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기초기술에 첨단기술을 접합시켜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이러한 전략으로 유럽은 기울어져가는 구대륙의 자존심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
유럽의 과학기술에 대해 논하는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과학기술은 이제 퇴보했다"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유럽의 과학기술은 퇴보한 것처럼 보인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지도 모른다.
사실상 최근 반도체와 신소재 등 세계 첨단과학기술 경쟁은 미·일간의 경쟁으로 압축되고 있으며, 이 분야에 있어 미국은 기초기술이 뛰어나고 일본은 응용기술에서 월등하다는 것이 일반인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그러나 세계의 3대 선진경제권인 미국 일본 유럽의 전반적인 과학기술 수준을 비교해 볼 때, 유럽의 저력은 전통과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대변되는 특정기술의 전문화와 세분화에 있으며 특정 몇가지 분야의 과학기술에있어 유럽은 결코 미·일에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화학업계 세계 제1위인 독일의 BASF사는 최근 수십년간 특정분야의 기술개발정책을 펴온 결과 공업용 화학제품, 플라스틱, 염료, 도료 등의 분야에서 7천여종의 비교우위가 있는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이밖에 항공우주분야의 로켓발사기술, 고속전철의 선로설치기술, 원자력발전소의 핵폐기물 처리기술, 의학분야의 면역진단 시약, 입자물리학, 해양탐사기술, 환경오염 처리기술 등 특정기술에 있어서는 미·일을 압도하고 있는 분야가 많다.
화학공업 산업기계 원자력에서 우위
일반적으로 기술 수준을 수치로 나타내는 계량화 작업은 힘든 일이고 또한 오차가 많이 발생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유럽의 경쟁자인 미국 일본과의 기술활동실적(performance)을 비교해봄으로써 유럽의 과학기술 수준을 상대적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 유럽 미국 일본간의 기술활동 실적을 비교 평가한 모델로서 유럽의 기술평가 예측기관이 R&D(연구개발)투자액, 특허등록건수, 과학기술관련 발표논문, 설비투자규모 등을 종합하여 만든 현시기술비교우위지수(revealed technological advantage index)가 있다.
이 모델에 의거해 이 기관이 과거 20년간의 통계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유럽(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벨기에 덴마크 아일랜드 네덜란드 스웨덴 스위스 등 10개국만 대상)은 공업용 화학제품, 의약품, 산업용 기계, 원자력에서 절대적인 비교우위를 보이고 있으며 미국은 식품, 석유화학, 미사일 우주선 분야에서 일본은 금속·비금속제품, 사무용기기, 전기장치, 가정용 전자 등에서 비교우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유럽은 식품 사무용기기, 가정용전자 등에서 미·일에 뒤떨어져 있다.
상품화기술 뒤쳐져
우리가 유럽의 과학기술과 관련하여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점은 최근 EC(유럽공동체) 통합 추진이 유럽의 과학기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왔으며 향후 유럽의 과학기술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선 유럽의 과학기술은 그간의 기술개발 노력 및 어느 정도의 기술적 비교우위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로 인해 미국과 일본에 상당히 뒤처져 왔다.
첫째 미래 경제의 승패는 첨단기술 수준과 첨단산업의 경쟁력에 달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컴퓨터 등 대규모의 연구개발비가 소요되는 첨단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일본에 비해 큰 기술격차를 나타내고 있다. 실제로 유럽각국은 반도체 VCR PC시장 등에서 급격하게 경쟁력을 상실하여 현재 반도체 수요의 절반 이상을 미·일 등에서 생산한 역외제품에 의존하고 있다. PC는 80%가 미국산이며 VCR은 90%가 일본 및 동남아산이다.
둘째 그동안 유럽은 화학 의학 기계 등 기초 연구에서 비교우위를 지켜왔으나 이들 기술을 상품화시키는 기술개발에 있어서는 경쟁국가보다 훨씬 뒤처져왔다. 즉 유럽의 기업들은 기술개발 활동을 신제품개발로 연결시키고 신제품개발을 시장점유 및 이윤확보로 전환시키는 능력이 부족했다.
셋째 80년대를 통해 유럽산업은 경쟁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는 바, 그 이유중의 하나는 미국과 일본에 비해 기술개발 투자가 미흡하였기 때문이라고 분석되고 있다. 예를 들어 1991년에 미국이 GDP의 2,8%, 일본은 3.5%를 연구개발에 투자한데 비해 유럽국가들은 2.1% 투자에 불과했다.
또한 유럽에서는 연구개발활동이 유럽 전체의 차원보다는 각 국가간의 차원에 머물러 고속전철기술은 프랑스, 기계공업은 스웨덴, 석유화학공업은 노르웨이, 식품은 덴마크, 무기류는 영국과 프랑스, 화학공업은 독일, 의류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각국별 특성에 맞는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왔다.
위와 같은 몇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EC는 1987년 구주통합법(SEA)에 의해 상품교역에 따르는 모든 장벽을 제거하고 기술관련 분야에서는 회원국가 상호기술협력체제를 강화하여 기술을 공동으로 개발하고, 나아가 유럽기술공동체(European Technology Community, ETC)의 형성을 추진하여 거대한 투자가 요구되는 첨단산업의 기술개발에는 공동체 차원의 기술개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유럽공동체 차원의 연구개발활동은 1984년부터 3년간 시범적으로 시행된 후 1987년부터 5개년계획이 수립되어 이미 8개부문 37개 프로그램에 총65억 달러가 투입되었으며, 최근에는 제3차 연구개발 5개년계획(90~94년)이 수립되어 총 69억 달러가 투입될 예정인데 중점 기술개발 분야는 정보기술부문이다(그림).
에스프리와 유레카
현재 진행중인 EC의 대표적인 공동연구개발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에스프리(ESPRIT, 유럽정보기술 개발전략계획) : 에스프리는 EC의 정보기술부문 최대의 연구개발 프로그램으로 일본이 발표한 제5세대 컴퓨터 개발 계획에 자극받아 산·학·연 협동연구체제로 수행되는 1984~92년 동안의 장기프로그램이다. 이 계획의 주요 연구대상 분야는 첨단 마이크로 전자기술, 소프트웨어 기술, 첨단 정보처리기술, 사무자동화, 공장자동화 시스템 개발 등이며 총 3백28개 프로젝트에 6백여기관 3천여명의 과학기술자들이 동원되고 있다.
유레카계획(EUREKA, 기술유럽계획) : 유레카계획은 프랑스의 미테랑대통령이 제안함으로써 설립된 범유럽 기술협력 프로그램으로 PC와 마이크로 컴퓨터의 표준화, 비정질 실리콘 집적회로 연구, 고속 컴퓨터 개발, 레이저에 의한 의료진단장치 개발, 로봇개발 등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데 현재 1천6백여개의 기업과 연구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위와 같은 EC의 공동 연구개발 프로그램을 재평가함과 동시에 그동안의 여건변화를 감안하여 EC 집행위원회는 1992년 4월 신기술개발전략(Research after Maastricht)을 수립하였는데 이는 EC통합에 따른 산업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있어 과학기술정책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식을 재확인함과 동시에 다음 세가지 주요원칙에 근거한 과학기술전략을 제안하고 있다.
연구방향의 재정립 : 80년대 후반 EC의 공동연구개발은 개발당사국으로 하여금 유럽차원에서 문제를 인식하는데 기여하였고 수많은 기술개발 성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유럽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시급한 고도산업 사회로의 전환 필요성을 고려할 때 현시점에서는 연구의 중점분야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이에 따라 산업경쟁력 확보와 직접 연결되는 반도체, 교통분야 첨단기술, 환경기술, 첨단 분자생물학 등의 핵심 범용기술을 우선 지원한다.
연구비의 확대 : 공동기술개발을 위한 EC의 연구비 예산이 1988년 2.6%에서 1992년 3.8%로 증가하였으나, 연구결과가 보다 큰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1992년 29억 달러에서 1997년까지 50억달러 수준으로 자금확충이 이루어져야 한다.
프로그램의 강화 : 연구개발 과정 및 개발결과 활용시 산업과 확실히 연계되도록 하기 위하여 생산자 및 사용자의 참여와 협력이 필요하며, 이와 같은 사항에 중점을 둔 제4차 기술개발 프로그램(94년~98년)을 금년중에 작성한다.
전통적인 기초기술에 첨단기술을 접합
앞에서 유럽이 미국·일본에 비해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는 과학기술분야와 유럽공동체를 통해 미·일을 뒤쫓아가려는 공동의 과학기술정책을 살펴 보았다. 유럽 과학기술의 미래를 조망해 볼 때 유럽은 그들이 가진 기술개발의 특성에 의하여 대단히 큰 저력을 갖고 있다.
유럽 과학정책연구소의 샤프 교수는 "향후 세계적인 기술개발추세를 전망해 볼 때, 마이크로전자 및 정보관련기술과 함께 환경관련 기술이 미래의 기술주도 분야가 될 것이며, 또한 더욱 중요한 사실은 전통적인 기초 기술과 미래의 첨단기술은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첨단 분야의 기술발전은 그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산업분야에 응용되어 기술의 파급효과가 대단히 클 것이며,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기초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가 향후 기술선진국이 되는데 유리한 여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유럽 과학기술의 장래는 상당히 낙관적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견해는 지난 6월 리스본에서 열린 EC 정상회담에서도 피력되었다. EC 집행위원회가 제출한 향후 신기술개발전략에 따르면 유럽의 공동기술개발전략은 경쟁이전단계(pre-competitive)의 기초연구에 중점을 둔 보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며 또한 목표지향적 프로젝트 추진정책(major targeted project)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최근 첨단기술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유럽의 과학기술은 퇴보했다고 볼 수 있지만, 향후 유럽각국이 보유하고 있는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전통기술의 우위분야가 유럽공동체로 응집되고 첨단기술분야에 대한 공동기술 개발정책이 성공적으로 수행된다면 유럽의 과학기술은 빠른 소생력을 보여 그 어느 지역보다도 빠른 기술발전을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