 사건을 두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는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가 중요하더라도 과정이 정당하지 못하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례에 대한 판단은 그 사람의 성향에 따를 것이고 누가 옳고 그르다고 단정 짓기도 어렵다. 그런데 이런 판단을 할 때 우리 각자는 적어도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일까.



2008년 미국 버지니아대 심리학과 조너던 하이트 교수팀은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개성과 사회심리학 회보’에 실었다. 연구자들은 실험참가자들에게 위와 같이 도덕적으로 판단을 내리기 애매한 문제들을 제시했다. 참가자들은 당혹감 속에 설문지에 답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변수가 있었다. 한 집단은깔끔한 실내 공간에서 설문에 답한 반면 다른 집단은 지저분한 책상과 구린내가 올라오는 휴지통이 있는 환경에서 설문에 응했다.



설문 조사를 분석한 결과 깨끗한 곳에서 답한 사람들은 위의 인육 사건이 불가피했다는 답이 많았다. 역겨운 냄새가 나는 곳에서 답한 사람들은 인육 사건이 역겨운 행위라고 답한 비율이 높았다. 도덕성을 판단할 때 전혀 관계가 없는 주변 환경의 청결도가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1987년 KAL기 폭발사건이 났을 때 우리나라로 범인이 인도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분노로 들끓던 사람들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테러리스트 김현희의 미모에 “하수인이 무슨 죄냐, 시킨 사람들이 나쁘지…” 같은 동정론으로 급변했다. 노숙자 차림의 사람이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에는 경악하면서 조폭영화에서 시크한 슈트 차림으로 폼나게 방망이를 휘두르는 모습엔 자기도 모르게 ‘멋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이트 교수는 “도덕적 판단은 자동적이라고 할 만큼 즉각적으로 일어난다”며 “의식적 추론은 사실 자신의 판단에 대해 그럴듯한 이유를 찾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설문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왜 그런 답을 했냐고 물으면 다수는 “그냥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답하거나 어떤 근거를 댄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하면 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결과만 중요시하는 것도 ‘뇌’ 탓?



정의란 무엇인가  5강   중요한 것은 동기다 | 임마누엘 칸트



미국에서 있었던 전국 철자 맞히기 대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13살 소년이 ‘echolalia’의 철자를 맞혀야 했다. 한 번 들은 말을 자꾸 되풀이하는 성향을 뜻하는 말이다. 아이는 철자를 틀렸지만 심사위원이 눈치채지 못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하지만 아이는 자기가 틀렸다는 걸 깨닫고 이를 얘기해 탈락했다. 다음날 ‘철자 대회 영웅’이 된 이 정직한 아이는 신문기자에게 “더러운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라고 당시 심정을 밝혔다.



도덕 철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18세기 철학자 두 사람은 독일의 임마누엘 칸트와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흄이다. 칸트가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힘이 ‘냉철한 이성’에서 나온다고 주장한 반면 흄은 정념이 도덕적 판단을 이끈다고 보았다. 최근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흄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그렇다고 칸트의 도덕 철학 전부가 과학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건 아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책에서 가장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 5강이 바로 칸트에 대한 장이다. 사실 칸트의 엄밀한 논증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동기가 결과보다 중요하다’는 명제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감한다. 퀴즈에 탈락한 아이가 오히려 퀴즈 영웅이 된 것도 결과보다 동기에 충실했던 아이의 마음이 높이 평가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기를 중요시하는 마음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미국 매세추세츠공대(MIT)의 인지신경과학자인 레베카 색스 교수팀은 경두개자기자극법을 써서 뇌의 오른쪽 측두정엽(RTPJ)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면 피험자들이 타인의 의도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매수당해 친구의 커피에 독약을 타 살해하려고 한 사람이 실수로 진짜 설탕을 타 살해기도가 무산되는 장면을 봤다고 하자.



이 경우 독살을 실행하지 않았더라도 친구를 죽이려고 한 사람을 살인자 버금가게 죄질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오른쪽측두정엽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살인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독살 기도가 그리 큰 잘못은 아니라고 판단한다는 것. 색스 교수는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는 전차 문제에서처럼 남에게 해를 끼치느냐 여부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라며 “타인의 의도를 파악하다는 것 역시 또 다른 중요한 기준”이라고 말했다.



내 이익이 전부는 아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6강   평등 옹호 | 존 롤스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사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어느 날 변기가 샜다. 수리공은 할머니가 어수룩해 보이자 수리비로 5만 달러(약 6000만 원)을 불렀다. 계약금 2만 5000달러를 지불하려고 은행을 찾은 할머니에게 은행원이 자초지종을 물었고 사실이 들통이나 수리공은 사기죄로 체포됐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다들 노인을 농락한 뻔뻔한 수리공을 비난하기 마련이다. 사실 자본주의체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돈 문제에 굉장히 민감하다. 연봉제를 실시하는 많은 회사들이 사원 개개인의 연봉을 비밀로 하고 누설할 경우 퇴사의 사유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돈 문제에 관련된 미묘한 심리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실험이 ‘최후통첩게임’이다. 두 사람 가운데 한 명(A)에게 10만 원을 주며 어떻게 분배할지를 결정하라고 한다. 다른 사람(B)에게는 그 비율을 받아들일지 결정할 권한이 있다. 만일 그가 받아들이면 그 비율대로 나누고 거부하면 둘 다 못 받는다.



기존의 경제이론에 따르면 B는 1만 원을 받아도 받아들여야 한다. 한 푼도 못 받는 것 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험 결과는 제시 비율이 25% 미만일 경우 대부분이 거절한다고 한다. 설사 내가 한 푼도 못 받더라도 상대방의 부당한 이득을 응징하겠다는 뜻이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실험결과 지역과 문화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략 40%를 나눠주는 제안을 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그렇다면 ‘독재자 게임’은 어떨까. 이 경우 A가 분배비율을 결정하면 그대로 시행된다. 따라서 A가 한 푼도 안 줘도 된다. 그럼에도 A는 최후통첩게임 때보다는 적지만 B에게 일부를 떼어준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세계은행의 카를라 호프 박사는 “돈을 나누려는 동기는 그런 행동을 기대하는 사회의 규범을 어기지 않으려는 욕망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가장 인색한 선택(한 푼도 안 줄 경우)을 하면 너무 야비한 사람으로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변형된 독재자 게임을 통해 이런 설명을 지지한 연구 결과가 있다. 즉 0~5달러 사이를 주는 원래 독재자 게임에서는 71%가 일부를 주지만, -5~5달러 즉 상대의 5달러를 뺏을 수 있는 데까지 범위를 넓혀주면 돈을 나눠주는 비율이 10%로 떨어진다. 옵션을 상대의 5달러를 가져올 수 있는 범위까지 넓혀주면 ‘안 뺏는 것만 해도 어딘데…’라는 마음이 들기 때문에 한 푼도 안줘도 그다지 야박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결과다. 이처럼 우리는 가장 이기적인 행동은 피하려는 욕망이 있다.



‘제삼자처벌게임’은 공정함을 추구하는 사람의 강한 욕망을 잘 보여준다. 최후통첩게임처럼 A가 주어진 돈에서 B에게 얼마나 떼어줄지 결정한다. 그런데 배분을 받아들일지 판단하는 건 판돈의 절반을 기본으로 받는 제삼자인 C다. 만일 A의 결정이 부당하다고 판단할 경우 C는 A가 돈을 잃게 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자신도 돈을 잃는데, C가 내놓는 돈의 3배를 A가 잃게 규칙을 정했다고 하자.











예를 들어 A가 10만 원에서 1만 원을 B에게 주기로 했는데 C가 수긍한다면 A는 9만 원, B는 1만원, C는 5만 원을 받는다. 그런데 C가 반발해 자기돈 1만 원을 내놓으면 A는 6만 원(9만 원 - 3×1만 원), B는 1만 원, C는 4만 원(5만 원-1만 원)을 갖는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1만원을 손해 보더라도 그 때문에 부당하게 이득을 본 사람이 3만 원을 잃는다면 기꺼이 ‘처벌’에 동참한다. 



경제행위에서 인간의 이타심을 연구해온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최정규 교수는 “탐욕스런 사람이 아무 처벌을 받지 않는 사회에서는 사람 사이의 거래나 계약이 성립될 수 없다”며 “인류가 공동생활을 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서 공정함에 대한 욕구는 더 강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집단 규모와 경제 시스템의 규모가 위와 같은 실험에서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조셉 헨드릭 교수팀은 3월 19일자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15개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다양한 게임 실험을 실시한 결과 집단이 크고 시장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공정함과 처벌에 대한 기준이 엄격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현대인의 친사회적 태도를 타고난 심리적 성향의 산물로만 여기기는 어렵다”며 “인류 역사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규범과 제도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타심의 어두운 그림자



정의란 무엇인가  9강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 충직 딜레마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대 보안관은 최근 국경 감시에 인터넷을 활용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에 녹화된 내용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하면 국경 감시를 돕고 싶은 시민은 인터넷에 접속해 지켜보다 국경을 넘는 사람이 보이면 보안관 사무실에 보고한다.



정의가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 가운데 하나가 애국심일 것이다. 접속자 수만 명 가운데 한 명은 직장에서 돌아와 피곤한 몸으로도 지루한 화면을 끈질기게 바라보며 “우리나라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법 집행을 위해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애국심은 여러 상황에서 드러난다.



월드컵 경기를 보며 사람들 대다수는 자국 팀을 일방적으로 응원하기 마련이다. 심판이 자국 팀에 불리한 판정을 내리면 분노하다가도 비슷한 상황이 상대팀에 적용되면 모른 체 한다. 한 나라 사람끼리는 자기 나라 욕을 하다가도 다른 나라 사람이 자기 나라를 비난하는 걸 보면 분노가 일어난다.



애국심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이 전쟁이다. 자기 집단(예를 들어 국가)을 지키기 위해 다른 집단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바치는 건 명예스런 행위로 추앙받는다. 그런데 많은 경우 상대편에서도 죽은 사람은 명예를 얻는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심리학과 카르스텐 드 드루 교수팀은 자기 집단에 대한 이타심과 외부 집단에 대한 적대심에 신경전달물질이자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사이언스’ 6월 11일자에 발표했다. 옥시토신은 여자가 아이를 출산한 뒤 많이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모성을 불러일으킨다고 알려져 있다.



콧속에 옥시토신을 뿌린 사람은 대조군으로 맹물을 뿌린 사람에 비해 이기적인 성향이 줄어들고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해 더 협조적이었다. 반면 외부 집단에 대해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외부 집단에 의해 경제적 손실을 볼 상황이 닥치자 옥시토신을 뿌린 사람들은 자신의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지키고 외부 집단에 손실을 끼치려는 경향이 높아졌다.



연구자들은 “인류가 집단을 이뤄 살아가면서 외부 집단에 맞서 싸워 이긴 집단만이 생존할 수 있었다”며 “자기집단중심의 이타심은 자기집단에 위협이 되는 외부에 대한 적개심과 맞물려 있고 그 생물학적 밑바탕에 옥시토신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의를 둘러싼 많은 딜레마들이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는 이유도 단순히 냉철한 이성만으로는 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성 뿐 아니라 감정과 사회 규범, 기술 발전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최정규 교수는 “인간의 삶은 경제학 이론이나 과학적 가설이 담아내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불완전하다”며 “이런 현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겠지만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샌델 교수 역시 숱한 질문을 제기할 뿐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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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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