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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의 젊은 시절 보금자리

1만 5천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KAIST. KAIST맨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창업을 한 사장님이 있는가 하면 연구소에 남아 기술연구에 매진하는 사람도 있다. 각계에 퍼져있는 KAIST맨들을 찾아봤다.

(주)메디슨 대표이사 이민화 뿌린씨앗을 거두는 마음으로

공학도라면 석사졸업 후 기업에서 충분한 현장실습을 하고 무엇을 더 배울 것인지를 파악해서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것이 좋습니다.” 국산 의료기기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이민화(42) 이사의 충고다.

그는 78년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공학도로서 현장경험의 필요성을 절감, 대우전자(당시 대한전선) 특수사업부에 입사했다. 부서의 여건상 기획에서 연구개발을 거쳐 영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은 점이 현재의 메디슨을 이끄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82년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KAIST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원래 생각은 컴퓨터를 전공하는 것이었으나, 이 분야는 향후 ‘자본집약적’ 산업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실험실에서 국책연구과제로 의료기기 프로젝트를 착수, 초음파진단기 개발사업이 진행됐다. 그 결과 85년 마침내 초음파진단기를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그러나 이것을 민간 사업으로 이끌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낳은 자식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으로 졸업 후 직접 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메디슨은 매출액의 약 12%를 연구개발 분야에 투자, 신제품 개발에 힘써 매년 약 80%의 매출 성장을 기록했다. 또한 타사보다 30% 이상 낮은 가격 책정, 철저한 서비스, 방문 교육 등을 통해 국내에서 초음파진단기 제조업체로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그 결과 1991년 제1회 벤처기업상을 비롯, 1991년 5백만불 수출, 1992년 1천만불 수출로 훈장을 받았다. 또한 미국 러시아 독일 중국 싱가포르 일본 등 세계 6개국에 현지 법인 및 합작기업을 설립했으며 55개국의 해외 대리점을 통해 활발하게 시장을 넓히고 있다. 앞으로 메디슨은 의료정보화 사업, 한방 의료기기 사업, 그리고 생체신호기기 등을 개발하는 종합의료기기 회사로서 발돋움할 계획이다.

“KAIST는 가장 첨단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실험위주의 교육은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닌 실제 현장을 위한 학문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어려운 여건을 이기고 국산 의료기기업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우뚝 선 기술자 출신 창업가의 회고였다.
 

첨단기술과 실험위주의 교육이 현장을 위한 학문에 큰 도움을 주었다.


(주)큐닉스 대표이사 이범천 전위부대 사명감을 오늘에 살려

KAIST 초대 학생회장, 국내 전산학 박사 1호. 교수직을 그만 두고 업계에 뛰어든 이범천(45) 회장의 학창시절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그때 특허법 과목이 있었습니다. 실용적인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산업화를 주도하자는 설립 취지를 반영한 것입니다. 학생회도 연구 분위기 개선을 위해 만들어진거죠.”

73년 전산학과(당시 수학 및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줄곧 컴퓨터를 전공했는데, 박사학위를 받기 전에 벌써 후배들에게 강의하는 수준이었다. 졸업 후 잠깐 KAIST 교수직을 맡았으나 ‘좁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국내 ‘과학기술 전위부대’ 로서 산업계를 주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컴퓨터 분야는 산업계의 연구수준이 학계보다 결코 뒤지지 않다는 점이 자신감을 주었다. 마침내 81년 회사를 창립한 그의 꿈은 컴퓨터 기술을 ‘상품’ 으로 만드는, 당시로서는 낯선 시장을 개척하는 일이었다.

반응은 기업보다 정부에서 먼저 나타났다. 회사가 개발한 워드프로세서가 정부의 브리핑용 기기로 채택된 것이다. “군사문화 덕택(?)이었던 같습니다. 당시 정부내 모든 브리핑은 기밀 누설의 위험이 큰 차트작성 방식이었거든요. 정부는 작은 용량의 성능 좋은 ‘미니 차트’ 가 필요했습니다.” 한 전자쇼에서 기계를 전시할 곳이 없어 계단 밑 공간에 설치, 선전하며 고생한 보람이 나타났다.

이후 7-8년간 터미널 프린터 등 컴퓨터 주변기기 분야로 사업을 확장시키던 그에게 하나의 전기가 마련됐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회사의 빌 게이츠와 함께 일하게 된 것. 그는 93년까지 게이츠를 도와 한국을 비롯한 동양권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진출하는 전략을 구축했다.

잠시 휴식 후 95년에 원대복귀.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주)큐닉스를 키울 생각이다. 먼저 그동안 사무용으로만 인식되던 큐닉스를 일반소비자용으로 확장시킬 계획이다. 또한 대외의존도가 높은 주변기기 부품을 국산화할 전략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자본력과 경영능력이 정책적으로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현실이 만만치 않다. “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이 자유롭게 창업하고 경쟁할 수 있는 하부구조가 빨리 마련되기 바란다”는 말에서 자신처럼 젊은날의 사명감을 실현시키려는 후배에 대한 배려가 조심스럽게 담겨 있었다.

창원대학교 총장 이수오 유능한 행정은 동문 덕택

이수오(48) 총장은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탁월한 행정가로서 학문 발전에 힘쓰고 있다. 그는 75년 생물공학과에 입학, 석박사 과정을 마친 후 81년 창원대학교 미생물학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처음 교수로 부임됐을 때 학교에는 공대가 없었다. 그는 공대를 설치하는 일의 책임을 맡았고, 약 4년 뒤 공대가 개설됐다.

행정가로서 창원대학교의 발전에 본격적으로 기여한 것은, 교수로 부임한 지 3년만에 학생처장을 맡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교무처장을 거쳐 95년 4월 총장의 자리에 올라 대학 운영을 총괄하기 시작했다.

“교무처장 시절에 단과대학이었던 창원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는 일을 맡아 마침내 91년 3월 창원대는 종합대학으로 새롭게 발돋움했습니다.” 학교 운영에 중요한 변화가 있을 때마다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책임자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총장을 맡은 후에도 굵직한 성과를 올렸다. 먼저 정부가 각 도의 1개 대학을 선정, 지원하는 국책 공대로 95년 창원대가 지정됐다. 창원공대가 역점을 두는 메카트로닉스 분야의 수준이 인정된 것이다. 이어 95년 12월 산동대학을 비롯한 중국의 2개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앞으로 메카트로닉스 분야를 중심으로 학생과 교수를 교환해 협동 연구를 벌일 계획이다.

개인적인 연구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87년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환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 남해안 어패류에 사는 미생물 생태를 연구하고 있다. 이외에도 93년부터 경남신문사 논설위원으로 활약, 주요 시론을 집필하고 있다.

대학을 책임지고 지역발전에 힘쓰려면 아무래도 폭넓은 인간관계가 필요했을 것이다. KAIST 출신이라는 점은 그에게 남다른 도움이 됐다. “KAIST 동문들이 관계 학계 업계 등의 고위직에 골고루 분포함에 따라 이들로부터 새로운 자료와 정보 수집, 상호 협의의 기회가 확대돼 대학 운영에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또한 KAIST에서 선진 학문을 습득한 점 때문에 어디서나 떳떳하게 처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앞으로 보다 확실한 KAIST 정신, 이를테면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의 선봉자가 돼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베테랑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KAIST가 연구나 교육 면에서 세계적인 일류로 자리매김할 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양동열 KAIST 기계과 정교수 1호 박사의 기대를 원동력으로

양동열(47)박사는 본인의 인생역정이 본의보다는 주위의 환경에 의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제가 KAIST 1호 박사가 된 것은 순전히 가나다 순이였습니다. 78년에 1회 박사가 2명 나왔는데 저하고 양창주박사였죠. 가나다 순으로 제가 1호가 됐습니다. 박사과정도 할려고 한게 아니었는데 지도교수가 권유하는 바람에 했고 KAIST교수직도 학위를 따자 마자 제 지도교수가 교수직을 그만두는 관계로 공석이 생겨 그 자리를 제가 메운 셈이지요.”

국내박사로서, 그것도 설립 당시 많은 관심을 끌었던 KAIST의 1호박사라는 꼬리표는 양박사에게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한 듯하다.

“학생이 바로 교수로 발탁된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습니다. 국내박사도 외국에서 학위를 받아온 사람 못지 않게 잘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했습니다. 부담도 됐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 개인적으로서는 좋은 계기였지요.”

양박사의 학위논문제목은 ‘3차원 압출해석’ 이다. 제목이 간단할수록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연구자라면 누구나 아는 법칙이다. 학위 주제가 매우 도전적이어서 더 매력적이었고 보람도 있었다고 양박사는 말한다. 양박사는 과기처장관의 우수연구원상, 기계학회의 백암논문상,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우수논문상을 수상했고, 다수의 논문을 해외와 국내 학술지에 게재하고 있다.

KAIST 설립 당시부터 25년간 지내다 보니 수위아저씨와도 친구처럼 지낸다는 양박사는 살아있는 KAIST의 산증인이라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고. 세월이 흐른 만큼 학생들이나 학교의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요즘 제가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창의적인 여유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시간에 다른 분야의 공부도 하고 다양한 경험도 해서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으면 합니다. KAIST에만 개설된 ‘창의적인 문제해결 방법’이라는 과목도 제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KAIST의 설립으로 우리나라의 대학원 정상화가 10-20년 정도 앞당겨졌다고 평가하는 양박사는 “이제부터의 KAIST는 교육과 연구를 병합해 기술혁신을 선도해 나가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면서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기술과 연구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정책이 자주 바뀌는 것이 안타깝다는 양박사는 단기 과제에만 집착하지 않고 연구목표를 멀리 잡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과학자의 모습이라고 했다.
 

과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창의적인 여유. 열심히 노력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삼성항공 한국전투기사업부장 박찬우 변신의 원동력을 전수받다

박찬우(39) 부장은 좋은 여건 속에서 현장 경험과 학문적 연구를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행운아’ 였다. 그는 79년 항공과에 입학, 석사과정을 마친 후 81년 2월부터 창원에 위치한 삼성항공(당시 삼성정밀) 1공장 제작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제작부는 방위산업품과 기계가공품을 주로 제작했는데, 현장관리 생산관리 생산기술 부서에서 각각 1년씩 근무하면서 현장감각을 익혔다.

84년 생산기술과장으로 승진된 후, 공부를 하다 만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아 KAIST 박사과정에 다시 다녔다. 이때 그는 회사로부터 남다른 배려를 받았다.

“월급 외에도 학비까지 지원받았는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어서 어려움도 많았죠. 85년부터 박사과정을 시작해 87년 말에 과정을 마쳤습니다. 이때 연구한 내용은 수학을 기본으로 한 형상최적설계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현재는 삼성항공에 박사학위 소지자가 수십명이지만 당시는 전무 한분과 그가 전부였다. 책임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회사에 다시 전념, 항공우주연구소와 CAD/CAM실을 거쳐 90년 한국전투기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임무는 기술 분야에 대한 계획 수립과 대미 협상. F-18에서 F-16으로 기종이 변경되는 난관이 있었지만, 결국 F-16 사업에서 전투기 생산을 종합관리할 수 있는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이 일에 공을 들인지 4년만에 이룬 결과였다.

“종합관리 시스템이 구축돼야 하는 이유는 전투기 생산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름대로 쌓은 현장경험이나 경영관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바탕이 됐습니다.”

현재는 F-16 전투기를 제작하는 사업에서 관리자로 변신해 근무하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지난 날은 “매년 중요한 경험을 쌓고 매년 변신을 거듭해 온 과정”이었다.

새로운 일에 겁내지 않고 필요하다고 느낄 때마다 변화할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KAIST 시절에 얻었다. 그는 KAIST가 최고의 교수와 학생, 그리고 최고의 지원 시설을 갖췄다고 자부한다. 공부에도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을 물어보는지 모르는 숙제를 받아들고 숱한 밤을 새우며 보고서를 작성했던 일은, 지식을 쌓는 측면 외에도 무슨 일이든 도전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쌓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정신이 지금도 그의 삶을 지탱시키고 있다.

이충화 대우정보시스템이사 세계로 달리는 탱크맨

이충화(40) 이사의 학창 시절은 유달리 바빴다. 78년 산업공학과에 입학한 후 같은 해 10월 대우그룹에 입사, 학교와 직장을 오가며 생활한 것. 재학시절부터 항상 제조업체 현장에 관심을 가져 주로 공장 근무를 지원했다. 특히 거제도 대우조선의 현장 근무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졸업한 80년부터 대우자동차 경영기획부와 대우조선 경영정보시스템(MIS), 대우기획조정실 등을 거치며 과장으로 승진한 그에게 88년 회사가 지원하는 해외연수 기회가 찾아왔다. 그동안 쌓은 실무경험을 이론과 조화시킬 기회가 온 것이다. 회사에서 얻은 경험은 공부에 많은 도움을 줬으며, 마침내 그는 9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산업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배치받은 곳은 현재 몸담고 있는 대우정보시스템의 컴퓨터통합생산(CIM) 부서. 박사과정에서 전공한 내용을 잘 살린 분야였다.

올해 목표는 대우의 ‘탱크주의’를 자신의 업무와 결합시키는 것이다. “TANK-CIM을 실현시켜 경영혁신을 이룰 계획입니다. 특히 올해의 본격적인 세계화 추진에 맞춰 대우전자가 급속히 성장할 것이므로 ‘세계경영’ 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지원할 것인지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습니다.” 이를 위해 최근의 정보기술을 활용, 강력한 정보시스템 하부구조를 구축할 계획이다.

그는 KAIST 시절에 대해 “남보다 더 좋은 교육환경에서 2년을 공부한 것이 지금 큰 도움이 된다”고 평가한다. 특히 당시의 하드트레이닝 덕분에 미지의 분야에 대해 과감하게 도전하는 자세, 새로운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 방법, 결론을 도출할 때 추구하는 합리성 등을 갖출 수 있었다. 몇년 전 한국능률협회가 수여하는 ‘기술경영대상’ 부문 최우수엔지니어상을 받았을 때도 남다르게 KAIST 졸업생으로서의 긍지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졸업생들이 거친 현장업무보다 연구소나 지원부서 업무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던 점을 아쉬워했다. “특히 80년대 초에는 대학교수직이 상당히 선호돼 KAIST 설립취지인 ‘산업계 발전을 위한 우수 엔지니어 양성’ 과는 괴리감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말에서 미지의 세계 시장을 향해 당장이라도 탱크처럼 밀고 나갈 듯한 저력이 느껴졌다.

과학기술처 원자력조정관 조청원 종합성은 전문성이 바탕

학창시절의 토론이 종종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79년 화학공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과학기술처에 특채된 조청원(42) 정책관이 대표적인 사례다.

“KAIST에서 보낸 2년의 공동 생활이 저에게는 6년 이상으로 느껴지더군요. 우리는 매일 기숙사와 실험실을 오가며 연구와 토론에 열중했습니다. 특히 국내 과학기술의 현황과 방향에 대한 토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토론은 늘 2천년대에 첨단기술력을 갖춘 우리나라의 미래상, 그리고 그때 자신은 어떻게 국가에 기여할 것인가였다. 하지만 당시 과학기술 정책입안자 중 과학기술 전공자가 너무 적어 아쉬웠다. 또한 졸업생에게 관계는 별로 ‘인기’ 가 없었다. 이 현실과 꿈의 괴리는 그가 행정부를 택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처음 배치된 이후 현재까지 그에게 부여된 전공은 원자력이었다. “원자력 분야는 기술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종합적인 지식과 안목을 요구합니다. 다행히 제가 전공한 화학공학은 공장의 전체 공정을 연구하는 학문이었죠. ‘종합성’ 이라는 면에서 원자력 행정에 친근감이 들었습니다. 물론 종합성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83년 공부를 더 할 기회가 찾아왔다. 원자력 분야에 권위 있는 미국 신시니티대에 입학 허가를 받은 것. 국내 정책 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인정돼 연구원 자격과 장학금이 부여됐다.

87년 학위를 받은 후 귀국, 95년 원자력정책관을 맡기까지 가장 인상깊었던 일은 93년 남북간 핵통제공동위원회의 활동이었다. 이때 그는 남북간 원자력 교류 기반을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한반도 비핵화’ 를 위해 어렵게 도출된 합의점이 논의 수준에 머물고 말아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현재 그는 원자력 진흥 종합계획과 국제원자력협력을 추진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과학기술부의 별명이 ‘미래부’ 입니다. 미래 개척에서 과학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는 우리나라도 역사적으로 과학기술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많은 국민이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 미래사회를 적극적으로 대비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KAIST가 과학기술 분야의 지적 파워를 세계적으로 확장시켜 나갈 것을 기대한다.
 

미래세계에 어떻게 '기여' 할 것인가 고민하며 정책분야에 입문했다.


백만기 통상산업부 산업기술기획과장 기술정책은 기술자에게

당시에는 KAIST 석사 졸업생을 사무관급으로 특채했습니다. 경제성장을 위해 전문성을 갖춘 기술공무원이 필요했는데, 그 수가 부족했기 때문이죠.” 백만기(42) 과장은 78년 전기 및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특허청 심사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상공부에서 전자공학 육성업무를 맡고 특허청 전자심사과장, 상공부 정보산업과장 반도체산업과장 산업기술과장을 거쳐 95년 부이사관급으로 승진하기까지 줄곧 정부의 정보산업 분야에 몸담아 왔다.

“반도체산업과장 시절인 92년 미국이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을 덤핑으로 예비판정한 일이 있었죠. 그때 워싱턴에 달려가 불철주야로 협의해 문제를 해결했을 때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최종판정 결과 덤핑이 사실상 취소됐지요.” 국가 이익과 관련된 사안이 터질 때 현장으로 달려가 문제를 수습하는 일에 이런 노력이 숨어 있었다.

국가의 기술정책을 담당하고 있어서인지 그의 말에는 상당한 ‘무게’ 가 느껴졌다. “올해는 기술집약형 중소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할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 연구시설 인력 정보체계 등 기술 하부구조를 종합관리하는 시스템 구축에 힘쓸 것입니다.”

그는 미래의 행정이 과학기술의 뒷받침 없이 불가능할 것이라 전망하며 산업정책의 본질은 바로 기술이라고 단언한다. 기술정책 없이 기존의 수출 촉진정책으로는 더이상 국가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

하지만 과학기술정책의 영역은 행정능력 뿐만 아니라 전문성도 요구한다. 그는 과학기술을 전공한 사람이 행정가로서 성장한다면 과학기술정책이 보다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과학기술자와 일반행정가를 엮어 각 분야의 내용과 상황을 서로에게 이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졸업생 중 5-10% 정도는 관계에 진출하기를 바란다. 비록 현재는 박사에게만 특채 기회가 주어지고 기술고시를 통과해야 진출이 가능하지만 앞으로는 특채 기회를 늘리는 등 여러 제도를 활성화시킬 계획이다.

“하지만 관계를 희망하는 사람도 자신이 기술 자체에만 몰입하는 성격이라면 들어온 후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적성이 잘 맞고 적극적으로 노력한다면 사회에 기여하거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진로를 고민하는 졸업생들에 대한 선배의 충고였다.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천길성 사고의 전환을 제시한 KAIST

천길성(55) 박사의 약력은 다른 KAIST졸업생에 비해 특이하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월남전 참전을 포함한 10여년간을 전방에서 현역군인으로 복무하다 KAIST 2기로 입학했다. 그래서 같이 입학한 동기생에 비해 9살 정도 나이가 많은 형님이었다.

“KAIST에서의 5년간은 제게 사고의 전환을 갖게했습니다. 성격이 판이한 두 학교를 다니다 보니 사고의 폭이 2배로 넓어졌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면서 한방면을 깊이 알기보단 여러방면을 두루 알고자 노력했지요. 그래서 제 전공뿐만 아니라 화학 전자 수학 등을 공부했는데 주로 도강을 했습니다. 그랬던 것이 제가 국방과학연구소의 기술연구 본부장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설립 당시 KAIST의 공부 열기는 대단해서 기숙사 건너편의 친구가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는 것을 보면 자려고 껐던 스탠드를 다시 켜고 졸리는 눈을 비비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천박사는 재료과 박사 1호다. 1호이기 때문에 교수들이 너무 열심히 이것저것 시키는 바람에 힘도 들었지만 어설프게 박사학위를 받지 않았다는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제가 92년에 대령으로 예편하면서 한편으로는 착찹했지만 육사 동기와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군의 역할과 운영체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연구를 하는 것이 우리 군을 돕는데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입니다. 계급이나 직책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연구에는 한계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좀더 공부해서 미래의 기술예측이나 방향제시 같은 것을 하고 싶습니다.”

후배들에게 천박사는 체력을 강조했다. 강인한 정신력과 집중력은 튼튼한 몸에서 나온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이제까지 이뤄논 KAIST의 전통과 자유로운 분위기를 십분 활용한다면 앞으로의 KAIST는 더욱 빛날 것이라고 천박사는 기대했다.

오길록 전자통신연구소 컴퓨터 단장 컴퓨터와 함께 한 30년

오길록(51)박사는 대학을 졸업하고 30여년간을 컴퓨터와 지냈다. 오박사가 대학을 졸업한 후 처음 취직한 곳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전산실이다. KIST의 연구원으로 5년 지낸 뒤 KAIST 1기 입학생을 모집한다기에 전산과를 지원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으므로 우수한 사람들이 많이 몰려 들어 입학시험은 기술고시를 방불케했다.

국산 컴퓨터의 대부분이 오박사의 작품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오박사는 컴퓨터계의 거목이다. “이제까지 해온 일도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고 앞으로 할 일도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지요. 여러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맡겨진 일을 차례차례한 셈입니다.” 오박사의 첫 작품은 80년대 초 국산 8비트 교육용 컴퓨터 개발이다. 소형컴퓨터의 개발은 우리나라에서 PC세상을 연 시발점이 됐다.

87년부터는 국가 전산망을 위한 슈퍼미니급 주전산기를 개발했다. 주전산기의 이름은 타이콤(TICOM). 호랑이 컴퓨터(tiger computer)라는 뜻이다. 타이콤은 현재 시행하고 있는 금융실명제와 토지실명제를 가능케 했다.

현재 오박사는 2백여명으로 구성돼 있는 컴퓨터 연구단의 책임을 맡고 있다. “연구를 하다보면 연구비가 많아야 되고 딸린 식구도 많은데, 아직도 컴퓨터 연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어려움이 많습니다. 한번 개발하면 그만이지 왜 자꾸만 개발하느냐고 해서 곤란한 적이 많습니다.” 연구소 일이외에 오박사가 가장 주력하는 일은 컴퓨터 프로그램 조정위원회로 활동하는 것.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일어나는 프로그램 복제 시비를 중재하는 역할이 바로 조정위원회가 하는 일이다.

“기술의 발전을 못따라 가는 것이 바로 법입니다. 복제시비를 법으로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 길어지다 보면 쌍방 모두 망해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비록 법적 능력은 없지만 양쪽의 이해관계를 조정해, 되도록 모두에게 피해가 적은 쪽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오박사는 과학기술자의 모델을 어린 학생들에게 제시하고자 책을 만들기도 했다. 오박사는 “KAIST 졸업생이나 재학생이 다른 학교에 비해 많은 특혜를 받고 공부한 것은 사실”이라며 “자부심과 엘리트의식에 앞서 사회에 대한 봉사의식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앞으로의 선진기술사회는 기술자의 기술개발로 모두가 잘살게 되는 사회입니다. 과학기술자가 되기 위해서는 머리만 좋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오박사가 예비 과학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훌륭한 과학자가 되기 위한 첫째 조건은 도전을 두려워 하지 않는 호연지기.


한국과학기술대학 출신 첫박사들 채희준·정근창

KAIST의 학사과정으로 흡수된 한국과학기술대학(KIT)이 문을 연지 10년이 지났다. 과기대 1기생들이 이제는 어엿한 사회 일원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고 있다. 과기대출신 1호박사인 채희준(29)박사와 정근창(29)박사를 만났다.

채박사의 학번은 860001이다. 과기대를 수석입학하는 학생에게는 1번이라는 학번을 줬다. 2번은 여학생 수석을 위한 번호였고 3번부터 가나다 순으로 학번을 매겼다.

채박사는 90년 미국으로 건너가 94년에 MIT에서 ‘대수학’ 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유학을 하면서 어려웠던 것은 무엇을 몰라서 당황한 것이 아니다” 라며 “이미 아는 지식을 바탕으로한 창의적 사고를 필요로 할 때였다” 면서 대학과정에서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창의적 사고를 도와줄 수 있는 실험교육과정이 강화되기를 바랬다.

현재 채박사는 KAIST 인공위성센터에서 연구원생활을 하고 있다. 가끔 학생들에게 강의도 하는데 “제가 학교를 다닐 때보다 학생들의 머리가 좋아진 것 같긴 하지만 노력은 덜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여러번 받는다” 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침착하고 내성적인 채박사는 자신을 천재로 바라보는 시각이 부담스러운지 “20대에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이 외국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우리나라의 경우에 병역문제 때문에 어쩔수 없이 30대를 넘겨 박사학위를 받는 것” 이라고 했다.

정박사는 3년 반만에 화학공학과를 조기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으로 유학을 갔다. 94년 ‘고분자 유변학’ 으로 학위를 받은 후 지금은 LG화학기술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있다. KAIST 화공과 학생들에게 정박사는 전설적인 인물로 통한다. 조기졸업에다 조기 박사학위 취득 등 ‘열심히 공부한 선배’ 로 수업시간에 자주 거명이 되다 보니 후배들에게 ‘얼굴은 모르지만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는’ 형편.

“기업연구소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기회가 된다면 가르치는 직업도 갖고 싶다”는 것이 정박사의 희망이다. 과기대가 KAIST학사과정으로 통합된 것에 대해 정박사는 “과기대의 발전을 위해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평가하면서 “과기대라는 학교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졸업생들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채박사와 정박사는 자신들의 능력과는 관계없이 취재대상이 되는 것 같다며 훌륭한 동창들이 많다고 귀뜸을 하기도 했다.

아직도 해외박사를 선호하십니까 박사학위를 얻고자 하는 학생들은 국내에서 할지, 유학을 갈 것인지 고민스러울 것이다. KAIST에서 학위를 준비하는 학생과 유학을 간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이래서 KAIST에 남았다 김희탁

석박사학위 취득을 목표로 하는 KAIST의 학부과정 또는 석사과정의 학생들은 한번쯤 고민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유학을 가야할지 KAIST에 남아야할지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KAIST 진학과 유학 사이에서 고민을 했고 결국 KAIST를 선택해 올해 박사2년 과정을 맞이한다.

KAIST 학부 시절, 유학은 KAIST 진학보다 더 도전적인 그리고 매력적인 선택으로 비춰졌다. 박사라는 호칭과 함께 붙게 될 외국 명문대학의 이름과 주위의 인정을 상상해 보면 외국 명문대 유학은 지금도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게다가 국내에서 공부하기 때문에 관심있는 연구분야의 첨단정보를 얻을 수 없거나 문제해결에 어려움을 느낄 때, KAIST를 선택한 결정이 후회로 이어지곤 한다.

그럼에도 KAIST 박사과정까지 진학하게 된 이유는 유학 못지 않은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이 해외 유명 대학으로의 막연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면 KAIST는 보다 확실한 비전을 제시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KAIST 박사과정에 국비장학생으로 진학하게 되면 현역 군복무에서 면제되므로 안정적으로 학업에 열중할 수 있고, 학위과정시 졸업후 연구하게 될 분야를 어느 정도 예측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KAIST에 진학하게 된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진학 후 수년간 대학원 과정을 지내면서 다른 장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KAIST는 대덕 연구 단지 내의 여러 기업체 연구소와 정부출연연구소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KAIST 내에 여러 연구장비가 잘 구비되어 있는데다 주위의 여러 연구소의 장비를 사용할 수 있어 다양한 연구가 가능했다. KAIST의 연구수준은 미국이나 일본의 유명 대학들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고 일부 분야는 이미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

내가 KAIST 대학원 과정으로 진학할 당시, 유학을 가면 이보다 높은 수준의 연구를 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유학을 갔더라도 현재 나의 논문이 게재된 잡지들에 나의 연구를 발표하고자 했을 것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활발히 나의 연구분야를 넓히는데 KAIST는 부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졸업한 후에도 도움을 받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전통속에 머무를 수 있는 것 또한 큰 장점이라 하겠다.

학위과정을 수행하면서 느끼된 장점 때문인지 유학에 대한 동경은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져 간다. 하지만 해외에서 공부할 기회가 있다면 KAIST와 해외의 유명대학을 직접 비교해 보고 싶다. 내가 보아온 것과 보지 못한 것 사이의 평가는 역시 한쪽으로 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TV에서 연구원들이 등장하는 CF를 보았다. 그들이 등장할 때마다 화면엔 해외 유명 대학의 이름이 찍혀나왔다. 그 광고가 아직까지도 해외 학위를 국내 학위보다 더 인정해주는 현실의 상황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해외 CF에 KAIST가 기술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한다.

KAIST를 세계에 알리고싶다 조성환

내가 유학을 처음 생각한 것은 학부 2학년 가을. 나는 평점이 꽤 좋은 상태여서 과기원 석사과정에 진학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싶었다. 그래서 나의 생활은 매우 불규칙했고 공부는 한 수 접어논 상태였다. 그런 생활을 2학년 내내 하고나니 내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그 때 새로운 목표로 정한것이 유학이었다.

유학 준비과정은 매우 복잡했고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다. 솔직히 유학을 꼭 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KAIST 전자과 수준은 세계 유수의 대학들과 겨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유학은 단지 내 생활을 바로잡고 무엇을 열심히 해보겠다는 수단에 불과했다. 같이 유학준비를 하는 룸메이트가 많은 도움이 됐다. 나말고도 누군가 같이 무엇을 한다는 것은 많은 힘이 된다. 김기응은 나와 서울과학고 동기고 현재 브라운대학 전산과 석사 1년차다.

스탠포드대학과 MIT에서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막상 통지서를 받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MIT나 스탠포드에 가서 잘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들었다. 내 생각에 나보다 뛰어난 학생이 KAIST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을 했다. KAIST 스탠포드 MIT 중에 어디를 갈 것인지. MIT에 첫 발을 내딛으며 처음 느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실망이었다. 물론 나는 겉모양만을 보고 실망한 것이다. 이곳에 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MIT는 꼭 공장같다. 건물도 오래돼 별로 좋지 않고 학교 정경도 그리 좋아 보이지가 않는다. 이런 곳에서 세계의 최첨단 과학이 이뤄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인지 MIT 건물의 낡은 모습이 멋으로 느껴진다.

이곳에서 지낸 한 학기는 KAIST의 생활과 너무 흡사했다. 기숙사에서 도서관으로 또 강의실로 왔다 갔다하는 것, 특히 수업 방식과 형태 등은 KAIST와 매우 비슷했다. 따라서 적응하는데 그리 큰 어려움을 격지 않았다.

요번 학기에는 수업을 2과목 들었는데 한과목이 잡아먹는 시간이 이만 저만 큰것이 아니었다. 특히 중간 중간에 있는 프로젝트가 꽤 힘들었다. 다행히 KAIST에서의 실험과 프로젝트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KAIST의 가장 큰 장점은 24시간 개방되어 있는 도서관 실험실 기숙사다. KAIST에서는 이론뿐만 아니라 실험도 중요시 하는 것인데, 보통 실험이나 프로젝트를 하게 되면 며칠밤을 새는 것은 예사다. 차가 끊겨서 집에 못 가는 걱정이 없고 밤에 학교가 문을 닫아서 실험을 그만해야 하는 경우도 없다. 나는 이번 학기 과목 중 프로젝트와 숙제가 많았던 과목에서 제일 좋은 성적을 거뒀다. KAIST에서 공부, 실험, 프로젝트로 단련돼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한학기를 지내면서 특별히 힘들었던 것은 없었다. 이곳 보스톤에도 한국사람이 많아 지내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다만 이곳에서는 내가 가장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같은 또래의 친구가 없다는 것이 좀 아쉽다. 한국 생각이 많이 나는데, 보통 인터넷을 통해 향수를 달랜다. 인터넷을 통해 신문도 볼수 있고, BBS(사설통신서비스)를 통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직접 볼 수 없는 것이 좀 안타깝지만 그럭저럭 지낼만하다. 한국에서는 당구치는 것을 좋아하고, 매주 나오는 만화책을 자주 봤는데, 그런 것도 많이 그립다. 이제는 그러한 시간들을 연구로 보내야 한다.

내가 KAIST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KAIST가 내 능력을 발휘하기에 부적합해서는 절대 아니다. 실제로 KAIST에는 나보다 뛰어난 선후배 동기들이 많이 있고 교수님들 또한 아주 뛰어나다.

내가 유학을 택한 것은 개인적으로는 더 크게 배워보고 싶은 점도 있었고(학업뿐만이 아닌) 다른 면으로는 KAIST를 알리고 싶었다. 아직 KAIST 학부는 생긴지 10년밖에 되지 않는다. KAIST가 세계적으로 발전하려면 KAIST내에서 이루어내는 연구 성과도 중요하지만, KAIST출신들이 여러 곳으로 나가 이름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KAIST의 밤은 꺼지지가 않는다. 지금도 실험실, 기숙사 도서관에는 불이 켜져 있을 것이다. 나보다 뛰어난 많은 학생이 지금 KAIST에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다. 그들의 노력에 어긋나지 않게 나는 이곳 MIT에서 열심히 지내고 있다.

KAIST 입학

학사과정은 일반전형(40%)과 특별전형(60%)으로 나뉜다. 일반전형 지원자격은 일반고 졸업(예정)자는 성적이 상위 10%이내, 과학고 졸업(예정)자, 과학영재선발위원회가 입학지원자격을 인정한 사람이다.

92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무시험 특별전형인 경우에는 KAIST에 3명이상 입학시킨 실적이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지원할 수 있는데 일반고 졸업예정자인 경우 성적이 상위 3%이내이어야 한다.

KAIST 졸업

95년 4월까지 배출한 졸업생은 학사 6천2백34명, 석사 8천7백1명, 박사 2천3백18명이다. 20대박사는 1천57명으로 박사 취득자의 48%를 차지하고 있다. 학사졸업생은 62%가 진학을 했으며 32%가 산업계로 취업을 했다. 석사졸업생은 32%가 진학을 택했고 산업계로 43%, 연구기관으로는 18%가 진로를 택했다. 박사학위 취득자 진로는 산업계 43%, 연구기관 28%, 교육기관 26%으로 구성됐다.
 

1996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곽수진 기자
  • 김훈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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