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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의복은 실용적이지 못하다. 겨울 추 위가 매서운 나라에서 베옷을 입는가 하면, 사 막도 없는데 아랍인들처럼 흰옷을 입는다. 겉옷은 거미줄만큼이나 연한 쐐기풀 섬유로 짠 두루마기 를 입는다. 남자들은 말총이나 대나무로 된 아주 불 편한 망건 속에 상투를 밀어 넣으며 그 위에 값비싼 말총이나 대나무로 된 갓을 쓴다. 부녀자들은 주체 하기 힘들 정도로 빳빳하게 풀을 먹인 치마를 두르 는데, 이 치마는 겨드랑이까지 올라오며 저고리는 어깨를 가까스로 덮는 정도이다.”

1901년에 조선을 다녀간 프랑스 외교관 조르주 뒤 크로는 자신의 저서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에 서 조선인의 옷차림을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 옷을 처음 본 이방인이 자신의 느낌을 적은 것뿐이지만 왠 지 섭섭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 옷이 실용적이 지 못하다니! 그런 인식은 현대인들에게도 짙게 깔 려 있는 듯하다. 명절이나 결혼식 때만 겨우 꺼내 입 으면서 그때마다 거추장스럽고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 옷 한복이야말로 입 었을 때 편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실용적인 옷이다. 그럴 만한 과학적 비밀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한복에 왜 주름을 잡았을까

한복은 왜 상자에 넣어 보관하고, 양복은 왜 옷걸이 에 걸어 보관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차이 를 크게 의식하지 않지만 포장법의 차이는 사실 옷 구조가 다른 데서 비롯된다.

우리 옷은 평면적이다. 처음 디자인할 때부터 평 면으로 설계됐고 완성된 모양도 평면이다. 따라서 양복처럼 구겨질 것을 걱정해 옷걸이에 걸어둘 필 요가 없다. 종이처럼 접어 납작하게 정리할 수 있기 때문에 솜옷이 아니고서는 개켰을 때 부피도 별로 크지 않다. 조선시대 때 반닫이 하나에 온 가족의 옷을 보관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 수십 벌의 저고 리와 치마를 네모반듯한 보자기 하나에 알뜰하게 담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종잇장처럼 2차원적인 우리 옷이 사람이 입으면 3차원 입체로 되살아난다 는 점이다. 이 미묘한 변신을 가능케 하는 장치는 바로 ‘주름’이다. 인간의 입체적인 몸을 안정적으로 감싸는 데 주름만큼 적절하고 손쉬운 방법은 없다.


옷감 한쪽에 주름을 잡으면 자연스럽게 볼록한 입체모양의 옷이 만들어지고, 이런 옷은 내부에 공간 이 많아서 입었을 때 활동하기 편하다. 실제로 한복 치마의 윗부분이나 원피스처럼 생 긴 조선시대 무관(武官)의 옷 철릭을 보면 수백 개 의 주름이 빼곡하게 잡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쟁이 일어났을 때 말을 타고 싸워야 하는 장수들에 게는 폭이 좁고 긴 관복보다는 주름 잡힌 풍성한 철 릭이 적합했기 때문이다.

양반다리로 앉아도 편한 바지에 숨은 원리

우리 옷이 입었을 때 편하다는 사실은 한복 바지를 봐 도 알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온돌이라는 독특한 난 방 방식을 사용하면서 앉아서 밥을 먹고 글을 읽고 이 야기를 하는 좌식 생활을 했다. 오랜 시간 동안 바닥 에 앉아 있으려면 옷이 편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특히 바지는 양반다리를 해도 찢어지거나 당김이 없 도록 폭이 넓고 신축성이 좋아야 했다. 조상들은 ‘사 폭’이라는 천 조각을 이용해 그런 바지를 만들었다.

한복 바지를 바닥에 펼쳐 놓고 보면 모두 7개의 옷 감 조각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 핵심이 되는 부분은 다리 사이 가랑이 부분에 해당하는 ‘큰사폭’과 ‘작은 사폭’ 두 조각이다. 옷감은 기본적으로 세로방향의 날실과 가로방향의 씨실을 교차해서 짠다. 따라서 옷감은 날실 또는 씨실 방향으로 직접 당길 때보다 사선 방향(바이어스 방향)으로 당길 때 훨씬 더 신축 성 있게 늘어난다. 이를 ‘바이어스 효과’라 한다.

그런데 바지 중심 부분에 두 옷감이 꿰매져 있으 면, 다리를 앞뒤로 움직일 때 당기는 힘이 각 옷감 의 사선 방향으로 작용한다. 즉 오른쪽 다리를 앞으 로 움직이면 왼쪽 옷감인 작은사폭이 사선 방향으 로 당겨지면서 잘 늘어나고, 왼쪽 다리를 움직이면 오른쪽 옷감인 큰사폭이 늘어난다. 같은 원리로 양 반다리로 앉았을 때도 당기는 힘이 사선 방향으로 작용하면서 옷감이 잘 늘어나므로 불편함이 없다. 과거 조선을 다녀간 많은 서양인들은 “조선의 바지 는 자루처럼 넓고 풍성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하 지만 아마 그들은 바지에 숨겨져 있는 사폭의 원리 까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버선발이 갸름해 보이는 이유

“한국인들의 발은 가늘고 모양새가 좋다. 한국 여 자들은 중국 여자들처럼 전족 을 하지도 않고, 일 본 여자들처럼 게다(일본인이 신는 나막신)를 신어 서 발등이 휘어져 있지도 않다.”

1919년 당시 대한제국이었던 한국을 방문한 영 국인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1946년 영국 런던 에서 발간된 자신의 책 ‘Old Korea: the Land of Morning Calm(옛 한국: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적 은 내용이다. 아마 그녀가 본 것은 버선을 신은 발 이었을 것이다. 시인 조지훈이 ‘외씨버선’이라고 표 현했던 것처럼 실제로 버선을 신으면 발 모양이 오 이씨처럼 날렵하고 갸름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 기에도 역시 바이어스 효과가 숨어 있다.

버선은 벗어 두면 납작한 평면 구조지만 신고 발 을 땅에 디디면 발목과 발등의 경계 부분이 접히면 서 자연스럽게 입체 모양이 된다. 이때 발뒤꿈치 부 분은 신축성 있게 늘어나며 발이 받는 압력을 줄인 다. 당기는 힘의 방향이 옷감의 날실 또는 씨실 방 향과 사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발을 들었을 땐 당기는 힘이 사라지므로 버선이 다시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면서 발을 갸름하고 탄력 있게 감싸준다.

그 밖에도 우리 옷에는 바이어스 효과를 활용한 부분이 곳곳에 많다. 팔을 움직일 때 겨드랑이 부분이 찢어지거나 바느질선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저고리에 붙인 삼각형이나 사각형 무(덧댄 천)도 바이어스 효과를 노린 예다. 옷을 평면적으로 제작해 발생하는 문제를 또 다른 평면재단으로 해결한 것이다.


패딩 점퍼의 원조, 누비옷

조선시대 사람들은 찬 바람과 추위를 막기 위해 옷 속에 솜을 두툼하게 넣어 입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든 옷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옷감 안에서 솜이 뭉치거나 아래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솜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실로 고정하는 방법을 써야 했는데, 이것이 더욱 정교하게 발달해 ‘누비’가 됐다. 누비는 옷감과 옷감 사이에 솜을 두고 실로 그 위를 촘촘하게 줄지어 꿰매는 바느질 방식으로, 저고리나 바지는 물론 치마와 두루마기를 만들 때에도 사용됐다.

옷감을 누비면 속에 들어 있는 솜이 움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느질 선 사이사이의 공간이 공기를 품고 있기 때문에 두껍지 않으면서도 보온성이 뛰어나다. 누비옷이 오늘날 패딩 점퍼나 조끼의 원조인 셈이다. 게다가 과거에는 옷을 한 번 입은 뒤 빨래를 할 때 바느질한 부분을 모두 뜯어내고 다시 꿰매 입었는데, 누비옷은 빨래를 할 때에도 해체하거나 솜을 다시 꺼낼 필요가 없어서 편리했다.

때론 방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옷감의 한쪽 면에 한지를 덧붙여 입기도 했다. 옷감 위에 한지와 솜을 샌드위치처럼 포개 두고 그 위에 다시 옷감을 얹어 꿰매는 방식은 몇 가지 이점(利點)을 동시에 취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닥나무로 만든 한지는 방문에 바르는 문풍지로 쓰였을 정도로 방한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찬 공기가 옷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솜이 품은 따뜻한 공기가 옷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 때 서북지방의 군사들이 겨울철에 종이를 넣어 만든 옷인 지의(紙衣)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두 번째 효과는 한지의 마찰력에서 비롯된다. 표면이 거친 한지 위에 솜을 두면 굳이 누비거나 사이사이를 꿰매 고정하지 않아도 솜이 옷감 안에서 미끄러지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지 값이 매우 비쌌기 때문에 절약하려고 글씨연습을 한 한지를 넣는 경우도 있었다. 출토된 솜옷에서 가끔씩 한문이 가득 적힌 종이가 발견되는 이유다.


모자에 구멍을 뚫어 일석삼조 효과

1886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 기관 ‘육영공원’의 교사로 부임했던 선 교사 조지 길모어는 자신의 저서 ‘서 울풍물지(1892년)’에서 “조선은 세계 적으로 유명한 모자의 나라”라고 말했 다. 그는 특히 모자의 다양함과 그것들 이 계급과 용도, 계절에 따라 세밀하게 나뉘어 있다는 데 감탄했다. 하지만 그 가 좀 더 주의 깊게 모자들을 살펴봤다면 아마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왜 겨 울에도 정수리 부분이 뚫린 모자를 쓰는 걸까.

조선시대의 모자는 누가, 언제, 어떻게 쓰는 모 자인지에 관계없이 얇거나 가볍다는 공통점이 있 다. 또 아무리 두꺼운 겨울 모자라도 머리 위쪽 정 수리 부분은 시원하게 트여 있다. 여기에는 두한족 열, 즉 ‘머리는 차게 발은 따듯하게 한다’는 조상들 이 생각한 건강의 원리가 담겨 있다. 정수리 부분이 뚫린 모자는 사람이 가장 추위를 많이 느끼는 볼과 이마, 목을 따뜻하게 가리면서 머리 위쪽으로 솟아 오르는 열은 효과적으로 배출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남바위 와 풍차 를 보면 이런 특성이 더욱 뚜렷 이 나타난다.

모자의 윗부분을 터놓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일단 남자들은 머리 위로 삐죽이 솟은 상투를 누르지 않고도 모자를 쓸 수 있다. 또 이 트임 덕분에 평면으로 재단된 모자가 자연스럽 게 벌어져 둥근 머리를 감쌀 수 있다. 하나의 장치 로 몇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니 실용적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평면적인 디자인으로 입체적인 몸을 살뜰히 감싸 는 옷, 한지라는 소재의 특성을 이용해 방한효과를 높인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옷, 위가 뚫린 모자와 솜 을 넣은 버선으로 두한족열이라는 건강 원리를 충 분히 실천할 수 있었던 옷, 이 모든 것이 우리 옷이 다. 이제부터는 우리 옷의 새로운 면모에 관심을 가 져보자. 불편하고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선입견을 버리면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조상들의 지혜와 현 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장점들이 눈에 띄기 시 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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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조희진 복식문화연구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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