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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의 아이콘, 앤디 워홀

아인슈타인 실크스크린에서 오줌으로 그린 추상화까지

인물의 초상을 다양한 색상과 패턴으로 찍어낸 연작으로 유명한 앤디 워홀.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작품을 4월 4일까지 전시하고 있다.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친근하게 느낄 만큼 익숙하면서도 화려한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를 만나보자.

스페인계 프랑스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미국의 추상화가 잭슨 폴록…. 이들처럼 살아 있는 동안 돈과 명성 모두를 움켜쥔 예술가는 드물다. 미국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앤디 워홀은 1960년대 팝아트 로 미술계 정상에 올라 미술, 영화, 저널리즘 등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누구보다도 많은 부와 명성을 쌓았다. 한 시대 동안 미국 문화에서 살아 있는 전설이자 아이콘이었다.

원래 광고 디자이너였던 그는 1950년대 뉴욕을 대표하는 ‘보그’, ‘하퍼스 바자’, ‘ 글래머’ 같은 패션잡지의 표지 디자인으로 이미 유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상업적인 디자이너가 아닌 순수 예술가로 인정받길 원했다. 그는 가장 미국적인 요소, 즉 미국 일상의 풍요로움을 작품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1달러, 2달러짜리 지폐를 시작으로 캠벨 수프 깡통처럼 익숙한 상품, 메릴린 먼로와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스타의 모습을 판화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친근하고 이해하기 쉬운 소재를 선택한 덕분에 그는 단번에 유명한 예술가가 됐고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워홀에 대한 사람들의 호불호는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미술의 전통적인 가치를 부정하고 미술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예술가라고 높이 평가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중의 취향을 재빨리 파악한 상업 디자이너라고 폄하했다. 워홀의 작품이 예술품인지, 상품인지 의견이 분분한 이유는 그가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공장(The Factory)’이라 불리는 작업실에서 판화를 대량으로 생산했는데, 자
기 아이디어든 남의 아이디어든 상관없이 작품화한 데다 조수들에게 판화 제작의 일부 또는 전체 과정을 맡겼다. 그 결과 동일한 작품이 마치 공산품처럼 수백~수천 장씩 쏟아져 나왔다. 또 대중이 원하는 스타일을 조사해 작품 이미지의 색과 형태, 수량을 결정했다. 미술의 전통적인 가치를 따르는 예술가들은 그가 예술의 본질인 작품의 독창성과 유일성을 근본적으로 훼손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워홀에 대한 논란은 그가 죽은 지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팝아트
1950년대 중후반 미국에서 주관적이고 엄숙한 추상표현주의를 반대하고 매스미디어와 광고 같은 대중문화의 시각이미지를 미술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던 경향.



다채롭게 수십 장 찍어내는 실크스크린

‘앤디 워홀?’ 하면 일반인들은 대개 메릴린 먼로가 회색 얼굴에 퍼렇고 빨간 입술, 빨간 얼굴에 노랗고 파란 입술, 분홍색 얼굴에 연두색 아이섀도를 해 여러 버전으로 재탄생한 연작을 떠올린다. 하나의 표정에서 다양한 화려함이 보이고 ‘개인’이 아닌 ‘할리우드 스타’라는 상품처럼 느껴진다. 워홀은 이렇게 특정 대상의 한 가지 포즈를 다채로운 연작으로 찍어냈다.

그가 마이클 잭슨, 비틀즈, 마오쩌둥, 무하마드 알리, 재클린 케네디, 아인슈타인, 베토벤 등 유명인을 작품화했던 이유는 스타야말로 당시의 미국 사회를 보여주는 문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워홀의 작품에 등장해야 ‘진정한 스타’라고 여겼고, 그다지 유명하지 않던 사람이 그의 작품에 나온 뒤 유명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워홀이 ‘스타’를 탄생시켰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주로 공판화인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했다. 판화는 원하는 그림을 목판이나 동판, 석판에 물리적, 화학적 힘으로 새긴 뒤 잉크를 발라 종이나 천에 찍어내는 기법이다. 공판화는 스케치대로 구멍을 뚫은 판(스텐실) 아래 종이를 깔고 잉크를 발라 구멍이 뚫린 곳으로만 찍는다.

실크스크린은 나무판이나 동판 대신 잉크가 통과할 수 있는 얇은 실크 천을 스텐실로 삼는다. 네모난 틀에 실크를 팽팽하게 당겨 고정시키고 감광액을 전체적으로 펴 발라 어두운 곳에 보관한다. 감광액은 빛을 쬐면 단단하게 굳지만, 빛을 쬐지 않으면 계속 액체 상태를 유지해 물에 씻긴다.

스케치를 할 때 빛이 지나갈 부분과 지나가지 않을 부분을 생각해야 한다. 빛이 통과할 수 있는 투명한 OHP(광학투영기) 필름이나 트레이싱지, 트레팔지 같은 반투명 종이에 빛이 통과할 수 없는 검정색 펜이나 연필 등으로 그린다.

스케치가 끝나면 어두운 상태에서 실크스크린과 스케치를 합친다. 커다란 유리판 안쪽에 형광등이 배열된 기계(감광기)에 스케치한 종이를 깔고 그 위에 실크스크린을 얹는다. 감광기의 뚜껑을 닫고 실크스크린과 종이를 밀착시킨 뒤 형광등을 켜면, 종이에서 스케치가 없는 부분만 빛이 통과해 실크스크린에 발랐던 감광액이 굳고 스케치가 그려진 부분만 빛이 통과하지 않아 감광액이 액체 상태로 남는다. 실크스크린에 물을 흘려주면 스케치 부분의 감광액만 씻겨 나가 스케치 부분에 구멍이 뚫린다.

이 실크스크린을 스텐실처럼 새로운 종이에 올리고 잉크를 펴 바르면 구멍이 뚫린 부분으로만 잉크가 새어나가 그림이 찍힌다. 실크스크린을 여러 개 만들어 색깔별로 찍어내면 워홀의 작품처럼 화려한 판화가 탄생한다. 실크스크린은 제작하는 과정이 비교적 간편하고 일단 판을 완성하면 단시간 내에 수십 장을 찍어낼 수 있어 상업적인 포스터나 인쇄물에 많이 쓰인다.


소변이 물감과 만날 때

“코카콜라는 언제나 코카콜라다. 대통령이 마시는 코카콜라는 내가 마시는 코카콜라와 같은 그 콜라다.”

앤디 워홀이 유명인만 작품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워홀은 미국 문화의 일상적인 삶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값이 저렴해 누구나 구입할 수 있는 코카콜라 병이나 캠벨 통조림, 대중 잡지의 표지 등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냈다. 흔하고 저렴한 상품이 대중에게 친숙한 것처럼 자기 작품이 모든 사람에게 친근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작품의 의미를 표현하는 데 손쉽게 대량으로 제작할 수 있는 실크스크린 기법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가끔 워홀은 실크스크린 외에 색다른 시도도 했다. 그는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을 칠하고 마르기 전에 오줌을 눠 산화시키기도 했다. 이 작업을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소변을 보기 전에 먹은 음식이나 물감 안에 든 금속의 재료에 따라 그 패턴과 색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실험했다. 특히 빨강 계통에 비해 구리가 많이 포함된 파랑이나 녹색 계통의 물감이 추상적인 형상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워홀은 새로운 미술의 정의를 내림으로써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의 경계를 흐렸다. 이에 따라 현대 화가들은 작품을 제작할 때 어떤 주제를 어떤 방법으로 표현할까를 생각하기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표현하게 됐다.

물론 워홀은 명예와 재력에 대한 관심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것은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1981년 달러 마크($)를 화면에 꽉 채워 돈을 신격화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순수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어 광고 디자이너를 그만둔 워홀이 왜 일생 동안 돈에 집착했을까. 이는 워홀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노동자의 셋째 아들이었고, 대공황 시기를 겪었던 성장기 내내 가난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내가 길을 걸어가면 사람들이 ‘세상에서 돈이 가장 많은 사람이 지나간다’고 말하길 원한다”고 말할 정도로 돈에 대한 환상이 깊었다.

워홀이 “돈 버는 일 또한 예술”이라며 돈을 위해 예술을 했고, 예술을 상업화해 큰돈을 벌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워홀이 제작한 작품마다 그만의 번득이는 색채 조합과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을 ‘돈을 위해 예술로 둔갑시킨 것’으로만 폄하하기는 어렵다.



사진 저작권 :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SACK, Seoul, 2009

2010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아 기자 | 도움 지니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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