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기공학자다. 전기공학자라 하면 흔히 연구실에 앉아 설계도를 살펴보는 모습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 일터는 조금 더 거친 곳에 있다. 자동차 도로가 없어 말을 타고 이동해야 하는 오지나, 전쟁 중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거주지 근처로 폭탄이 떨어지는 지역이 내 활동 무대다. 초소형 수력발전소(소수력발전소)를 짓기 위해 해발 4000m에 위치한 네팔 무스탕 지역에 방문할 때는 처음 타는 말이 익숙하지 않아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다리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았다. 하지만 전기와 수도가 전혀 없는 그곳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한 3개월 동안 얻은 추억은 흉터만큼이나 오래 간직할 소중한 기억이 됐다.
연구실 밖으로 나온 전기공학자
유년 시절, 새로 산 컴퓨터를 분해했다가 그걸 재조립하느라 끙끙댄 기억이 있다. 호기심이 많아서 어떤 것이든 분해하고 조립하길 좋아하던 시기였다. 취미도 전자제품 만들기 키트를 구입해 납땜을 하며 라디오 등 간단한 전자제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전기·전자 분야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전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대다수는 전기를 어떻게 생산하고 전송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과정 속엔 전자기적인 물리현상부터 공학적인 실용 지식까지 융·복합적인 지식이 축적돼 있다. 여기에 호기심이 있던 나는 더 자세한 이론을 배워보기 위해 전기공학자의 길을 택했다.
전기공학자는 실험을 진행하다가 원하는 결괏값이 나오면 그때 자기만족과 큰 희열을 느낀다. 대부분 공학자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내 역할은 그 실험 결과를 현장에 적용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사용자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비로소 내가 한 연구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게 된다. 그 순간 느끼는 보람은 형용할 수 없다.
내 연구가 연구실 밖 세상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대학 시절 아이섹(AIESEC)이라는 국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부터다. 아이섹은 세계평화와 인간 잠재력의 실현이라는 비전 아래 청년들이 다문화 인턴십이나 글로벌 자원봉사 교류 등의 활동을 하는 학생 자치 단체다. 이곳에서 빈곤, 전쟁, 기후변화 등 국제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접했다.
그러던 2004년, 군 복무 대체 해외 봉사 제도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 국제협력요원에 합격해 활동을 시작했다. KOICA는 무상원조를 담당하는 외교부 산하 준정부기관이다. 당시 전기분야 봉사단원이었던 나는 네팔 카트만두대 전력전자 연구실에 2년간 파견됐다. 한국에서 전기는 마치 공기처럼 당연한 자원이다. 하지만 네팔에선 그렇지 않았다. 하루 12시간 이상 이어지는 정전을 수시로 경험했다.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전력 사정을 피부로 느꼈다. 당시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이런 전력 사정을 조금이나마 개선할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연구했다. 그 끝에 네팔의 전력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한 소수력발전소 연구를 네팔 수자원청(NHE)에 기술이전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때 한 경험은 한국인 최초로 유네스코(UNESCO) 몬디알로고 공학상을 수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유네스코 몬디알로고 공학상은 유네스코와 다임러크라이슬러가 제정한 상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학생들이 팀을 이뤄, 개발도상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혁신적인 기술적 해결책을 제안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 중 우수한 제안서에 상을 수여한다.
나는 네팔 트리부반대 학생들과 팀을 이뤄 ‘네팔의 새로운 초소형 수력발전시스템’이라는 제안서를 제출해 좋은 성과를 거뒀다. 시상식은 인도 뭄바이에서 개최됐는데, 미국 하버드대, 매사추세츠공대(MIT) 등 세계 유수의 명문대학에서 온 석박사 학생들이 다수 참여한 가운데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수상을 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꼈다. 당시 받은 우승상금 5000유로(당시 한화로 약 800만 원)는 ‘줌라’라는 네팔 시골 마을에 수력발전소 건립을 위한 기부금으로 사용했다. 마을주민들에게 전기가 공급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낀 큰 기쁨과 보람을 아직도 기억한다.
전기가 모두에게 가닿기를 꿈꾸며
네팔에서 지내는 동안 만난 비정부기구(NGO) 및 국제기구 사람들을 통해 개발협력이라는 분야를 새롭게 알게 됐다. 개발협력은 기술이나 정책 개발을 지원함으로써 개발도상국의 성장에 함께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이런 국가들과 장기적인 협력 관계를 쌓아나가는 일도 개발협력의 역할이다. 언뜻 보면 전기공학과 관련성이 낮아 보이는 분야다. 그러나 필자가 겪은 것처럼 아직 세계에는 전력 사정이 열악해 전기분야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 이 때문에 개발협력에서 에너지는 중요한 분야 중 하나로 여겨진다.
대학 졸업 후 추천을 받아 주네팔 한국대사관에서 잠시 근무한 이후, 희망하던 국제기구인 유엔개발계획(UNDP)에 채용됐다. 네팔은 세계 2위 수자원 보유국으로 주요 전력원은 수력발전이다. 한편, 산악지형 특성상 마을이 분산된 탓에 중앙전력망이 연결되지 못한 마을이 많다는 것도 특징이다.
나는 네팔에서 대표적인 전력보급 프로그램인 REDP (Rural Energy Development Program)을 담당했다. REDP는 UNDP 내에서도 성공적인 프로그램 중 하나로 꼽힌다. 네팔 바글룽 지역에서 시범사업으로 8기의 소수력발전소를 하나로 묶어 대용량 공업용 전력시설을 가동할 수 있도록 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를 이용해 지역 주민들의 소득을 높이는 사업도 내 임무였다.
UNDP에서 활동을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와 KOICA에 입사했다. 이번에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났다. 내가 몸담았던 아프가니스탄 지방재건팀(PRT)은 한국 민간, 군인, 경찰이 합동으로 전쟁이 끝난 후의 재건사업을 시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곳에서 나는 소규모 전력보급 사업, 시범농장 건립사업, 보건소, 학교 등 공공시설 지원을 담당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엔 외교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근무지가 주로 오지나 분쟁지역이다 보니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도 많다. 네팔에서 근무할 당시 한밤중에 지방으로 출장을 가다가 자동차 브레이크와 페달 연결 부위가 불에 타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산악지형이라 내리막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지역은 정부 반군 활동지역이었다. 동료들과 고민 끝에 임시방편으로 노끈으로 브레이크를 연결해 손으로 브레이크를 잡아가면서 밤새 운전한 끝에 그 지역을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폭탄이 거주지 인근에 떨어지는 위험한 상황을 겪었다. 한밤중에 몇 차례씩 방공호로 대피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기지 밖 사업 현장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방탄조끼를 입고 지뢰 방호 전차를 탄 뒤 군인들의 경호까지 받아가며 업무를 수행하는 일도 있었다.
다소 거친(?) 현장업무를 거쳐 현재는 KOICA 본부에서 에너지 분야 개발협력의 중기전략 수립, 기술 자문, 국내외 개발협력 네트워크 구축 등 에너지 분야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최근에는 KOICA 국제협력요원 시절 인연을 맺은 네팔 친구 라케스를 한국에서 다시 만난 일도 있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주관하는 외국인 초청연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으로 온 것이었다. 우리는 네팔에서 밤하늘 별을 보며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던 친구였다.
당시 라케스의 꿈은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근무하는 우주 공학자였다. 하지만 유학은커녕 공부를 이어가기에도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후 꿈을 이루기 위해 장학금을 받고 스위스 유학길에 올랐다고 했다. 박사학위를 받고, 돈을 벌어 네팔 최초의 민간 우주 연구소를 설립해 인공위성을 개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세계 인구 중 약 8억 명은 여전히 전기에 접근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전기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말은 곧 이들이 컴퓨터, 휴대폰은 물론이고 밤에 책을 읽을 전깃불 같은 기초적인 문명의 이기에서 소외된 채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안정적으로 전기에 접근할 수 있는 미래가 곧 오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라케스처럼 개발도상국가에 거주하는 모든 이가 희망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 그것이 내 꿈이다.
●나만의 과학동아 활용법
과학동아를 처음 접한 시기는?
초등학교 시절 백과사전과 함께 즐겨 보던 책이 과학동아였다. 삽화도 많고,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주제가 많아 시간이 있을 때마다 부담 없이 읽었다.
과학동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가 있다면?
초등학생 시절 과학동아에서 21세기엔 석유가 고갈되고 태양광과 수소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사를 접했을 땐 SF소설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과학동아 기사에서 다뤘던 주제들이 현실이 되는 것이 신기하다.
과학동아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자칫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과학이란 주제에 대해서 이론과 현상을 쉽게 설명해줘 오랜 시간 동안 과학에 흥미를 잃지 않게 해줬다. 보이지 않는 물리 현상에 대한 지식을 배양할 수 있었던 것은 덤이다.
국제협력기구에서 일하는 에너지전문가를 꿈꾸는 독자들에게 한마디.
지구촌 곳곳에는 경제발전에서 소외된 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엔지니어는 첨단기술 외에도 이런 소외된 곳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정기술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KOICA에서는 오늘도 혁신기술로 지구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들도 해외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국제이슈에 관심을 가지며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갖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