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하비의 연구가 등장하기 전에 의사들은 갈레노스가 세운 의학체계를 배웠고 그의 이론으로 사람의 몸을 설명했다. 갈레노스는 몸의 작용을 소화, 호흡, 신경의 3가지로 나눠 설명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정맥, 동맥, 신경은 서로 연결돼 있지 않았고, 서로 전혀 다른 체계를 구성하는 별개의 조직이었다.

갈레노스는 심장의 활동을 자세히 설명했다. 심장 안에서는 우심실에 들어온 피가 심실 사이의 격막을 통해 좌심실로 옮겨간다. 심장의 주된 운동은 심장이 팽창하면서 밖에서 피를 끌어들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갈레노스의 이런 설명에 반기를 든 것은 다양한 해부 경험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된 16세기의 학자들이었다. 특히 파도바대의 베살리우스는 심실 사이의 격막에 구멍이 없기 때문에 갈레노스의 설명은 틀렸다는 것을 밝혔다. 또 좌심실과 동맥에 피가 많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심장에서 피가 다른 무엇으로 바뀐다는 갈레노스의 설명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베살리우스는 심장과 허파를 연결하는 혈관에도 피가 있고, 정맥이 심장에 가까울수록 두꺼워진다는 것을 관찰했다. 이는 갈레노스의 이론을 반증했다.

베살리우스 뒤를 이어 콜롬보, 세르베투스 같은 학자들도 피가 우심실에서 허파로 갔다가 좌심실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콜롬보는 허파정맥의 판막도 발견했는데, 이 판막은 피를 허파에서 정맥 쪽으로 흐르게 했다. 결국 심장이 팽창하면서 피를 끌어들인다는 갈레노스의 이론은 또 한번 타격을 입었다.

이들의 뒤를 이어 하비가 등장했다. 하비는 오랫동안 다양한 동물을 해부하고 관찰했다. 그리고 자신의 관찰결과를 비교하면서 심장과 동맥의 운동과 기능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었다. 하비는 ‘동물의 심장과 피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라는 책에서 피의 순환을 증명하는 실험을 잘 정리했다.

하비는 가장 먼저 심장을 자세히 관찰했고,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첫째 심장이 이완할 때 크기가 가장 크고 이때 가슴을 쳐서 박동을 느낄 수 있다. 둘째 심장을 손에 놓고 만져보면 심장이 수축할 때 더 딱딱한데 이는 근육이 긴장해서다. 그리고 심장이 움직이면 창백한 빛깔을 띠고 정지하면 선홍색으로 바뀐다.

이로부터 하비는 심장이 수축할 때 벽이 두꺼워지고 심실은 작아져 피가 방출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갈레노스의 이론과 달리 심장이 주로 하는 일은 피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수축하면서 피를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었다.

이어서 동맥을 관찰한 하비는 동맥의 팽창과 심장의 수축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동맥을 잘라보면 좌심실이 수축했을 때 상처에서 피가 뿜어 나오고 허파동맥을 자르면 우심실이 수축했을 때 피가 뿜어 나온다는 것도 관찰했다. 이로부터 하비는 심장이 수축하면서 동맥에 피가 공급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모든 관찰 결과를 종합한 하비는 잠정적으로 동맥이 심장에서 온몸으로 혈액을 공급하고, 정맥은 온몸에서 피를 모아 심장으로 보낸다는 결론을 내렸다. 심장을 들어가고 나가는 혈관들의 구조와 크기가 대칭일 뿐만 아니라 동맥을 통해서 전달되는 피의 양과 여기에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그 많은 피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계속해서 피를 새로 만드는 일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비는 자신의 주장을 정량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실제로 피의 양을 계산했다. 하비가 측정해보니 맥박이 한번 뛸 때마다 56.6g의 피가 방출됐다. 1분 동안 맥박 수를 72로 잡으면 약 240kg의 피가 1시간 만에 방출된다. 이렇게 많은 양의 피가 만들어졌다가 없어진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피가 순환한다고 가정해야 아귀가 맞는다. 하비는 해부를 통해 대정맥을 묶거나 누르면 심장 아래로는 혈관이 막혀 손가락과 심장 사이의 피가 빠져나가 텅 비어버리는 현상을 관찰했다.

또 동맥을 묶으면 동맥과 심장 사이에 피가 가득 차서 혈관 색깔이 진해지고 터져버릴 듯 팽창하는 현상도 관찰했다. 하비는 이런 실험을 통해 자신의 생각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가졌고, 많은 사람들에게 손쉽게 보여줄 수 있는 실험을 고안했다. 이 실험이 바로 그 유명한 끈으로 팔뚝을 묶는 실험이다. 우선 하비는 마르고 정맥이 굵은 사람을 골랐다. 그 중에서도 운동한 뒤 몸의 말단으로 가는 피가 많고 맥박이 강한 사람을 다시 추렸다.

그런 다음 이렇게 선택된 사람의 팔뚝을 끈으로 묶었는데, 이 때 가능한 세게 묶으면 묶은 부위 아래에는 어느 곳에서도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묶은 부위 위쪽 동맥은 심장이 팽창했을 때도 부풀어 올라 터질 것 같이 보였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피의 공급이 중단된 손은 차갑게 식었다. 묶은 끈을 약간 느슨하게 조절하면 정맥이 부풀어 오르고 묶은 부위 아래의 동맥은 위축됐다. 묶은 부위 위쪽으로 정맥을 따라 피가 흐르지 않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관찰되는 이유는 정맥은 피부에 가깝게 있고 동맥은 피부에서 멀리,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비가 동맥과 정맥,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심장과 허파 사이의 순환 이론을 확립하면서 3개의 독립적인 조직으로 사람의 몸을 설명했던 갈레노스의 이론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물론 하비는 정맥과 동맥을 잇는 모세혈관을 발견하지 못했고 따라서 완벽한 순환 과정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만약 하비가 당시 유행하던 현미경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모세혈관을 발견해 자신의 순환이론을 보기 좋게 완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모세혈관은 한 세기 뒤 이탈리아의 현미경학자 말피기가 관찰했다.

하비의 발견에 대해 ‘망원경의 발견이 천문학을 뒤엎은 것처럼 의학을 뒤엎은 것’이라고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여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진 않다. 하지만 하비가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생명의 내부를 관찰했고 그 결과를 일관된 이론으로 해석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함으로써 1000년 넘게 군림하던 갈레노스의 이론을 대체할 새로운 이론을 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하비가 왕립의사학회에서 해부학 강의 중 피의 순환 이론을 증명하고 있다.

 

재ㆍ현ㆍ실ㆍ험

하비가 했던 실험과 그의 이론은 영국에서는 대체로 환영받았다. 가끔 그의 의견이 동료 의사들과 다르다는 점이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한번도 큰 문제로 불거진 적은 없었다. 1618년 하비는 왕실 주치의로 임명됐는데, 그가 이렇게 높은 지위에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해협 건너 대륙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러 방향에서 그의 연구는 비판을 받았지만 하비는 그것들을 무시했다. 나중에 71세가 됐을 때 그는 작은 책을 통해서 그런 비판에 답했다. 하비가 1628년 ‘동물의 심장과 피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를 출간한지 21년이 지난 후였다.

지금 하비의 이론은 상식이 됐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사람의 몸 속을 처음 가르칠 때도 심장에서부터 피가 흘러 온몸을 돌고 다시 심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형을 사용한다. 심지어 아이들이 고무공과 상자를 이용해 심장의 모형을 만들도록 해서 전시하기도 한다. 끈으로 팔뚝을 묶어 피의 순환을 유추한 하비의 피의 순환 실험은 지금도 언제 어디서든 끈만 있으면 할 수 있고, 그가 관찰한 것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하비는 피의 순환을 증명하기 위해 사슴을 해부하기도 했다.


하비는

1578년 윌리엄 하비는 영국에서 부유한 사업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다섯 동생들은 모두 상인으로 성공했는데 하비만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16세에 케임브리지의 곤빌앤키스 칼리지에 입학해 교양과 의학을 공부했고, 이후 이탈리아의 파도바대로 유학을 가 학업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유명한 해부학자 파브리치우스의 가르침을 받아 1602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왕실 주치의의 사위가 된 하비는 유명한 의사가 됐다. 1607년에 왕립의사학회 회원이 됐고, 거기서 해부학과 외과수술을 가르쳤다. 하비는 개, 돼지, 염소뿐 아니라 식용 새우, 부화하지 않은 병아리 등 많은 생물을 해부했다. 그는 이들이 살아있을 때 절개해서 심장의 수축과 맥박을 관찰했고, 이로부터 ‘피의 순환 이론’을 주창했다.


'피의 순환 이론'을 주창한 하비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5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주일우 강사

🎓️ 진로 추천

  • 의학
  • 생명과학·생명공학
  • 역사·고고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