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흔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시기를 벨 에포크(Belle Epoque)라 부른다. 이성에 대한 낙관적인 사고가 지배했던 이 시기는 인기 매체마다 늘 수학퍼즐이 등장하고, 이를 푸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던 때였다. 수많은 퍼즐 작가들이 탄생했으며 이 가운데에 특히 미국의 샘 로이드와 영국의 헨리 듀드니가 발군의 실력을 자랑했다. 이들의 작품은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뛰어난 걸작이 많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이성에 대한 낙관적 신념은 사그라지고 말았다. 차차 수학퍼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줄어들었고 퍼즐은 그저 애들 장난 같은 것으로 취급됐다. 로이드와 듀드니가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도 잊혀졌다. 이 모든 상황을 바꿔 놓은 사람이 바로 마틴 가드너였다.

고교 수학수업만 받고 25년간 수학 칼럼 연재

1914년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에서 자란 가드너는 미국 시카고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수학퍼즐을 널리 소개한 탓에 그의 전공을 수학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가 받은 수학 교육은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넘어서지 않았다.


가드너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해군으로 복무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철학과 대학원 과정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유명한 과학철학자인 루돌프 카르납 교수를 만난다. 카르납 교수의 전공은 논리학, 수학의 기초, 그리고 물리학이었다. 그는 형이상학, 종교, 도덕, 아름다움처럼 경험으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외면하고 수학적 명제를 중시하는 논리실증주의의 대표주자였다. 카르납 교수 덕분이었을까. 이때부터 가드너는 근거가 희박한 유사과학을 반대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또 수학과 결합한 철학에 집중했으며 과학 전반에 관심을 갖게 됐다.

1년간 대학원을 다닌 가드너는 프리랜서 작가 활동을 시작한다. 여러 잡지에 글을 기고하던 그는 미국의 유명 과학 잡지인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1956년 12월호에 ‘헥사플렉사곤(hexaflexagon)’에 대한 글을 투고했다. 헥사플렉사곤은 6개의 면을 가진, 종이로 접을 수 있는 다면체이다. 그런데 가드너의 글을 본 발행인이 가드너에게 비슷한 내용으로 연재를 할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해온다. 가드너가 현대 수학의 내용과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일반 대중에게 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췄음을 알아본 것이다.

제안을 수락한 가드너는 바로 다음 호인 1957년 1월호부터 ‘수학적 게임(Mathematical Games)’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그가 연재한 칼럼의 주요 주제는 ‘유희 수학’이라 부르는 분야였다. 정수를 n행, n열의 정사각형에 알맞게 나열해 가로·세로·대각선의 합이 전부 같아지도록 하는 마방진이라든지, 6=1+2+3처럼 자기 자신을 제외한 양의 약수를 더했을 때 자기 자신이 되는 정수인 완전수라든지, 가드너는 심오한 수학보다는 흥미롭고 매력적인 수학을 등장시켰다. 수학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도 가드너의 유희 수학이라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가드너의 칼럼은 새로운 유희 수학을 소개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피에트 헤인의 ‘소마 큐브’를 세상에 널리 알린 것도 그의 칼럼이었고 존 콘웨이의 ‘생명 게임’을 세상에 소개한 것도 그의 칼럼이었다. 또 가드너는 잊혀 가던 로이드와 듀드니에 대한 관심을 되살렸다. 그는 자신의 칼럼을 통해 로이드와 듀드니가 얼마나 뛰어난 퍼즐 작가였는지를 세상에 알렸다. 시중에 떠도는 대부분의 수학 퍼즐이 이 두 사람의 작품이고, 또 그것이가드너를 통해 대부분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마 저승에서 가드너를 만난 두 대가가 절이라도 하지 않을까.

그의 칼럼은 하나의 주제를 단순히 설명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주제와 관련된 역사, 희귀한 작품, 최근의 발전 과정 등을 상세히 알려주면서 수학자들에게서 직접 들은 내용까지알기 쉽게 전했다. 여기에 유머까지 곁들였으니 그의 칼럼은 대단한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가드너의 연재 칼럼은 한두 해도 아닌 25년 동안이나 계속됐으며 이를 엮어 만든 책은 15권이나 됐다.

가드너는 자신의 칼럼을 읽고 보내온 수많은 독자들의 의견을 모아 더욱 완성도를 높이곤 했다. 그 가운데는 존 콘웨이 같은 일급 수학자도 있었고 평범한 10대 소년도 있었다. 가드너의 칼럼을 묶어 만든 책은 이런 열성적인 독자 의견을 실어, 또 다른 재미를 줬다.

그가 칼럼을 연재한 마지막 해인 1981년에는 격월로 연재를 줄였다. 동시에 그의 칼럼을 대신할 새로운 칼럼이 시작됐다. 가드너의 배턴을 이어받은 영광의 주인공은 1980년 퓰리처상 수상작 ‘괴델, 에셔, 바흐’를 쓴 물리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였다. 그는 자신의 칼럼 제목을 ‘초마법적인 주제들(Metamagical Themas)’로 지었다. 전임자였던 가드너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수학적 게임(Mathematical Games)’의 철자 순서를 바꿔서 만든 제목이다. 호프스태터의 뒤는 수학자 이언 스튜어트가 ‘수학적 유희(Mathematical Recreations)’로 진행했고 그 뒤 전산학자 데니스샤샤가 ‘퍼즐 모험(Puzzling Adventure)’을 연재했다. 이들 모두 대단한 학자이자 글을 재밌게 쓰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가드너만큼 오랫동안 연재한 사람은 없다. 이들의 칼럼이 가드너의 유머와 품격에 이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주석 달고 마술 트릭도 풀고

가드너가 연재를 그만뒀다고 해서, 그가 글쓰기를 멈춘 것은 아니었다. 매달 칼럼을 써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그는 수많은 글을 쓰고 수많은 책을 펴냈다. 그가 낸 단행본은 칼럼 모음집인 15권을 빼고도 무려 60권에 달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이 정도로 왕성한 필력을 자랑한 작가가 있을까.

가드너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수학을 주제로 한 책을 많이 썼다. 이 중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책이 ‘이야기 파라독스’이다. 1978년에 나온 ‘수학 퍼즐 아하!’를 번역한 이 책은 흥미로운 역설들을 모아 만들었다. 주제마다 유머러스한 삽화에 수학적인 설명을 덧붙였으며 초급 논리학 교재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역사적이거나 문헌학적인 해설은 세련된 느낌마저 준다.


그는 또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로도 알려져 있다. 가드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그 속편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주석을 달아 ‘앨리스(The Annotated Alice)’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숨어 있는, 뜻을 알 수 없는 구절과 각각의 유래를 알고 싶은 독자라면 반드시 봐야 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마틴 가드너를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주제는 유사과학이다. 가드너는 유명한 마술사였던 제임스 랜디와 함께 회의주의 운동을 주창했다. 과학에서 회의주의란 엄밀한 과정으로 명제를 증명하고 충분한 근거 없이는 어떤 믿음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그래서 과학적 회의론자는 상식에서 벗어나거나 양립할 수 없는 이론에 회의적인 자세를 취하고 이를 신중히 비판한다. 제임스 랜디는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초능력이란 사실 ‘눈속임 마술’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짜 초능력을 보이는 사람에게 100만 달러를 주겠다고선언하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가드너 또한 마술에 상당한 재능을 보인 아마추어 마술사였다. 그의 칼럼에서도 때때로 수학적인 마술 트릭을 소개하곤 했다. 수학자로서는 알 수 없고, 마술사로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인물로 가드너보다 더 적절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가드너가 참여했던 ‘초정상주장조사위원회(CSICOP)’는 현재 ‘회의적 탐구 위원회(CSI)’라는 이름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사실 가드너가 로이드와 듀드니처럼 자신만의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낸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이드, 듀드니, 또 비슷한 시대에 활약했던 수많은 퍼즐 작가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위대한 퍼즐 작가라 불린다. 가드너 스스로는 자신이 남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로이드나 듀드니는 물론 대부분의 퍼즐 작가들이 지금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 유희 수학 분야가 지금처럼 발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대가가 아니라면 누가 대가라 불릴 수 있을까.

필자는 약 20년 전에 그의 이름을 알았지만, 그의 위대함을 깨닫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1956년 12월호를 읽기 시작해, 마지막 칼럼까지 읽고 나서야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알게 됐다. 매년 미국에서는 그의 글을 읽고 자란 사람들이 모여 G4G(Gathering for Gardner) 축제를 연다. 언젠가 이 모임에 가서 마틴 가드너를 만나보려 했건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돼 버렸다. 가드너 선생님, 편히 잠드소서. 1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10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박부성 경남대 수학교육과 교수 기자

🎓️ 진로 추천

  • 수학
  • 철학·윤리학
  • 언론·방송·매체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