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어느 6 · 25 참전군인의 60년 만의 귀향


2000년 시작된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이 올해로 10년째를 맞았다. 지금까지 발굴한 유해는 5월 20일 현재 총 4761구. 이 중 북한군과 중공군 유해를 제외하고 확인된 국군과 유엔군의 유해는 4004구에 이른다. 전사자 유해발굴과 신원감식을 총괄하는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유해발굴단) 박신한 단장(육군 대령)은 “올해에는 1500구 이상의 유해를 발굴할 계획”이라며 “마지막 남은 전사자의 유해까지 가족 품에 돌려보내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말한다. 실제로 유해발굴단은 올해 한국전쟁 60년을 맞아 유해발굴과 신원확인에 부쩍 속도를 올리고 있다. 5월 13일과 14일 강원도 화천군 유해발굴 현장과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유해발굴단 중앙감식소를 잇따라 찾았다.


강원도 서오지리 유해발굴 현장에 가다

춘천에서 차를 타고 5번 국도를 따라 20분쯤 올라가면 화천읍 쪽에서 내려오는 북한강 본류와 지류가 합쳐지는 한적한 마을이 나온다. 행정지명으로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서오지리라고 불리는 이곳은 낚시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 중 하나다. 북한강 일대에 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기 전에는 이곳은 작은 야산에 논밭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한국전쟁 당시만 해도 북한 땅이던 이곳에선 전쟁 초기부터 종전될 때까지 국군과 공산군 사이에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낚시터 뒤로 버티고 서 있는 야트막한 산을 10분 정도 오르니 한국전 당시 국군이 사용하던 참호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짧은 것은 50~60m, 긴 것은 수백m에 이르는 교통호(참호와 참호 사이를 연결하는 호)가 산비탈 곳곳에 나 있다. 군데군데 사람 한두 명이 간신히 들어갔을 정도의 개인호의 흔적도 보였다. 야트막한 산비탈 여기저기에는 구멍이 파헤쳐져 있다.

서오지리 발굴 현장의 책임을 맡고 있는 유해발굴단 발굴3팀 이승원 팀장(육군 상사)은 “한국전쟁 내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서오지리 일대에는 당시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이 대량으로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서오지리 297고지에 대한 발굴은 “아버지가 산에 버려진 전사자들의 유해들을 수습해 이 일대에 묻어줬다”는 한 노인의 제보로 시작됐다. 실제 5월 3일부터 시작된 서오지리 유해발굴에서는 이날 오전까지 모두 10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적군에 밀려 퇴각하면서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해들로 추정된다.

3팀 소속 유해발굴병 성학경 상병이 나뭇가지 모양의 물체 주변에 석회가루를 뿌리고 카메라 셔터를 연방 누른다. 흙이 잔뜩 묻어 있어 얼핏 보면 나뭇가지처럼 보이지만, 진짜 정체는 사람의 넓적다리뼈란다. 뼈가 발견된 호에서 불과 2~3m 떨어진 자리에는 흰 한지가 덮여 있다. 전날 함께 발견된 뼈를 임시로 덮어 놓은 것이다. 산 중턱을 가르는 교통호 일대에서는 넓적다리뼈를 비롯해 정강뼈, 위팔뼈, 발가락뼈들이 잇따라 발견됐다.

얼마 뒤 반대편 고지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골이 발견된 장소와 방향을 카메라에 담던 3팀 대원들이 재빨리 산비탈을 달려간다. 100m 떨어진 곳에서는 발굴 현장에 지원을 나온 27사단 78연대 1대대 병사 20여 명이 구슬땀을 뻘뻘 흘리며 삽으로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4~5시까지 겨우 주먹밥 2개로 끼니를 때우며 쉬지 않고 땅을 파야 하는 고된 일이지만 힘든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현재 유해발굴단은 각각 8명씩 구성된 발굴팀을 8개 운영하고 있다. 전국의 발굴 지역을 모두 관할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땅을 파고 유골을 찾는 작업은 현지에 주둔한 장병들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머리뼈로 유엔군은 식별 가능

유골 한 구를 수습하는 데는 보통 4~5시간을 훌쩍 넘긴다. 노천에 드러난 정강뼈를 살피던 유해발굴단 최고참 발굴병인 정인호 병장이 다시 흰 한지를 덮고 흙을 뿌린다. 땅속에 묻혀 있던 유골이 무방비로 노출되면 성질이 금세 바뀐다. 비에 젖거나 위치를 표시하는 석회가루가 묻으면 DNA샘플을 추출하기 힘들다. 강한 햇빛을 받으면 유골에 있던 칼슘성분이 하얗게 되면서 푸석푸석해지는 백화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게다가 유해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를 맡고 온 산짐승이 유골을 훼손할 수도 있다. 가급적 발견된 날 유골을 서둘러 수습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유해발굴은 문화재 발굴과 유사한 면이 많지만 훨씬 신중하게 이뤄진다. 예를 들어 땅에 묻힌 문화재를 찾는 데 사용하는 ‘탐침’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행여 유골에 손상이 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다. 일단 유골이 발견되면 주변의 흙을 다시 조심스럽게 걷어내야 한다. ‘생토층(한 번도 파헤친 적이 없는 원래 그대로의 땅)’이 나올 때까지 조심스럽게 파낸다. 주변에 유골이 더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유해는 주로 생토층 위에서 발견된다.


생토층까지 파 내려가기 시작한 지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바로 옆에서 정강뼈 하나가 더 나온다. 잠시 뒤 넓적다리뼈와 발가락뼈도 나왔다. 시간이 계속해서 지체됐다. “몇 명이 누워 있는 거냐”는 질문에 이 팀장이 “1명”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유해발굴단 밥 1년만 먹으면 발견된 유골만 보고도 무슨 뼈인지 알아맞힐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몇 명의 유해인지 파악하거나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는 일은 주로 인근에 마련된 임시감식소에서 이뤄진다. 조상이 거의 같은 국군과 북한군, 중공군은 유골 모양만 봐서는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정강뼈나 넓적다리뼈가 여러 개가 발견돼 애를 먹는 경우도 많다.

그나마 유엔군은 쉽게 식별이 가능하다. 체질인류학적으로 머리뼈 모양이나 넓적다리뼈를 보면 황인종인지, 백인종인지, 흑인종인지 차이가 뚜렷하다. 예를 들어 옆에서 볼 때 뒤통수가 볼록하게 길면 백인종, 두개골이 동그랗고 코가 낮으면 황인종에 속한다.

게다가 함께 발견된 유품을 100% 신뢰할 수도 없다. “당시 아군이나 적군이나, 총탄과 보급품이 떨어지면 상대 것을 빼앗아 사용하다 보니 유골과 함께 출토되는 유품만 가지고는 구분할 수 없어요.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보고 분석해야 비로소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국군이 사용하던 탄약을 공산군이 사용하거나, 공산군에게서 노획한 군화를 국군이 신고 다닌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물론 발굴 현장을 오래 누빈 베테랑들은 나름의 구별 방법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비교적 훈련을 잘 받았던 북한군과 중공군은 전투 중에도 동료들을 잘 매장해줬어요. 반듯하게 줄을 맞춰서 흙으로 잘 덮어줬어요. 하지만 전쟁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던 국군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중공군들은 전사한 동료의 머리를 고향 쪽인 북쪽으로 뉘고 가슴에 사기 밥그릇을 올려놓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 지금도 가슴에 사기그릇이 얹혀 있는 중공군 유골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참호가 파여 있는 방향에 따라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탓에 참호를 판 비탈 방향을 보면 아군인지 적군인지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개는 남쪽으로 난 비탈에 파놓은 호는 공산군, 북쪽으로 난 참호는 국군과 유엔군이 파놓은 것으로 보면 된다.
 

유해 발굴과정 보러가기


GPS 동원해 유해발굴 기록 남겨

국토의 70%가 산악지형인 데다 전투가 주로 산에서 벌어진 탓에 발굴은 대부분 높은 산에서 이뤄진다. 발굴 현장까지 매일 1~2시간씩 걸어 올라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매일 유해가 발굴되는 것도 아니다. 보통은 100~120곳을 파야 1곳에서 유해가 발견될까 말까다.

하지만 전국 곳곳에서 발견되는 유해들은 하나하나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있다. 유골들은 긴 교통호에 마구잡이로 뒤엉켜 발견되기도 하고, 동떨어진 개인호에서 홀로 수그린 채, 또는 자궁 속 아기처럼 웅크린 모습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쏟아지는 포탄과 총탄 속에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홀로 외로이 죽어가던 젊은 청년의 모습이 불쑥 떠오른다.

정 병장의 군복 상의가 어느새 흘러내린 땀으로 흠뻑 젖었다. 발굴과정에 필요한 온갖 도구가 들어 있는 검은 조끼가 보기에도 덥고 무거워 보였다. 그는 3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삽과 손을 번갈아 쓰며 유골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수습했다. 교통호 바로 옆에 있던 개인호에서 발견된 이 유골은 머리와 상체는 없고 하체만 발견됐다. 동료들에게 발견되지 못한 채 60년 세월을 홀로 이 버려진 참호 안에서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시려온다.

성 상병의 카메라가 다시 찰칵거리며 한 전사자의 쓸쓸한 죽음을 담는다. 성 상병은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고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으로 유골이 발견된 지역의 위도, 경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발견된 뼈의 부위와 상태를 6페이지 분량의 기록지에 꼼꼼히 기록했다. 이 기록은 훗날 다시 발굴조사를 할 때나 가족을 찾아서 유해가 발견된 상황을 알려줄 때 요긴하게 사용된다.

이날 발견된 유골은 오후 4시가 넘어서야 관에 안치됐다. 성 상병이 정 병장에게서 유골을 두 손으로 건네받는 모습이 사뭇 조심스러워 보인다. 성 상병은 유골은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한지로 감싸 오동나무로 된 소관(小棺)에 입관했다. 행여나 분실될 염려가 있는 발가락뼈는 비닐포장에 넣었다. 한지에 쌓은 유골 위로 빈 명정(銘旌)이 처연히 덮인다. 죽은 이의 이름과 계급을 알길이 없기에 텅 비어 있다.

이윽고 소관 위로 흰 태극기가 덮였다. 매일처럼 보는 광경인데도 이 모습을 지켜보는 유해발굴단 관계자나 지원 나온 장병들은 말이 없다. 잠시 뒤 유골이 발견된 개인호에 작고 소박한 제상이 마련됐다. 병사들이 2열 횡대로 자리를 잡고 대위의 구령에 맞춰 일동 경례를 했다.

간단한 제사를 마치자 소관은 운구병에 의해 산 아래로 옮겨졌다. 수습된 유골은 해당 지역 발굴이 끝날 때까지 임시봉안소에 보관되다가 춘천에 마련한 임시감식소를 거쳐 중앙감식소로 옮겨지게 된다.

이날 수습된 유골이 발견된 반대편 산비탈에서 발견된 교통호에서도 한국전 당시 유골이 거의 지면에 노출된 상태로 발견됐다. 성 상병을 따라 산비탈을 내려가니 긴 교통호 흔적 위로 희끗희끗 유골을 덮은 한지가 보인다. 처참했던 전투의 아픔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 땅 위에 살짝 깔려있는 부엽토(나뭇잎이 썩어서 생긴 흙)를 조심스레 치웠더니 금세 유골 여러 개가 모습을 드러낸다.

유해마다 11자리 임시군번 부여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2000년 한국전쟁 5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시작됐다. 첫 사업으로 경북 칠곡군 다부동 328고지에서 국군 유해가 처음 발견된 뒤 갈수록 많은 유해들이 발굴되면서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후 2007년 1월 국방부 산하에 전문조직인 유해발굴단이 창설됐고 전문인력과 관련 장비가 보강되면서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가속도가 붙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공산군이 한 치 양보 없이 밀고 밀리던 낙동강 전선이 있는 경북과 중공군 개입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경기 가평과 강원도 철원, 화천 일대에서는 아직도 유해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세계적으로 전문부대를 창설해 실종된 군인유해를 찾는 일을 벌이는 나라는 미국과 한국, 단 두 나라뿐이다. 미국은 2003년 국방부 내 나뉘어 있던 유해발굴 업무를 합쳐 미국 전쟁포로실종자확인사령부(JPAC)를 발족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월남전처럼 미군이 개입한 주요 전쟁에 참전했다 실종된 미군 실종자들의 유해를 찾아 나서고 있다. 박사급 전문인원만 40명에 이른다.

국방부 유해발굴단은 석·박사급 전문인력 7명을 포함해 발굴을 담당하는 8개 팀과 조사를 전담하는 3개 조사반으로 구성된 약 170명으로 이뤄진다. 해마다 전국 사학과나 고고미술사학과 출신자들 가운데 유해발굴병과 감식병을 나눠 뽑고 있다.

이튿날 오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유해발굴단 중앙감식소에서는 때마침 춘천 일대에서 발굴된 유골에 대한 정밀 감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현지 임시감식소에서 아군으로 분류돼 넘어온 유골들이다. 전사자 유골의 신원 확인은 중앙감식소가 맡는다. 매주 전국 각지에서 발굴된 전사자 유해 70~80구가 이곳에 모인다. 사상 처음으로 1년에 1137구를 발굴한 지난해는 1주일에 많게는 100구씩 들어오기도 했다.

13070040008, 13090020231, 1310040023…. 중앙감식소로 옮겨진 유해에는 계급과 이름, 군번 대신 11자리의 일련번호와 바코드가 붙는다. 신원이 확인될 때까지 전사자에게 부여되는 ‘임시군번’인 셈이다. 2000년 유해발굴이 처음 시작된 뒤 지금까지 86명의 신원이 밝혀졌지만 대다수 유해는 자신의 이름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20개의 감식테이블에 놓인 직사각형 모양의 쟁반에는 세척을 마친 유골들이 놓여 있었다. 머리뼈와 어깨뼈, 넓적다리뼈 등 전신의 뼈가 90% 이상 남은 ‘완전유골’부터 몇 명의 것인지 모를 만큼 넓적다리뼈만 수북이 쌓인 경우도 있었다. 매일 감식관들은 뼈 부위별로 굵기나 길이를 재고 치과 치료 흔적이나 뼈가 부러진 흔적처럼 특정인에게만 나타나는 인적 특징을 빠짐없이 기록한다. 여기에는 두개골 사진을 360°방향에서 찍는 입체(3D)스캐너와 턱에 붙은 치아구조를 파노라마 사진으로 찍는 첨단 스캐너가 동원되기도 한다. 2명의 여성 감식관 중 한 명인 임나혁 감식관은 “유해 한 구당 최소 100가지가 넘는 특징을 기록한다”며 “이들 정보는 훗날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유가족들의 증언을 참조할 때 귀중한 근거로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유해발굴단은 지금까지 이 중 56구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발굴된 유해에 비해 신원 확인이 된 사례가 턱없이 적은 셈이다.

유골이나 함께 발견된 탄약이나 군화, 군복 등 유물만으로는 신원 확인이 완벽히 되지 않는다. 대부분 군번이 적힌 인식표를 받지 못하거나 적에게 잡혔을 때 신원노출을 우려해 받은 인식표를 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로 유골과 인식표가 함께 발견된 경우는 20명이 채 안 된다. 이 때문에 신원 확인하기 위해 법의학과 법치의학, 체질인류학 같은 기초과학이 총동원되고 있다. 하지만 60년 전 유골로 신원을 단번에 확인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없다.

유해발굴단이 유가족의 혈액 채혈과 DNA샘플 검사에 기대를 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유해발굴단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전사자 유해의 유전자 자료를 보관하고 있으며, 유가족들이 채혈 등을 통해 유전자 샘플을 등록하면 양쪽 DNA염기서열을 비교해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실제로 유골 가운데 넓적다리뼈나 종아리뼈, 위팔뼈에서 DNA샘플을 채취하면 95~100% 가까이 신원을 알아낼 수 있다. 신원 확인의 성공 확률을 높이려면 뼈가 굵고 클수록 좋다. 뼈 안에 단백질이 많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발가락뼈나 손가락뼈에서도 DNA샘플 채취가 가능하지만 지금 기술로는 성공률이 40%에 머문다.

올해 2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고(故) 양 일병의 경우는 운이 좋은 경우다. 양 일병의 유골도 다른 전사자 유해와 함께 DNA샘플을 채취했지만 한동안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던 지난해 2월 대구시 달성군에 사는 딸 양순희 씨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혈액을 뽑아 유전자 샘플을 등록했는데, 그 뒤 검사에서 유전자가 서로 일치한 것으로 판명나면서 신원이 확인됐다.

2000년부터 작년까지 발굴된 국군 전사자 중에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56명인데, 이 가운데 DNA를 비교해 신원을 확인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DNA검사, 슈퍼임포징 등 첨단 기법 활용DNA 비교 검사는 전사자의 8촌 이내 가족이면 유골의 신원을 충분히 밝힐 수 있다. 예를 들어 양 씨처럼 전사자의 딸일 경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반반씩 물려받는 상염색체(A-STR) 검사를 하면 부녀 관계인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모계혈통으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DNA (mtDNA) 검사는 전사자의 어머니와 남녀 형제, 외삼촌, 이모, 이모의 딸 등 모계혈통이면 참여가 가능하다.

또 사람의 성을 결정하는 X, Y염색체 가운데 Y염색체는 부계혈통으로 대를 이어 유전된다. Y염색체에서 반복되는 짧은 염기서열을 확인하면 남자 조상이 같은 집안의 혈연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전사자의 아버지나 남형제, 아들, 친손자나 3~4촌 남성일 경우 성염색체(Y-STR)검사를 하면 신원 확인을 할 수 있다. 지난해 가족 품으로 돌아간 고(故) 김재홍 일병은 남동생, 고(故) 강태수 일병은 아들의 혈액을 통해 신원이 확인된 사례다. 강 일병의 경우 자녀에게 유전되는 상염색체 검사도 함께 진행됐다.

유가족의 채혈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국방부도 발굴 초기부터 유가족 채혈행사를 열며 지금까지 약 1만 명의 DNA 자료를 확보해두고 있다. 하지만 유해에서 채취한 DNA와 유가족의 DNA가 일치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다. 그만큼 유가족의 DNA 확보가 관건인 셈이다. 양 일병과 함께 발견된 나머지 35명도 32연대 소속 장병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유가족의 DNA샘플 가운데 일치하는 DNA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 DNA 검사는 최종적으로 신원을 확인하는 절차로 사용되고 있다. 2006년 강원도 홍천에서 발굴된 고 장복동 일병의 경우 유품에서 발견된 결정적 단서로 가족을 찾았다. 7명의 전문 감식관 가운데 유일하게 유품 감식을 담당하는 박재홍 감식관은 “장 일병의 유해가 발굴된 현장에서 함께 발견된 수통에서 ‘장복동’이란 이름이 발견돼 가족을 수소문할 수 있었다”며 “인적 사항을 확인하는 단서를 제공하는 특이유품은 특수처리한 뒤 유해와 별도로 보관된다”고 말했다.

유해발굴단 김종성 중령은 “유가족의 채혈을 마냥 기다리면서 DNA 검사에 전적으로만 의존할 수는 없다”며 “전투기록, 발견현장의 상황, 유골의 신체적 특징, 함께 발견된 유품을 근거로 대상을 좁히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유가족이 제공한 전사자의 사진과 3D스캐너로 촬영한 두개골 이미지를 합성해 신원을 추정하는 ‘슈퍼임포징’ 첨단기법도 활용되고 있다.

국방부는 아직도 13만 명에 가까운 국군 전사자의 유해가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6만 명은 비무장지대(DMZ)나 북한 지역에 남아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전사자도 8000명 이상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여기에 북한군과 중공군, 민간인 전쟁 피해자를 포함하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아직은 인력과 재정이 충분하지 못하다 보니 민간인 피해자 발굴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유해발굴단은 올해 전국의 55개 발굴현장에서 1500구 이상의 유해를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처럼 발굴에 속도를 내고 있는 이유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흐르면서 채혈에 동참할 전사자의 유가족이나 유해 매장 지역을 알려줄 제보자들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전사자의 부모는 물론, 아내는 이제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전사자의 자녀들 역시 60~70세 이상의 고령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국토 개발이 진행되면서 유해가 매장된 지역 가운데 상당수가 훼손될 가능성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유해발굴단 공보장교인 유영승 소령은 “부모나 형제, 자녀들은 몰라도 3~4촌만 넘어가도 유해를 찾는데 별 관심이 없다”며 “전쟁을 겪은 세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더 많은 DNA샘플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해발굴단은 유가족 채혈에 더 속도를 올리고 있다. 그간 18곳의 군병원에서만 해오던 유가족 채혈을 지난해부터 전국 253개 보건소에서 실시하며 DNA샘플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유해발굴단 관계자들은 올해 유가족 모임이나 현충일에 유가족 채혈행사를 기획하고는 있다. 하지만 천안함 사고와 월드컵, 지방선거 등 굵직한 사회 이슈에 묻혀 홍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 보였다.

중앙감식소를 나서면서 다시 한 번 유해세척실을 들렀다. 방금 막 춘천에서 들어온 유해 10여 구가 세척을 마친 상태로 감식테이블에 올려져 있다. 바코드 아래로 ‘13100030015’, ‘13100040069’ ‘13100040071’라는 일련번호가 보인다. 60년 전 혈혈단신으로 집을 나선 ‘13OOOOOOOOO’의 병사는 과연 언제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도 국립현충원에는 이들처럼 11자리의 ‘임시 인식표’를 받은 이름 없는 국군 전사자의 유해 약 3900구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며 잠들어 있다.
 
“기초과학 튼튼해야 유해발굴 성과 높아”

“0.01% 가능성만 있어도 끝까지 도전합니다. 최후 실종자 한 사람까지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저희의 임무입니다.”

5월 14일 오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이하 유해발굴단)에서 만난 박신한 단장(육군 대령)은 10년째 맞은 유해발굴사업의 철학을 이 같이 설명했다. 그는 2007년 유해발굴단이 창설되기도 전인 2005년부터 유해 발굴·감식사업을 지휘해 왔다.

“처음 유해발굴에 뛰어들었을 때만 해도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발굴 방법부터 유골을 다루는 방법까지 하나하나 배워야 했습니다. 지금은 역사와 규모가 우리보다 앞선 미국 합동전쟁포로실종자확인사령부(JPAC)와 어깨를 견줄 만큼 발굴과 감식기술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박 단장은 좀 더 많은 전사자 유해가 가족 품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료 축적’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한다. “20세기 초부터 개인의 의료 기록과 치과 기록을 보유한 미국과 달리 우리는 유해만으로 신원을 밝힐 수 있는 근거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최근 만들고 있는, 전사자 유해와 유가족의 DNA샘플의 데이터베이스가 거의 전부입니다. 신원 확인은 자료와의 싸움과도 같습니다.”

이어 그는 “해외에 비해 국내에는 유해 발굴과 감식에 꼭 필요한 법의학과 체질인류학을 전공한 기초과학자들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우리 시대의 진정한 실사구시(實事求是)는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라고 강조했다. 박 단장은 마지막으로 “전사자 유해를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과거로 돌아가는 활동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일”이라며 “다시는 6·25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항상 모두가 상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10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화천= 박근태 기자

🎓️ 진로 추천

  • 역사·고고학
  • 문화인류학
  • 군사·국방·안보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