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명문대는 그렇게 불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MIT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적 수준의 공과대학이라고 알려진 MIT에서는 엘리트 공학자 한명보다는 잘 검증된 다량다량의 공학도를 키우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다.
MIT의 ‘고급유체역학’ (advanced fluid mechanics)과 ‘생의학신호·영상처리’(biomedical signal and image processing) 과목은 서로 너무나 다른 차이점을 갖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고급’(advanced)이지만 많은 학문적 배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전통적 기계공학 과목인데 반해, 후자는 기초과목이지만 많은 학문적 배경을 요구하는 새로운 분야다. 하지만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 두 과목은 MIT에서 대표적 명강의로 손꼽힌다.
매년 업데이트되는 그들만의 교과서
이 두 강의는 명강의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몇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두 과목 모두 교과서, 즉 텍스트북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참고서적을 읽어보라고 추천하지만, 반드시 구입해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수업의 대부분은 강의 시간에 칠판에 판서 하는 내용과 매 수업 시간마다 나눠주는 핸드 아웃(수업 보충교재)을 통해 진행된다. 이같은 방식을 통해 일반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좀더 체계적이고 심도있게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수업을 준비하는 담당 교수의 자신감의 표현이다. 이는 핸드 아웃의 표지에 명시돼 있는 저작권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거의 모든 핸드 아웃 표지에 적혀있는 저작권에는 저작권자와 저작 년도가 명시돼 있다. 저작권자에는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뿐 아니라 생소한 사람의 이름도 함께 나와 있다. 이 중 어떤 이름은 벌써 MIT에서 은퇴한 노교수들이다.
한편 저작년도를 통해서는 핸드 아웃의 내용들이 꾸준히 새롭게 고쳐져 완성도가 높아져 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내용 이 매년 업데이트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즉 이 핸드 아웃은 그 동안 MIT에서 이 두 과목을 가르친 여러 교수에 의해 수십년 간 차츰 보완되고 다듬어져 온 것이다. 여러 교수들의 노련한 교육경험이 핸드아웃에 농축돼 있는 것이다. 일반 교과서로서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높은 경지다.
두번째 공통점은 학기 중에 절대 휴강이 없다는 사실이다. 학기 초에 배포되는 강의계획서에는 매 시간 어떤 내용을 다룰 것인지가 매우 자세히 설명돼 있다. 따라서 한시간이라도 수업을 진행하지 않는 다면 수업의 전체 계획에 차질을 가져오기 때문에 휴강은 생각할 수도 없다. 사실 이 점은 비단 이 두 과목뿐 아니라 해외 명문대학의 거의 모든 강의에 해당하는 특징이다. 하지만 이 두 과목은 그들의‘프로 정신’이 좀더 철저히 투영돼 있다. 담당교수의 부득이한 학회 참석이나 연구 발표는 학기 시작 전에 모든 스케줄을 조정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치러지는 주에 이뤄지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수업의 진도는 강의계획서에 적힌 그대로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진행된다. 수강생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셈이다.
이런 모습은 수업은 담당교수 혼자 진행하는 것이라는‘한국적 사고’와는 대비되는 것으로 명강의를 이루는 기초적 항목 중 하나일 것이다.
정답없는 문제, 풀이 과정 유추해야
‘어떤 한 종류의 도마뱀은 물위를 뛰어다니는데, 어떻게 이 도마뱀이 물위를 뛰어다닐 수 있는지 유체역학의 관점에서 설명하라’.몇해 전 유체역학의 논문제출 자격시험(qualifyingexam)의 구두시험에 출제된 문제다. 논문제출 자격시험을 준비하던 필자는 이 문제를 처음 접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마뱀의 질량과 발바닥의 크기, 그리고 물의 밀도와 표면장력계수 등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필자는 문제 해결에 필요한 조건(여러가지 값들과 가정들)이 주어지고 이 값을 배운 공식에 적용하는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터라, 아무 조건과 값이 주어지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문제의 출제 의도는 정확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문제의 답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교수가 학생에게 원한 것은 문제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방법이었다. 즉 주어진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 문제를 분석하기 위해 어떤 가정들이 필요하고, 이 가정들이 왜 적절한지에 대해 해석하는 능력을 테스트한 것이다.
고급유체역학 수업은 이처럼 주어진 문제에 대한 접근 방법을 훈련받는 시간이다. 수업시간에 기본적인 이론을 배우는 점은 여타 다른 강의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수업시간 또는 보충수업 시간에 다루는 예제문제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다루는 대부분의 문제는 실제 현상이다. 이 실제 현상에 수학적 모델을 적용해 유체의 흐름과 온도, 유량 등을 알아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실제 현상과 수학적 모델을 어떻게 연결하느냐 하는 점이다. 실제 현상에서 중요한 변수를 발견하고, 중요치 않은 현상은 적절한 가정을 통해 무시하며 허용되는 오차 내에서 문제를 가장 간단하게 만들어 유체의 현상을 기술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단련하는 것이다.
고급유체역학 수업은 본 강의 시간 외에‘보충수업’으로 번역될 수 밖에 없는‘레시테이션’(recitation)이라는 시간이 별도로 존재 한다. 얼핏 생각하면 고등학교 시절의 보충수업 시간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학기 초에 2백여개 이상의 문제로 구성된 노트를 나눠주고, 레시테이션 시간 전에 꼭 풀어봐야 할 문제들을 추천해 준다. 본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와는 다른 교수가 이 시간에 질문과 대답 방식으로 주어진 문제를 푸는 시간이다. 하지만 교수가 일방적으로 수강생 앞에서 문제 풀이 방식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수강생과 대화를 통해 문제에 적합한 모델링을 찾고 이 모델링에 들어갈 가능한 모든 요소를 나열한다. 수강생은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좀더 나은 해결방식을 제안하고 다른 수강생과의 집단 토론을 통해 문제 해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을 찾아나간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수강생은 자신이 배운 지식들을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몸소 익히게 된다.
수업 내용은 실전에서 큰 무기
고급유체역학의 이같은 수업 방식은 대학 교육, 특히 국내의 공학교육에 대한 몇가지 선입관을 지울 수 있게 한다. 첫번째의 선입관은‘학교 수업을 통해 배운 내용은 졸업 후 실전에 도움이 안된다’는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국내 공학계의‘정설’로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고급유체역학에서는 강의 시간을 통해 실제 문제와 이론을 접목시키는 방법을 끊임없이 훈련하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이 곧 실전에서 큰 무기가 된다.
두번째 고정관념은‘주어진 문제를 공식에 대입해 잘 풀면 좋은 학점을 받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고급유체역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 강의에서는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문제를 풀기 위한 분석능력의 배양만이 좋은 학점을 보장한다.
궁극적으로 고급유체역학이 수강생에게 바라는 점은 공학도로서의‘직관’이다. 공학은 어느 학문보다 실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따라서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좀더 편리한 해결 방식을 추구해야만 한다. 강의 시간에 배운 이론만 갖고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다. 새로운 공식과 이론은 이상화된 문제 해결에는 더없이 편리하지만, 현실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여기에 공학적 직관의 중요성이 있다. 어떤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방식으로 풀 것인가에 대한 해결책은 공학적 직관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고급유체역학 강의는 이 직관을 수강생들이 빨리 찾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단련의 기회를 제공하는 장이다.
현장의 느낌을 그대로 살려라
한편 생의학 신호·영상 처리는 고급유체역학과는 매우 다른 수업방식을 택한다. 후자가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가에 대한 공학적 직관이 중심이라면, 이 수업은 잘 정의된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풀어가는가 하는 공학적 응용이 중심 내용이다. 생의학 신호·영상 처리 수업은 MIT 내의 HST(HealthSciences and Technology)라는 학제간 프로그램과 전자공학과가 함께 운영하는 수업으로 한국에서는‘의용공학’으로 알려진 수업이다. 즉 공학적 방법을 이용해 의학분야를 연구하는데 도움을 주는 방법 또는 장비들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다. 그러므로 공학뿐 아니라 다양한 의학분야에 대한 지식도 함께 필요하다.
생의학 신호·영상 처리 수업은 크게 강의(lecture)와 실험(laboratory)으로 구분된다. 강의 시간에는‘그들만의 교과서’를통해의 용공학의 신호처리와 관련된 기본적인 내용들을 배운다. 더불어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해 의용공학에 필요한 기본적 의학내용을 배운다. 즉 의용공학의 기본적 문제 해결 방법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배우고, 나아가 수강생이 바로 연구를 시작할 수 있는 학문적 배경에 대한 지식을 쌓아주며 동시에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준다.
실험 시간은 주어진 프로젝트(한 학기당 5개)를 조교의 도움을 받아 컴퓨터를 이용해 직접 구현해보는 시간이다. 프로젝트의 내용은 심전도로부터 부정맥 진단, MRI(자기공명영상법), CT(컴퓨터 단층촬영) 등 의용공학에 주로 쓰이는 공학적 모델링이다.
‘생의학 신호·영상 처리’강의도 여느 일반 강의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첫째로 강의는 한사람이 맡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훌륭한 교수라도 하나의 학문분야에 대해 완전히 정통할 수는 없다. 특히 의용공학은 공학 뿐 아니라 의학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포함 하고 있으므로 더욱이 한명의 교수가 맡을 수 없다. 따라서 일반적 공학관련 수업 과정과는 다르게 많은 강사를 초빙한다. 반 이상의 수업시간이 초청 강사에 의해 준비된다. 학문의 특성에 따라 수업 방식에 대한 유연성을 보여주는 수업이다.
둘째로 강의는 다양한 실습을 통해 철저히 응용 위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대학에서 강의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할 부분은 학문적 부분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추상적 개념만을 열심히 가르치며 그 결과 실제 응용에 대한 감각은 전혀 기르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 구현의 경험 없이 제품을 개발한다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탁상공론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의학 신호·영상 처리 강의는 정형화된 틀을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수업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과 공학의 확연한 차이
고급유체역학과 생의학 신호·영상 처리 강의는 서로 다른 접근방법으로부터 수업이 진행되지만, 결론적으로 명강의가 갖추고 있어야할 조건들을 모두 지니고 있다.
잘 짜여진 수업준비와 실력을 갖춘 진정한‘프로’교수, 그리고 단순한 지식전달이 아닌 실전에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의 배양 등 진정한‘명강의’에 필요한 요소는 모두 갖추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공학의 진정한 의미를 바탕으로 공학도로서 갖춰야 할 자질들을 수업을 통해 교육한다는 점이다.
공학과 거리가 먼 일반인들 또는 공학자들도 가끔 과학과 공학을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분명 두 학문에는 확연한 차이점이 존재하다. 과학의 현상을 발견하고 이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 현상을 잘 설명하고 이런 현상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학문 이라고 한다면, 공학은 과학으로부터 발견된 현상을 이용해 실제 생활에 응용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과학적 사실들을 이해하고 배웠다 하더라도 실제 생활에 응용하지 못한다면, 공학적 측면에서는 무의미한 것이다. 실제 현상은 복잡하게 얽힌 상호관계에 의해 이뤄진다. 따라서 공학자라면 단순화돼 설명되는 과학 이론으로부터 간단하지만 실제 현상을 가장 가깝게 설명할 수 있는 공학적 모델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두 강의는 과학과 공학의 차이점에 대해 확연히 인식을 하고 이 인식을 통해 공학의 의미에 확실히 중점을 두고 구성된수업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같은 목표를 가진 두 과목은 어떤 미세한 차이점을 갖고 있을까. 이 차이점은 다음의 간단한 예로써 구분될 수 있다. 사과를 문제에 비유하고 과도는 문제를 풀 수 있는 이론적 지식으로 생각하자. 사과는 손님에게 접대하는 과일의 재료, 샐러드에 들어가는 재료, 또는 요리를 장식하는 재료 등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될 수있다.
물론 다양한 용도에 맞게 사과를 이용하기 위해서 과도는 필수적인 도구이며 용도에 따라 다른 종류의 과도들이 사용된다. 하지만 이다양한 종류의 과도들로 사과를 어떻게 자르냐에 따라 각각의 용도에 맞는 재료로 변신하게 된다. 고급유체역학이 사과를 이용해 무엇을 만들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공학적 직관(아이디어)을 찾는 과정 이라면, 생의학 신호·영상 처리는 정해진 용도를 위해 과도의 선택과 사용방법을 제공해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트보다는 도전정신을
훌륭한 강의는 강의하는 사람의 뛰어난 능력으로 수강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 강의로 정의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명강의는 교수 개인의 탁월한 능력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까지 소개한 MIT의 두 강의로부터 제시될 수 있다.
이 두 강의는 모두 강의하는 교수의 특별한 교육비법으로 명성이 이뤄진 것이 아니다. MIT는 소수의 엘리트보다는 모든 학생을 질 좋은 공학도(qualified engineer)로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질 좋은 공학도는 잘 준비된 교육과정과 잘 정의된 연구과제 수행능력의 훈련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즉 명강의는 교수 한사람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교수를 통해 이뤄진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MIT에서 들었던 적이 있다. “MIT가 명문 대학으로 꼽힐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실현가능성이 적은 10개의 연구과제 중 9개가 실패하더라도, 남은 1개가 세계를 놀라게 하는 연구 결과이면 된다.”
명문대가 되기 위해 모든 학생이 다 엘리트임을 바라고, 모든 연구가 다 최고임을 지향하는 우리의 천편 일률적인 학풍으로서는 이런 MIT의 학풍을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도전정신이 MIT를 명문대로 만들고 많은 명강의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또다른 원동력 중의 하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