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찬 북소리와 함께 숭례문(일명 남대문)이 활짝 열린다. 성문을 지키는 군사들이 나와 죽 늘어서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경기도 화성에 다녀오는 어가행렬이 이어진다.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 시장에 가는 보부상과 지게꾼이 지나가고 ‘조선시대 주민등록증’ 호패를 검사하는 모습도 보인다.
서울시 중구청이 지난 3월 3일 숭례문을 시민들에게 개방하면서 벌인 행사 장면이다.
100여년 만의 개방 아니다
우리 문화재를 상징하는 국보 제1호 숭례문이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개방됐다. 숭례문은 그동안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 한복판에 고립돼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일반인이 중앙 통로인 홍예문을 통과해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 홍예문은 문틀 위쪽이 무지개 모양이다.
1962년 국보 1호로 지정된 숭례문은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됐고 세종 때인 1448년과 성종 시절인 1479년 크게 재건축됐다. 현존하는 성문 가운데 조선 초기의 건축 특징을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다포(多包) 양식이다.
포는 지붕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 같은 곳에 짜 맞춰 댄 나무재료를 말한다. 다포 양식은 이런 포가 기둥 위뿐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놓이는 형식이다.
숭례문은 성곽에 둘러싸인 서울에서 사람이나 우마차가 남쪽으로 드나들 수 있던 ‘대문’ 역할을 했다. 놀랍게도 1899년엔 전차가 숭례문 중앙통로를 지나다녔다. 종로에서 남대문 구간에 전차가 다니기 시작했던 것. 하지만 일본 통감부는 1907년 교통이 혼잡하다는 이유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허물었다. 그래서 전찻길과 도로는 숭례문 둘레에 생겼다.
이때부터 숭례문이 시민에게서 멀어진 걸까. 1910~45년 사이에 숭례문 일대 거리 풍경을 보여주는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서울’을 엮은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전차가 다녔던 당시에도 사람들이 숭례문으로 지나다녔다고 한다. 숭례문을 관리하는 서울시 중구청의 발표처럼 이번 숭례문 개방이 100여년 만이 아닌 셈. 실제 숭례문에 사람들의 접근이 불가능해진 것은 전찻길이 없어지고 자동차가 늘어난 1960년대 말부터였다.
의치처럼 인공석으로 처리
서울시는 지난해 5월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하면서 숭례문 개방을 준비해 왔다. 이에 따라 중구청은 지난해 10월부터 사람이 숭례문 통로를 지날 때를 대비해 홍예문 석재를 새롭게 다듬었다. 자동차 매연 때문에 새까맣게 변한 석재를 깨끗이 하고 군데군데 갈라진 곳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실제 숭례문 보존처리를 담당했던 송규훈 문화재 복원전문가는 “아교성분의 천연접착제와 티타늄 봉이 중요하게 쓰였다”고 말했다.
먼저 석재에 찌든 때. 매연과 기름 찌꺼기가 석재 표면에 두께 0.5mm 정도로 얇게 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천연 오일을 흡착시킨 뒤 때가 부들부들해지면 철솔질을 하고 알코올로 닦아냈다.
다음으로 군데군데 갈라진 곳. 아교성분의 천연접착제에 돌가루를 섞어 갈라진 곳에 메워 넣으면 6~10시간 뒤에 굳는다. 돌가루는 원재료에 가까운 것으로 인왕산에서 가져온 화강암을 썼다고 한다. 숭례문을 쌓은 돌은 가까운 산에서 가져왔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자문에 따른 것. 같은 화강암이라도 암석의 원산지에 따라 돌의 재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치아에 의치를 하듯이 홍예문에도 의석(인공석)이 들어갔다. 가로 45cm, 세로 35cm 가량의 석편(돌조각)이 5cm 두께로 떨어진 부분이 발견됐다. 이 석편은 다시 손바닥만한 조각 5개로 떨어져 있어 각각 티타늄 봉을 박아 벽에 붙였다. 티타늄은 철에 비해 녹슬지 않고 강도가 좋다. 이때도 아교와 화강암 돌가루를 반죽한 것을 티타늄 봉과 함께 사용했다.
또 새 돌로 복원하면 홍예문의 예스러운 느낌이 떨어질 수 있다는 문제도 해결했다. 그을음이나 빨간 돌을 곱게 갈아서 만든 안료를 이용해 거무스름한 홍예문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했다. 600년의 세월을 순간에 얻게 되는 셈.
홍예문 남쪽과 북쪽 입구에서는 강화유리로 덮여 있는 구덩이를 만날 수 있다. 여기에는 건축 당시의 숭례문이 지금보다 1.6m 가량 더 높았다는 비밀이 숨어 있다.
원래는 지금보다 1.6m 높았다
지난해 12월 숭례문을 개방하기 위해 통로 바닥에 돌을 깔기에 앞서 숭례문 주변에 다섯 군데의 구덩이를 팠다. 이 구덩이에서 조선 세종 때 것으로 추정되는 맨 아래 기초석, 바닥에 까는 넓적한 돌, 문을 여닫을 수 있게 만든 구조물 등이 원형대로 발굴됐다. 이는 숭례문의 기초 상당부분이 그동안 땅에 묻혀 있던 바람에 건축 당시에 비해 현재의 숭례문이 더 낮게 보였다는 뜻이다.
홍예문은 원래의 3분의 1 정도가 묻혀 있었으며 다른 곳에서도 돌을 쌓아 놓은 옹벽, 바닥에 까는 돌이 거의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됐다. 이렇게 묻힌 부분을 감안하면 숭례문은 높이가 현재의 12.3m에서 13.9m로, 홍예문은 4.37m에서 5.97m로 크게 올라갈 전망이다.
손영식 문화재 전문위원에 따르면 1907년께 숭례문을 관통하는 전차선로를 내면서 문 주위의 흙을 1m 가량 쌓아올려 아래 쪽 기초와 바닥 돌이 완전히 묻힌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숭례문이 원래 모습대로 복원된다면 건축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