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예로부터 호랑이가 많이 산다 해서‘호랑이의 나라’로 불렸다. 선사시대 생활 풍습이 담겨 있는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는 함정에 빠진 호랑이, 새끼를 밴 호랑이 등 총 14마리의 호랑이가 등장한다. 호랑이는 그만큼 많았고 우리 조상들에게 친숙한 동물이었다.
한반도에 호랑이가 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최근 유전학과 화석 연구의 결과에 따르면 호랑이가 공통 조상으로부터 현재와 같은 종으로 분화된 시기는 200만 년 전이다.
호랑이는 인도차이나 북부와 중국 남부지역에서 발생해서 동서양의 무역길인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에 도달했다. 이어 몽골 북쪽의 삼림지역을 거쳐 현재의 러시아 아무르지역과 중국 동북지역에 진출하면서 한반도에 정착했다. 한반도에 호랑이가 살기 시작한 시기는 1만 년 전~9000년 전쯤. 마지막 빙하가 물러나면서 신석기 시대로 접어드는 무렵이다.
역사가들은 “한반도에서 호랑이와 사람은 수천 년 동안 생태적 균형을 이루며 비교적 평화로운 공생관계를 유지했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교원대 김동진 교수는 “농경지가 늘어나면서 호랑이의 서식지가 감소해 가끔 호랑이가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곤 했지만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까지는 호랑이를 살상하거나 포획하려고 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는 두 시기가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세계관을 따랐기 때문.
그러나 14세기 무렵 조선에서는 백성의 생명을 보호하고 농경지를 개간한다며 호랑이를 잡는 포호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백성을 위해 해를 없앤다’는 의미의 ‘위민제해’ 논리에 따라 민족의 영물로 여겨졌던 호랑이를 흉악한 짐승인 ‘악수(惡獸)’로 규정했다.
이 같은 ‘호랑이 몰아내기 운동’으로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서식하던 호랑이의 개체 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이어 일제가 ‘해로운 동물을 몰아낸다’는 해수구제정책을 대대적으로 전개해 1927년 경주 대덕산에서 마지막 호랑이가 잡힌 이래로 남한 지역에서 호랑이는 종적을 감추게 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1987년 자강도에서 포획된 수컷 호랑이가 마지막이었다.
야생호랑이 복원, 그 가능성은
그렇다면 한반도에 야생호랑이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서울대 수의학과 이항 교수는 “남한에서 야생호랑이가 살아남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백두산과 중국, 러시아, 북한의 접경지역에는 호랑이가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유는 북한과 접경한 러시아 연해주지역에 아직도 어느 정도 안정된 호랑이 개체군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 현재 극동러시아 지역 전체에 약 400~500마리의 호랑이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남서연해주지역에도 10여 마리의 호랑이와 30마리 정도의 표범이 살고 있다.
더 나아가 16년 동안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찾아다닌 한국호랑이보호협회의 임순남 소장은 “최소한 10여 마리의 호랑이가 남한에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998년에 호랑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을 발견하고 이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유엔 주최의 한 환경 워크숍에서 발표해 현지 언론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외부에서 새로운 개체들이 유입되지 않는 한 한두 마리, 또는 서너 마리로 이뤄진 호랑이 개체군이 독자적으로 생존해 나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극도로 작은 수의 개체군은 불안정한 상태이고, 근친교배로 인해 건강한 자손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설사 남한에 호랑이가 살아 있다고 해도 이동경로가 휴전선에 막힌 이상 자력으로 살아갈 방도가 없는 셈이다.
그런데 국내의 한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실제로 호랑이를 데려와 제한 구역 내에 방사하려는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 경기 연천군이 러시아에서 백두산 호랑이와 같은 종인 아무르호랑이를 들여와 군내 고대산 특구에 마련한 호랑이 자연 적응장에서 야생상태로 사육하려는 방안이 그것. 연천군은 1만 500m2 면적에 전기 철조망과 이중 펜스를 설치해 아무르호랑이 6마리를 사육하고, 개체 수가 늘면 단계적으로 보호지구를 66만m2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 정도면 상암월드컵경기장이 11개가 넘게 들어갈 수 있는 크기다. 면적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자연 적응장을 비무장지대(DMZ)로 연결해 확대해 나간다고 한다.
연천군과 함께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임순남 소장은 자연 적응장에 대해 “자연경관이 수려해 동물이 지내기에 좋고 지역 마을과는 1km 정도 떨어져 있어 안전에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특구 내에는 DMZ 생태 관련 전시시설을 마련하고, 자연 적응장에서 살고 있는 호랑이를 관람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자연 적응장은 사파리의 개념은 아니고 동물원보다는 훨씬 자연적이고 넓은 사육장”이라고 소개했다.
남은 문제는 언제 호랑이를 데려올 수 있느냐는 것. 야생호랑이로부터 잡은 2세대 호랑이를 얻기 위해 연천군과 임 소장은 러시아와 아직 의견을 조율하는 중이다.
사육동물의 근친교배도 큰 문제
하지만 이 자연 사육장을 대하는 일부 전문가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우선 동물생태학자들은 좁은 면적을 지적한다. 다 자란 아무르호랑이 수컷의 활동 범위는 400km2나 되는데, 연천군 보호지는 최대 0.66km2(66만m2)에 불과해 동물원 사육장과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먹이도 문제다. 이항 교수는 “호랑이가 주로 먹는 먹이는 멧돼지나 붉은사슴처럼 몸집이 큰 동물들이지만 DMZ에는 그만한 크기의 동물이 거의 없다”며 “거의 모든 먹이를 사람이 공급해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야생동물 전문가인 최현명 씨는 안전상의 이유로 DMZ에 호랑이를 방사하는 계획을 반대한다. 최 씨는 “DMZ는 정치적인 문제로 그동안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은 지역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 막연히 생물 종이 풍부한 자연상태라고 볼 수 없다”며 “그곳에 호랑이를 넣겠다는 건 호랑이에게 지뢰탐지를 시키겠다는 것일 뿐”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어서 그는 “야생동물들은 포획하는 과정에서 마취 총에 죽는 경우가 많다”며 “잘 살고 있는 야생동물을 억지로 데려오려는 발상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자연 상태와 가장 가까운 동물원’이라는 개념은 어떨까. 호랑이로서는 시멘트 바닥과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동물원에서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임 소장의 의도대로 비록 본래의 활동반경만큼의 거대한 서식지를 제공할 순 없지만 호랑이들이 인공적인 손길에서 벗어나 환경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기대할 순 있다. 또 점차 개체 수도 늘어갈 것이다.
하지만 한국야생동물유전자원은행장이기도 한 이항 교수는 “동물원 또는 사육장에 키우는 호랑이의 수를 늘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동물원에서 호랑이만큼 번식이 잘되는 동물도 없다. 오히려 좁은 공간 안에서 근친 번식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전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미국에서는 SSP(Species Survival Plan)라는 번식 프로그램으로 전국 모든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의 가족계획을 한다”며 “우리도 사육 동물들의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하는 방식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세기 동안 3개 아종 멸종
세계야생동물보호기금(WWF)의 보고에 따르면 야생호랑이는 전 세계적으로 3200마리가 남아 있다. 지난 세기 동안 호랑이 9개 아종 중에서 3개 아종이 멸종했다. 멸종한 종류는 발리호랑이, 카스피호랑이, 자바호랑이며, 현재 남중국호랑이도 멸종한 게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이에 미국 야생동물보존협회(WCS)와 WWF와 같은 야생동물 보존 민간단체들뿐만 아니라 국가차원에서는 영국, 미국, 네덜란드가 러시아와 아시아 지역에 남아 있는 야생호랑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무르호랑이는 한국이나 중국에서처럼 20세기 초에 러시아에서도 극심한 사냥과 밀렵에 시달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쯤에는 극동러시아 전 지역을 통틀어 약 50마리만 남아 있었다. 이에 당시 소련 정부는 호랑이 사냥을 전면적으로 금지시키고 호랑이의 주요 먹잇감인 멧돼지와 사슴의 사냥도 제한적으로만 허용했다. 엄격한 보호조치는 성과가 좋았다. 세계의 다른 지역 호랑이는 모두 감소하고 있을 때 극동러시아의 호랑이만 번성하게 됐다.
하지만 1990년대 초에 소련이 붕괴하면서 중국과의 국경이 열리자 또 다시 밀렵이 성행했다. 중국에서는 호랑이를 한약재로 쓰거나 가죽을 벗겨 장식품으로 판매한다. 1990년대에 매년 약 70마리의 호랑이가 밀렵으로 희생됐다. 현재는 민간단체들과 정부의 보호로 400~500마리 정도의 호랑이가 비교적 안정적 개체군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곳의 미래도 그리 밝지만은 않다. 이항 교수는 “밀렵이 줄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목재회사들이 나무를 베어내 숲이 줄어들었다”며 “베어낸 나무를 운반하기 위해 길을 만들고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밀렵꾼들이 더욱 쉽게 숲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자주 발생하는 산불과, 밀렵꾼들이 호랑이의 먹잇감을 사냥하는 문제도 심각하다.
다행히 네팔의 벵갈호랑이 서식지도 서서히 회생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지난 10월 네팔 정부는 바르디아국립공원의 호랑이 서식지가 900km2로 늘었다고 발표했다. 밀렵을 막고 번식을 늘린 결과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역은 WWF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인 벌채와 대규모 산업농장의 건설로 인해 호랑이 서식지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수마트라호랑이는 열대우림지역 중에서도 저지대에 살고 있는데, 목재회사들은 이곳의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들고 있다. WWF는 최근 수마트라 정부와 호랑이의 주요 서식지 지역을 보존하자는 조약을 맺었다. 이외에도 야생동물보존단체들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는 동히말라야와 캄보디아의 메콩 지역을 보호하고 있다.
생태학자들은 “건강한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호랑이나 늑대, 표범 같은 최상위 포식자들이 숲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비록 이들이 아직까지는 사람들에게 동물원에나 가둬야 하는 야수로 인식되고 있지만 말이다. 야생동물과 사람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제껏 지상 최고의 제왕으로 군림해 온 우리의 태도를 반성한다면 답은 금세 나온다.
한반도에 다시 야생호랑이가 뛰어다닐 방법은 없을까. 지난 12월 15일 ‘2010년 호랑이의 해’를 축하하며 열린 한 국제학술대회에서 야생동물보존협회 러시아 지부장인 데일 미켈 박사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미켈 박사는 “가장 현실적이고 좋은 방법은 극동러시아와 연해주에 사는 호랑이의 개체 수가 늘어 자연스럽게 한반도까지 서서히 퍼져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그렇게 하면 숲에 호랑이가 산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놀라거나 저항하는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항 교수도 “현재는 극동러시아라고 부르는 이 지역이 사실은 고구려와 발해, 즉 우리 땅이었듯이 그곳에 살고 있는 호랑이들도 우리 호랑이”라며 “우리도 더 넓은 시선으로 극동러시아에 있는 호랑이를 보호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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