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말 조선시대 의학서적인 ‘동의보감(東醫寶鑑)’ 초간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의서로서는 세계 최초이다. 이로써 한국은 1997년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 2001년 직지심체요절과 승정원일기,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 2007년 조선왕조의궤에 이어 모두 7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이번에 등재가 결정된 동의보감은 1613년 초판본이다. 편찬 총책임자인 허준(許浚 : 1539~ 1615년)이 직접 간행에 참여해 완성한 이 초판 완질 어제본(御製本)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돼 있다.
유네스코가 동의보감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까닭은 동의보감이 역사적 진정성, 기록정보성, 독창성, 세계사적 가치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허준의 업적과 문화적 영향력을 인정받은 부분도 크다. 요컨대 동의보감이 동양의학 주요 의서를 집대성해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현재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 높게 평가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동의보감에서 설명하고 있는 전통적인 한의학이란 어떤 것일까? 한편으로는 한의학을 비과학적인 의학이라 여기는 시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보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는 무엇일까? 동의보감이 담고 있는 내용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가치를 어떠한 잣대로 평가할 것인지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주제다. 서양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과 동일한 기준으로 한의학을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과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할 때 그 밑바탕에서 철학과 긴밀하게 관련된다. 따라서 특정 시기의 과학의 실체를 파악할 때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철학을 이해하는 게 우선이다.
총 25권의 백과사전식 구성
동의보감은 허준이 선조(1552~1608년 재위)의 명을 받아 동아시아 의학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백과사전식 의학서적이다. 분량도 방대해 내경(內景)편, 외형(外形)편, 잡병(雜病)편, 탕액(湯液)편, 침구(鍼灸)편의 5편으로 구성됐다.
내경편은 4권으로 이뤄졌다. 주로 오장육부의 생리적 기능과 그에 해당하는 질병을 설명하고 있다. 외형편도 4권으로 몸 겉면에 생기는 병, 이비인후과, 안과 질병을 기술했다.
잡병편은 11권이다. 여기서는 질병 진찰법과 병의 원인 그리고 내경편과 외형편에서 취급하지 않은 여러 가지 내과적 질병에 대한 증상과 치료법, 처방을 다뤘다. 부인과 질병, 소아과 질병을 따로 구성한 점이 눈에 띈다.
탕액편은 세 권인데 당시 흔히 쓰이던 한약재 1400여 종의 효능, 적응증(適應症 : 약제나 수술로 치료효과가 기대되는 질환이나 증상), 채취법, 가공방법을 설명하고, 산지(産地)를 밝혔으며 한자 이름 밑에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을 우리말로 적어놓았다.
침구편은 한 권인데 여기서는 침·뜸법과 혈(穴)의 위치, 적응증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 목차 두 권을 합해 동의보감은 총 25권이다.
백성을 구제하려 편찬
허준이 활동하던 16~17세기는 조선에 이상 기후 현상이 나타난 시기다. 그로 인해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만연하고 사망자 수가 급증했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유랑민이 증가하고 역병이 창궐했다. 특히 부녀자와 어린아이의 죽음은 인구 감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급격한 인구의 감소가 국가의 존립 근거를 위협한다고 판단한 조정에서는 백성을 치료할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했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편찬하기 이전에 ‘두창집요(痘瘡集要)’라는 의서를 한글로 번역해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를 저술했는데 이 의서의 발문에 편찬의도가 드러나 있다. 다음 발문을 참고하면, 동의보감 편찬의 첫 번째 목적도 백성의 병을 치료해 인구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의보감 편찬의 두 번째 목적은 동아시아의 의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이를 한국적으로 재창조하는 데 있다. 허준이 의원으로 활동한 선조 시대에는 이미 중국의 의서가 다수 수입돼 있었다. 그러나 이 의서들이 정리되지 못한 상황이어서 실질적으로 활용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따라서 선조는 이 의서들을 체계화해 질병 치료에 유용하게 활용하고자 했다. 동의보감 서문에 따르면 선조는 허준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이 서문에서 드러나듯이 동의보감 편찬의 세 번째 목적은 우리나라의 약재를 뜻하는 향약(鄕藥) 활용을 체계화하고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선조 시대에는 중국 의서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의서도 많았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의학계에서 사용하는 주된 약재는 중국의 것으로 비쌌다. 또한 처방전이 지나치게 복잡했다. 따라서 백성들이 병을 치료할 만한 실질적인 방법은 거의 없어, 백성들은 민간요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서는 세종(1418~1450년 재위) 때 편찬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나 ‘의방유취(醫方類聚)’, 선조 때 편찬된 ‘의림촬요(醫林撮要)’의 전통을 이어받아 향약의 활용방법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동의보감이 편찬된 것이다.
음양오행에 따른 ‘정→기→신’의 철학
전통 한의학은 동양철학의 세계 인식방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동양철학의 세계관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한의학 역시 인체의 구조와 기능이 하늘과 땅을 본받아 이뤄졌다는 천인상응이론(天人相應理論)을 따른다. 또한 인체를 소우주로 보기 때문에 우주 운행원리인 음양을 중심으로 한 음양오행설을 핵심원리로 삼는다. 한의학의 자연관과 인체의 생리·병리에 대한 원리, 진단·치료·약물에 대한 이론은 모두가 이 음양오행으로 설명된다. 동의보감 역시 천지상응이론과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의서이다.
동의보감의 또 다른 원리는 인간의 생명활동이 ‘정(精)→기(氣)→신(神)’의 과정을 거쳐 이뤄진다는 것이다. 유불선 삼교의 사상에 기반한 이 원리는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한 의원들의 학문적 경향이나 허준의 인간관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한 대표적인 의원은 유학자 출신 의원인 정작과 임금의 병을 치료하던 양예수이다. 정작은 유학자이면서 도교에도 깊은 소양이 있었으며, 허준의 스승이기도 한 양예수는 도가적 경향의 의학을 표방했다.
16~17세기 조선에서는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논하는 철학이 정교하게 이론화되고 있었는데 성리학자들은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궁극적으로 몸까지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양심(養心)을 통해 양육(養育)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허준은 양육을 통해 양심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정→기→신’의 과정이다. 심신의 건강함을 통해 바람직한 삶을 영위하겠다는 궁극적 지향점은 유학자들과 같지만 도달하는 과정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정·기·신론(論)은 현대의학에서 육체적 질병을 정신적 원인과 연관지어 연구하고 치료하는 정신신체의학(精神身體醫學)과 같다. 즉 의술의 본질이 정신수양과 섭생에 있고 약물과 치료는 이차적이라는 이론이다. 동의보감 서문에도 드러나는 이 관점은 책 전편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적 의미의 예방의학과도 상통한다. 17세기 초에 이미 현대의학에 필적할 만한 이론과 치료법을 확립했다는 점은 동의보감의 선구적인 면모를 증명하고 있다.
과학적 저술방식과 허준의 자부심
동의보감은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인정받는 한의학 서적이다. 질병의 원인과 진단, 치료약의 채취와 가공, 약물의 처방법, 침과 뜸에 관한 광범위한 지식이 제시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 저술 태도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우선 동의보감은 옛 의서를 고증할 때 인용한 학설이나 처방의 출처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허준 스스로가 자신의 처방이 독단적이지 않다는 점을 밝혀 신뢰성을 높였다. 이런 태도는 과학으로서 의학이 지향해야 할 점이다. 동의보감의 이 서술 태도는 후대의 의학도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추가 연구의 가능성까지 제시했다.
둘째 동의보감은 중국의 의학서에 등장하는 약재의 효능과 향약의 효능을 비교, 대조하는 검증작업을 거침으로써 치밀하고 정확한 의술을 구사하는 데 기여했다. 동의보감은 일본과 중국 등지에도 전해져 동아시아의 전통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셋째 고서에 표기된 처방약의 용량을 경험에 근거해 수정했다. 중국 고서에 표시된 약의 용량은 너무 많아 우리 체질에 적당치 않았다. 허준은 오랜 임상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처방약의 표준 용량을 만들어 상황에 따라 가감하게 했으며 그 복용 방법을 제시했다.
허준은 동의보감의 편찬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허준은 중국의 의학을 ‘남의(南醫)’와 ‘북의(北醫)’로 나눈 후 우리나라의 의학을 ‘동의(東醫)’라고 정의했다. 구석진 동방의 의학이라고 표현한 듯하나 여기에는 우리 의학이 중국의 의학과 나란히 어깨를 견줄 만한 전통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되살아나는 동의보감의 가치
예전이나 요즘이나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허준이 살았던 17세기에도 어려운 처방전과 비싼 약재들 때문에 백성들은 치료받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허준은 필생의 역작인 동의보감을 편찬해냈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약재와 치료기술을 다뤄 열악한 의료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의료 대중화에 기여했다. 또 단순히 치료법에만 매달리지 않고 오늘날의 예방의학에 해당하는 양생 개념과 정신신체의학을 고안해 한의학을 선진화했다. 허준이 17세기에 세운 한의학 전통은 한국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한의학을 비과학적인 의학으로 보는 인식과 그 반대 의견의 마찰은 종종 있어 왔다. ‘건강의 유지와 질병의 예방’이라는 의학의 본질적 목표를 고려한다면, 화학약품을 통해 질병을 인위적으로 제거하고 외과적 수술로 상처를 도려내는 서양의학보다 신체의 균형과 기의 소통을 강조하는 한의학의 전통이 더 과학적인 것일 수도 있다. 다만 한의학이 서양의학의 대체의학이 아닌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과학화와 표준화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 등재가 결정된 동의보감은 1613년 초판본이다. 편찬 총책임자인 허준(許浚 : 1539~ 1615년)이 직접 간행에 참여해 완성한 이 초판 완질 어제본(御製本)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돼 있다.
유네스코가 동의보감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까닭은 동의보감이 역사적 진정성, 기록정보성, 독창성, 세계사적 가치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허준의 업적과 문화적 영향력을 인정받은 부분도 크다. 요컨대 동의보감이 동양의학 주요 의서를 집대성해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현재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 높게 평가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동의보감에서 설명하고 있는 전통적인 한의학이란 어떤 것일까? 한편으로는 한의학을 비과학적인 의학이라 여기는 시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보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는 무엇일까? 동의보감이 담고 있는 내용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가치를 어떠한 잣대로 평가할 것인지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주제다. 서양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과 동일한 기준으로 한의학을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과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할 때 그 밑바탕에서 철학과 긴밀하게 관련된다. 따라서 특정 시기의 과학의 실체를 파악할 때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철학을 이해하는 게 우선이다.
동의보감은 허준이 선조(1552~1608년 재위)의 명을 받아 동아시아 의학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백과사전식 의학서적이다. 분량도 방대해 내경(內景)편, 외형(外形)편, 잡병(雜病)편, 탕액(湯液)편, 침구(鍼灸)편의 5편으로 구성됐다.
내경편은 4권으로 이뤄졌다. 주로 오장육부의 생리적 기능과 그에 해당하는 질병을 설명하고 있다. 외형편도 4권으로 몸 겉면에 생기는 병, 이비인후과, 안과 질병을 기술했다.
잡병편은 11권이다. 여기서는 질병 진찰법과 병의 원인 그리고 내경편과 외형편에서 취급하지 않은 여러 가지 내과적 질병에 대한 증상과 치료법, 처방을 다뤘다. 부인과 질병, 소아과 질병을 따로 구성한 점이 눈에 띈다.
탕액편은 세 권인데 당시 흔히 쓰이던 한약재 1400여 종의 효능, 적응증(適應症 : 약제나 수술로 치료효과가 기대되는 질환이나 증상), 채취법, 가공방법을 설명하고, 산지(産地)를 밝혔으며 한자 이름 밑에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을 우리말로 적어놓았다.
침구편은 한 권인데 여기서는 침·뜸법과 혈(穴)의 위치, 적응증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 목차 두 권을 합해 동의보감은 총 25권이다.
백성을 구제하려 편찬
허준이 활동하던 16~17세기는 조선에 이상 기후 현상이 나타난 시기다. 그로 인해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만연하고 사망자 수가 급증했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유랑민이 증가하고 역병이 창궐했다. 특히 부녀자와 어린아이의 죽음은 인구 감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급격한 인구의 감소가 국가의 존립 근거를 위협한다고 판단한 조정에서는 백성을 치료할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했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편찬하기 이전에 ‘두창집요(痘瘡集要)’라는 의서를 한글로 번역해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를 저술했는데 이 의서의 발문에 편찬의도가 드러나 있다. 다음 발문을 참고하면, 동의보감 편찬의 첫 번째 목적도 백성의 병을 치료해 인구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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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편찬의 두 번째 목적은 동아시아의 의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이를 한국적으로 재창조하는 데 있다. 허준이 의원으로 활동한 선조 시대에는 이미 중국의 의서가 다수 수입돼 있었다. 그러나 이 의서들이 정리되지 못한 상황이어서 실질적으로 활용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따라서 선조는 이 의서들을 체계화해 질병 치료에 유용하게 활용하고자 했다. 동의보감 서문에 따르면 선조는 허준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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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문에서 드러나듯이 동의보감 편찬의 세 번째 목적은 우리나라의 약재를 뜻하는 향약(鄕藥) 활용을 체계화하고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선조 시대에는 중국 의서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의서도 많았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의학계에서 사용하는 주된 약재는 중국의 것으로 비쌌다. 또한 처방전이 지나치게 복잡했다. 따라서 백성들이 병을 치료할 만한 실질적인 방법은 거의 없어, 백성들은 민간요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서는 세종(1418~1450년 재위) 때 편찬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나 ‘의방유취(醫方類聚)’, 선조 때 편찬된 ‘의림촬요(醫林撮要)’의 전통을 이어받아 향약의 활용방법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동의보감이 편찬된 것이다.
전통 한의학은 동양철학의 세계 인식방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동양철학의 세계관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한의학 역시 인체의 구조와 기능이 하늘과 땅을 본받아 이뤄졌다는 천인상응이론(天人相應理論)을 따른다. 또한 인체를 소우주로 보기 때문에 우주 운행원리인 음양을 중심으로 한 음양오행설을 핵심원리로 삼는다. 한의학의 자연관과 인체의 생리·병리에 대한 원리, 진단·치료·약물에 대한 이론은 모두가 이 음양오행으로 설명된다. 동의보감 역시 천지상응이론과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의서이다.
동의보감의 또 다른 원리는 인간의 생명활동이 ‘정(精)→기(氣)→신(神)’의 과정을 거쳐 이뤄진다는 것이다. 유불선 삼교의 사상에 기반한 이 원리는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한 의원들의 학문적 경향이나 허준의 인간관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의보감 편찬에 참여한 대표적인 의원은 유학자 출신 의원인 정작과 임금의 병을 치료하던 양예수이다. 정작은 유학자이면서 도교에도 깊은 소양이 있었으며, 허준의 스승이기도 한 양예수는 도가적 경향의 의학을 표방했다.
16~17세기 조선에서는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논하는 철학이 정교하게 이론화되고 있었는데 성리학자들은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궁극적으로 몸까지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양심(養心)을 통해 양육(養育)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허준은 양육을 통해 양심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정→기→신’의 과정이다. 심신의 건강함을 통해 바람직한 삶을 영위하겠다는 궁극적 지향점은 유학자들과 같지만 도달하는 과정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정·기·신론(論)은 현대의학에서 육체적 질병을 정신적 원인과 연관지어 연구하고 치료하는 정신신체의학(精神身體醫學)과 같다. 즉 의술의 본질이 정신수양과 섭생에 있고 약물과 치료는 이차적이라는 이론이다. 동의보감 서문에도 드러나는 이 관점은 책 전편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적 의미의 예방의학과도 상통한다. 17세기 초에 이미 현대의학에 필적할 만한 이론과 치료법을 확립했다는 점은 동의보감의 선구적인 면모를 증명하고 있다.
과학적 저술방식과 허준의 자부심
동의보감은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인정받는 한의학 서적이다. 질병의 원인과 진단, 치료약의 채취와 가공, 약물의 처방법, 침과 뜸에 관한 광범위한 지식이 제시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 저술 태도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우선 동의보감은 옛 의서를 고증할 때 인용한 학설이나 처방의 출처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허준 스스로가 자신의 처방이 독단적이지 않다는 점을 밝혀 신뢰성을 높였다. 이런 태도는 과학으로서 의학이 지향해야 할 점이다. 동의보감의 이 서술 태도는 후대의 의학도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추가 연구의 가능성까지 제시했다.
둘째 동의보감은 중국의 의학서에 등장하는 약재의 효능과 향약의 효능을 비교, 대조하는 검증작업을 거침으로써 치밀하고 정확한 의술을 구사하는 데 기여했다. 동의보감은 일본과 중국 등지에도 전해져 동아시아의 전통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셋째 고서에 표기된 처방약의 용량을 경험에 근거해 수정했다. 중국 고서에 표시된 약의 용량은 너무 많아 우리 체질에 적당치 않았다. 허준은 오랜 임상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처방약의 표준 용량을 만들어 상황에 따라 가감하게 했으며 그 복용 방법을 제시했다.
허준은 동의보감의 편찬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허준은 중국의 의학을 ‘남의(南醫)’와 ‘북의(北醫)’로 나눈 후 우리나라의 의학을 ‘동의(東醫)’라고 정의했다. 구석진 동방의 의학이라고 표현한 듯하나 여기에는 우리 의학이 중국의 의학과 나란히 어깨를 견줄 만한 전통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되살아나는 동의보감의 가치
예전이나 요즘이나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허준이 살았던 17세기에도 어려운 처방전과 비싼 약재들 때문에 백성들은 치료받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허준은 필생의 역작인 동의보감을 편찬해냈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약재와 치료기술을 다뤄 열악한 의료 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의료 대중화에 기여했다. 또 단순히 치료법에만 매달리지 않고 오늘날의 예방의학에 해당하는 양생 개념과 정신신체의학을 고안해 한의학을 선진화했다. 허준이 17세기에 세운 한의학 전통은 한국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한의학을 비과학적인 의학으로 보는 인식과 그 반대 의견의 마찰은 종종 있어 왔다. ‘건강의 유지와 질병의 예방’이라는 의학의 본질적 목표를 고려한다면, 화학약품을 통해 질병을 인위적으로 제거하고 외과적 수술로 상처를 도려내는 서양의학보다 신체의 균형과 기의 소통을 강조하는 한의학의 전통이 더 과학적인 것일 수도 있다. 다만 한의학이 서양의학의 대체의학이 아닌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과학화와 표준화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