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마다 얼음 온도가 다른 이유
스포츠 과학자들은 “동계 스포츠만큼 고도와 온도 조건에 영향을 받는 종목은 드물다”고 말한다. 얼음 품질과 고도 사이에는 묘한 관계가 있다. 얼음은 일반적으로 영하 0℃에서 얼지만 고도에 따라 결정질이 달라진다.
기압이 높은 저지대에서 언 얼음은 공기방울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반면 해발 고도가 높은 고지대에서는 얼음이 거의 완벽한 결정을 이룬다. 따라서 저지대에 만든 빙판의 표면은 고지대에 비해 거친 편이다.
밴쿠버는 동계올림픽이 열린 역대 개최지 가운데 가장 낮은 해발 고도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 고도가 2m로 거의 수면에 가깝다. 현지 언론들은 이번 밴쿠버 올림픽에서 스케이트 종목의 기록 경신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한국 선수들만 특별히 경기를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다른 나라 선수들도 같은 조건에서 경기를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장의 위치는 그렇다 치고 빙상 선수들이 최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은 또 어떤 것이 있을까. 좋은 기록을 내려면 빙판의 온도가 중요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같은 실내 빙상 경기지만 피겨스케이팅과 스피드스케이팅, 쇼트트랙, 아이스하키와 컬링이 펼쳐지는 빙판의 온도가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대한빙상경기연맹 황용식 시설이사는 “피겨스케이팅에 적합한 얼음 온도는 -3~-5℃, 스피드스케이팅은 -4~-5℃, 쇼트트랙 종목은 -7℃ 안팎이 좋다”고 말한다.
스케이트는 발에 힘을 줄 때 날과 빙판 사이에 생긴 열로 녹은 습기가 윤활유 역할을 해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원리를 이용한다. 이 때문에 빙판 표면에는 약간의 습기가 있는 것이 좋다. 피겨 종목만 해도 빙판 아래 온도는 영하지만 빙판 위는 0℃보다 조금 높다. 특히 점프와 착지, 스핀과 턴, 스텝이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피겨 종목의 경우 얼음 상태가 너무 딱딱해도, 그렇다고 너무 미끄러워도 안 된다. 얼음이 지나치게 딱딱하면 착지 과정에서 스케이트 날과 빙판 사이에 마찰력이 순식간에 높아지면서 넘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얇고 긴 날이 빙판 위에 아주 얇게 형성된 ‘수막(水膜)’을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속도를 얻는 스피트스케이팅 경기도 비슷한 온도에서 진행된다.
반면 반지름 8m인 곡선주로가 코스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쇼트트랙의 경우 얼음 온도는 두 종목보다 2~3℃가 낮다. 상대적으로 얼음이 더 딱딱하다. 이는 쇼트트랙의 속성상 곡선운동이 많기 때문에 그렇다. 쇼트트랙 선수들의 움직임을 분석하면 70~90%는 곡선운동이다. 원심력을 이기면서 최단거리로 곡선주로를 돌기 위해서는 미끄러짐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체육과학연구원 이순호 연구원은 “최근 곡선주로에서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대신 오히려 스퍼트를 더 많이 하면서 얼음의 온도가 경기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다”고 말한다.
빙상 경기에서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또 있다. 아이스링크의 실내 온도다. 선수들이 순발력과 근력, 심폐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온도가 너무 낮거나 높은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
빙상 관계자들은 선수들이 경기하는 데 적당한 실내 온도를 15~18℃ 안팎으로 보고 있다. 두터운 털옷을 입고 들어가야 하는 국내 실내 링크와 달리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장을 갖고 있는 캐나다와 독일, 일본은 이른 봄 기온 정도의 실내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워밍업을 하기에도 이 정도 기온이 유지돼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하나가 생긴다. 경기장의 실내 온도가 올라가면 얼음이 녹는 문제가 생긴다. 딱딱한 얼음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아이스하키나 쇼트트랙의 경우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첨단 아이스링크들은 얼음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얼음판을 얇게 유지한다. 얼음판 두께는 얼음의 품질을 좌우하는 요소가 된다. 얼음판이 너무 두꺼우면 냉각 파이프에서 먼 위층, 즉 얼음 표면을 적정 온도로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세계적 시설인 캐나다 캘거리 아이스링크의 경우 2.5~4cm 정도의 얼음 두께를 자랑한다.
반면 서울 목동과 경기 고양시 일산 아이스링크와 같은 대표적인 국내 경기장은 얼음 두께만 7~8cm에 이른다. 국내 선수들은 최적의 얼음 조건과는 동떨어진 열악한 상황에서 경기를 펼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얼음을 얼마나 얇게 만드느냐는 아이스링크 건설 기술과도 관련이 있다. 바닥이 울퉁불퉁하거나 비스듬할 경우 빙판을 수평으로 만들기 위해 그만큼 얼음을 두껍게 얼려야 하기 때문이다.
스키 선수 선호하는, 내린 뒤 한참 된 눈
그렇다면 새하얀 눈 위에서 펼쳐지는 스키나 스노보드 종목은 어떨까. 스키 종목은 날씨와 고도와의 전쟁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스키 종목은 날씨에 따른 눈의 성질이 경기력을 좌우한다. 일반적으로 하늘에서 방금 막 내린 눈이나 밀도가 낮은 인공설은 스키 플레이트(부츠에 부착하는 기다란 판)의 마찰력을 증가시킨다. 반면 눈이 내린 지 꽤 지난 눈이나 -2℃ 안팎의 눈처럼 잘 뭉쳐지는 눈은 플레이트와 마찰력이 적다.
체육과학연구원 김정훈 연구원은 “스키 속도를 내는 데는 내린 지 한참 된 눈에서 경기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한다. 알파인 스키처럼 회전을 할 때 눈이 많이 패는 부분에는 일부러 눈 아래 10~15cm 깊이에 고압으로 물을 주입한다. 물이 얼면서 형성된 딱딱한 얼음층이 경기력을 유지하고 온도가 올라가도 코스가 녹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눈의 설질(雪質)도 경기력에 영향을 미친다. 하늘에서 방금 막 내린 눈(파우더)은 스노보더들이 가장 선호한다. 작은 눈송이로 이뤄져 부드럽고 넘어져도 푹신하기 때문이다. 반면 태양빛에 잠시 녹았다 다시 얼면서 생긴 크러스트(설각)는 눈 표면이 살짝 얼어 있어 속도감을 얻기에 좋다.
하지만 피해야 할 눈도 있다. 주변 기온이 올라가면서 눈이 질척해져 버린 상태인 슬러시는 마찰계수가 매우 높아 회전하거나 미끄러져 내려가는 데 어려움이 있다. 또 눈이 완전히 녹았다가 기온이 떨어지면서 급격히 빙판이 될 경우 그대로 미끄러질 염려가 있다. 체육과학연구원 김광준 연구원은 “날씨가 너무 따뜻하면 설질이 안 좋아진다”며 “기온은 5℃에서 -5℃ 사이가 알맞다”고 말한다.
선수들이 중간 중간 자신의 스키와 보드를 매끄럽게 만드는 왁싱 작업을 하는 것도 온도나 설질 때문에 생긴 마찰력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스키를 너무 오래 탈 경우 스키 표면에 흡집이 생기면서 마찰력이 커진다. 체육과학연구원에 따르면 왁싱 방법에 따라 스키 속도가 시속 5km나 차이가 난다.
스키나 봅슬레이처럼 경사진 곳에서 내려오는 기록 종목은 경기력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고도다. 알파인 스키나 봅슬레이 종목에서는 어느 높이에서 경기를 진행하느냐에 따라 선수의 순간적인 근력과 심폐 기능이 좌우된다. 김광준 연구원은 “시합장소가 해수면 고도에 있을 때 선수 운동 능력이 최고지만 고도가 올라갈 때마다 운동 능력이 대폭 떨어진다”고 말한다.
일반 선수들은 고도가 1000m 올라갈 때마다 10%씩 심폐기능이 떨어진다. 특히 스타트를 할 때 최초 1, 2분간 순간적인 근력과 심폐 능력이 경기 결과를 좌우하는 봅슬레이의 경우 고도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충분한 적응훈련을 받은 엘리트급 선수들은 종목에 관계없이 고도 1500m까지는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알파인 스키 경기가 펼쳐질 휘슬러 크릭사이드의 경우 남녀 활강 같은 일부 스키 종목과 스노보드 종목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기가 고도 1000m 아래에서 치러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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