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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의 시절의 일화다. 주임교수는 굉장히 무서운 분이었다. 정신과 의국에 전설 같은 실화가 수없이 전해 내려올 정도였다. 선배들로부터 그런 얘기를 듣다 보니 수련의 생활은 공포와 함께 시작됐다. 그분 앞에만 서면 왜 그리 작아지던지. 압도적인 카리스마 앞에 몸을 덜덜 떨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련의 과정을 끝내고 다른 병원에 근무할 때도 어쩌다 그분 전화를 받으면 온몸이 긴장되고 전화기를 잡은 손이 떨리곤 했다.
머리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전문의인데 아직도 뭘 두려워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몸이 먼저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어쩌랴. 내 몸이 이미 그 공포를 기억하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간 마음은 뇌의 영역이므로 뇌에서만 생각하고 느낀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몸 전체가 생각하고 느낀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뇌에서 생각하고 느낀 것들이 우리 몸에 퍼져 있는 신경계를 타고 몸 전체에 전달된다는 뜻이다. 뇌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억제해도 몸에 기억된 생각과 감정까지 억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생각과 감정이 더 깊숙이 저장된 것이 몸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이 먼저 무의식을 알아차린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실제로 몸 여기저기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이상이 없다며 정신과로 가보라고 할 때가 있다. 이처럼 몸에 기질적인 병변(病變)은 없지만 마음의 문제로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않은 현상을 흔히 ‘신경성’이라고 한다. 신경성이 좀 더 심각한 형태로 발전하면 신체형장애 가 된다. 마음의 문제가 오로지 몸으로만 나타나는 증상이다. 우리가 흔히 신경성이라고 하는 신체화장애, 전환장애 , 의학적으로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통증장애 그리고 지나치게 병에 대해 걱정하는 건강염려증이 여기에 속한다.
신체형장애
신체화장애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심리적 요인이나 갈등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판단되는 장애다. 신체화장애는 신체형장애의 일부분이다.
전환장애
몸의 기능이 마비되거나 장애를 일으키는 증상. 원인은 심리적 요인인 경우가 많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가장 뛰어난 업적 중 하나는 신체장애가 심리적 원인으로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그는 심리적 원인으로 눈이 멀거나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실제로 그런 증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계속 목에 뭐가 걸려 있는 것 같다고 호소하는 ‘히스테리성 이물감’도 대표적인 신체형장애의 하나다.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화병(火炳)도 광범위하게 보면 신체형장애로 볼 수 있다. 화병은 서양의학에서 말하는 불안이나 우울증과 다르다. 화병이란 이름 자체가 의미하듯이 몸에 불덩이가 돌아다니는 것 같이 더워서 견딜 수가 없고 불방망이가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것 같이, 주로 불과 관련된 증상을 호소한다.

역시 해결되지 못한 여러 가지 심리적 억울함, 분노, 피해의식이 몸으로 나타난 결과다. 우리말에는 마음의 문제가 몸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표현하는 어휘가 매우 풍부하다. ‘애간장이 녹는다’, ‘속이 터질 것 같다’, ‘애가 끊어진다’ 등등. 우리 선조들이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 선견지명이 있었던 결과가 아닌가 싶다.

몸과 마음의 조화가 필요해

임상에서 보면 여성에게는 주로 자신의 힘든 감정을 몸으로 나타내는 신체화장애나 전환장애가 많다. 반면 남성은 주로 건강염려증으로 나타난다. 특히 남성들이 자신감 상실에 따른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려고 몸에 좋다는 것에 물불 안 가리는 것도 은폐된 신체화장애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남녀에 따라 표현하는 양상이 다를 뿐, 신체형장애는 남녀 모두에게서 비슷하게 나타난다.

몸은 자신에 대해 미처 알지 못하는 것들을 말해준다. 몸 곳곳에 분포하는 수용체가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을 받아들이고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의 신호를 잘 받아들이면 오히려 자기 마음 어딘가에 문제가 생겼는지 알 수 있다. 이를 무시하거나 아예 감정 자체를 억압하면 고속도로가 정체되는 것처럼 몸과 마음의 단절이 일어나 결국엔 신체형장애라는 심각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잘 받아들이는 것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아닌가 싶다.

바쁜 현대인들은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한다. 위에서는 그만 먹으라고 하는데 계속 먹어 탈이 나고, 몸은 잠을 자라고 하는데 계속 일하다가 잠을 못 자 탈이 나기도 한다. 지나치게 몸에 민감해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몸을 무시해도 문제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발전시키려면 마음과 몸 모두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흔한 예로 어릴 적 학교에 가기 싫으면 배가 아프지 않았는가. 그때 꾀병이라고 야단치는 엄마보다는 ‘네가 힘들구나’하고 다독여주는 엄마가 훨씬 더 고맙지 않던가. 그런 것처럼 자기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주는 신호를 잘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몸은 스스로 치유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다 분비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몸 안에 있는 엔돌핀이다. 엔돌핀만 잘 활용해도 기분 좋게 살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고 밖에서 구하려다 보니 약물중독이나 알코올중독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몸이 보내는 신호를 제때 알아차리고 적절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몸의 문제뿐 아니라 마음의 문제까지도 치유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몸과 마음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잠재능력을 발휘해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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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양창순 양창순신경정신과 원장, 대인관계 연구소 소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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