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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을 때 한국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과학자가 있었다. 인류의 달 착륙을 생중계해 ‘아폴로 박사’로 유명해진 조경철 박사다.

한평생 우주와 별을 노래하던 조경철 박사가 3월 6일 지병으로 서울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1세였다. 조 박사는 10일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영결식을 거친 뒤 경기 파주시 통일동산에 안식처를 마련했다. 5일 동안 치러진 그의 장례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각계에서 조화와 조문을 보내고 동아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과 방송에 주요 뉴스로 보도되며 조 박사가 얼마나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는지 실감하게 했다. 특히 그가 키워낸 천문학자들이 밤낮으로 빈소를 지키며 그를 추억하는 모습은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조경철 박사는

1929년 4월 4일 출생
1954년 연희대(현 연세대) 물리학과 졸업
196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원 천문학 박사
1962~1969년 미국 해군천문대,
NASA 연구원 및 메릴랜드대 교수
1969~1979년 연세대 교수
1970~1972년 한국천문학회장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9~1981년 한국우주과학회 창설 초대회장
1979~1993년 경희대 교수, 공대학장 및 부총장 역임
1988년 한국우주과학회 우주과학상
2001년 국제천문연맹에
소행성 ‘조경철’ 공식 등록(일본인 발견)
2002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20세기의 탁월한 과학자 상’

 


달 착륙 생방송으로 스타가 되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할 때 마침 미국에서 천문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조 박사가 위성을 통해 생중계된 방송의 통역과 해설을 맡았다. 그는 생중계 도중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의자에서 넘어지는 장면이 TV에 잡히면서 ‘아폴로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과학 대중화 활동에 앞장서면서 친근하고 소탈한 모습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평북 선천이 고향인 고인은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대(현 연세대) 물리학과에 입학해 과학도의 꿈을 키웠다. 196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천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한국인으로는 첫 연구원이 됐다. 이후 메릴랜드대 교수 등을 거쳐 1969년부터 연세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몇 년 전 재미과학자인 신재원 박사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NASA 국장보급인 항공연구부문 총책임자에 오르면서 유명해졌는데, 바로 조 박사가 1960년대에 처음 개척한 길에서 꽃을 피운 셈이다.

조 박사는 연세대와 경희대에서 연구와 후진 양성에 앞장서는 한편, 5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해 한국 천문학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한국천문연구원의 전신인 국립천문대 건설과 한국우주과학회 창립을 주도하며 한국 천문학 발전과 함께했다. 조 박사가 무엇보다 기여한 부분은 과학 대중화였다. 시원한 웃음과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풍부한 지식을 갖춘 조 박사는 방송을 누비며 천문학을 포함한 과학 전반을 알기 쉽게 대중들에게 전달했다. 국내 과학자로는 가장 많은 177권의 책을 펴내고 3000건 이상의 글을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다.

기자도 2006년 초 과학동아 2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과학동아에 글을 많이 쓴 분들을 추린 적이 있다. 천문학 분야에서 고인은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는 ‘베스트 필자’였다. 태양계와 은하, 외계 행성을 넘나들며 흥미진진한 우주 이야기를 알기 쉽게 전달하는 고인의 글은 마치 옆에서 들려주는 듯 생생했다. 2006년 초에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사에서 열린 과학동아 20주년 기념식에서 기자는 고인을 처음 만났다. 밝은 웃음으로 새파랗게 젊은 기자에게 악수를 청하던 고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행사에 참석한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장, 이태형 천문우주기획 대표 등 후배들이 고인의 주위에 몰려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서 다른 과학계에서 쉽게 보기 어려웠던 선후배 간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평생의 자랑이었던 ‘서민의 친구’

조 박사는 3년 전 출간한 자서전 ‘과학자 조경철, 별과 살아온 인생’에서 “서민의 친구라는 애칭이 가장 큰 감투”라고 썼다. 책에서 그는 “나는 큰 감투도 쓰지 못했고 돈도 많이 벌지 못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남다른 자부심이 있다. ‘아폴로 박사, 조경철’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다. ‘서민의 친구’란 애칭이 바로 내게 주어진 가장 큰 감투라 여긴다”라고 썼다. 이처럼 밝고 친근한 모습은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기에 충분했다.

기자가 빈소에서 만난 고인의 가족들도 조 박사를 친절하고 다정한 남편과 아버지로 추억했다. 조 박사의 부인인 전계현 씨(74)는 ‘미워도 다시 한 번’에 나온 영화배우 출신이다. 조 박사는 TV의 한 프로그램에서 부인과 처음 만난 뒤 전화번호를 받아 집에 찾아가며 인연을 맺었다(빈소에서 계속 방영된 TV 프로그램을 보며 이 이야기를 알게 됐다). 전 씨는 “(조 박사가) 결혼기념일마다 ‘I LOVE YOU’라고 쓴 카드를 줬다”며 “감정 표현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깊은 배려를 가진 분”이라고 회고했다. 아들인 조서원 JC펙픽쳐스 대표도 “아버지께서 길을 가다 TV에서 봤다고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늘 웃으며 대하셨다”고 전했다.


국내 천문학계에서는 조 박사의 업적을 기려 강원 화천군 광덕산에 짓고 있는 ‘조경철 천문과학관’이 완공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고인이 눈을 감은 사실을 많이 안타까워했다. 내년 초에 문을 열 예정인 이곳에는 국내 시민천문대 중 가장 큰 지름 1m 망원경이 설치될 계획이다. 빈소에서 만난 이태형 천문우주기획 대표는 “말년에 전국 각지로 시민천문대를 건립하기 위해 함께 다녔는데 산을 파는 공사를 반대하던 어르신들에게 ‘천문대는 말뚝을 박는 곳이 아니라 빛을 모으는 곳’이라며 설득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또 “조 박사는 2035년 개기일식이 일어나는데 평양에서만 보일 것 같아 안타깝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자신이 죽으면 굴착기로 무덤을 파서라도 평양에 데려가 달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열정이 뜨거웠던 분”이라고 회상했다.

평양고등보통학교 3년 후배인 김재권 자동차생활 발행인(78)은 “선배는 과학뿐 아니라 미술,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고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뛰어났다”고 회고했다.

홍창선 KAIST 항공우주과 명예교수는 “조 박사는 1인당 국민소득이 200, 300달러였던 우리나라에 들어와 국민에게 별과 우주의 꿈을 키워준 사람”이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홍 교수의 말처럼 조 박사는 아무것도 없는 천문학의 불모지에 모든 것을 버리고 찾아와 홀로 사람을 키우고 터를 닦고 씨를 뿌린 과학자였다. 조 박사는 미국 유학을 가 처음에는 정치학을 공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스승이자 한국 천문학의 태두인 이원철 박사의 편지를 받고 인생을 바꾼다.

“미국에서 정치학으로 외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실망이 크다. 너(조 박사)를 나의 후계자로 삼아 천문학자로 만들고 싶다. 미시간 대학원 천문학과의 입학 허가서와 국비유학생 허가서를 보내니 곧 미시간대로 떠나라”는 것이 편지의 내용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던 조 박사는 천문학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이 판단이 결국 역사를 바꿨다(박사 학위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받았다).고인이 1990년대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외계인을 등장시킨 몰래카메라에 속는 모습이 방송된 적이 있었다. 당시 “천문학자가 그런 속임수에 속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느냐”는 비판도 있었다.

빈소에서 만난 이태형 대표는 “조 박사께 그 일을 물어본 적이 있는데 ‘방송 중간에 몰래카메라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방송의 재미를 위해서 속아주는 척했다’고 말씀하셨다”고 털어놨다. 사실 20, 30대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고인의 모습은 어쩌면 이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우주인인 이소연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연구원은 “그 장면이 과학 대중화에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얼마나 자신을 희생한 것인지 요즘에서야 깨닫게 됐다”며 “고인은 제 역할 모델인 분”이라며 숙연해했다. 고인은 ‘과학대중화의 선구자’였고 ‘프로’였다.

고인은 상복이 많은 사람이다.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88년 한국우주과학회 우주과학상을 받았다. 외국에서도 고인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2001년 일본 도쿄대는 일본인이 발견한 소행성에 ‘조경철’이라는 이름을 붙이도록 했고, 2002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가 ‘20세기의 탁월한 과학자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국민들의 마음속에 고인은 늘 장난기 섞인 밝은 웃음소리와 함께 ‘아폴로 박사’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2010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김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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