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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의 필기노트, 죽간과 목간

나무 껍질에 기록된 최초의 불경

종이가 개발되기 전에는 어디에 문자를 기록했을까. 옛 사람의 지혜는 죽간과 목간이라는 훌륭한 기록매체를 발명했다. 대나무나 나무 껍질을 얇게 쪼개 그 위에 문자를 새긴 것이다. 중요한 정보의 기록 외에 연습장, 물건의 꼬리표 등 다양하게 쓰인 죽간과 목간을 알아보자.

후난성 서부의 룽산현 리에에서 기원전 3세기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죽간(竹簡) 2만여점이 발굴됐다. 이번 발굴은 진시황릉의 병마용(兵馬俑) 출토에 버금가는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된다.’

지난 7월 15일 홍콩의 한 신문에 실린 기사다. 죽간이 무엇이기에 수천명의 실물크기 병사와 말을 흙으로 구워 만든 병마용의 발굴에 버금간다고 비유할까. 죽간으로 잠겨진 비밀의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보자.

책(册)의 어원이 된 죽간

인류가 문명생활로 접어들 수 있게 된 계기는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말이 아닌 문자라는 간접방법을 찾아내면서부터일 것이다. 알고 있는 지식을 문자로 기록해 보존하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기록할 수 있는 재료가 필요했다. 인류는 구석기 시대부터 그림으로 문자를 표현해 왔다. 처음에는 동물의 가죽이나 뼈, 도자기, 점토판 등을 사용했으나 불편하고 번거로웠다. 차츰 좀더 구하기 쉽고 간편한 재료를 찾게 됐으며, 나무는 고대인의 이런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류는 나무 자체보다 나무껍질에 관심을 갖게 됐다. 특히 표면이 하얗고 매끄러운 자작나무 종류는 그림을 그리고 글자도 쓰는 새로운 재료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작나무는 추운 지방에서만 구할 수 있었고 생산량도 적어 사람들은 다른 나무 재료를 찾았다.

곧 값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고 글자를 새기기에 적당한 재료로 종려나무 잎사귀가 주목받았다. 이들은 나란한 잎맥을 가졌으며 수분이 적고 두꺼우며 마르면 단단해진다. 이 중 인도에서 자라는 종려나무의 한 종류인 다라수(多羅樹)는 기원전 6세기경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그 제자들이 생전에 설교한 내용을 이 나뭇잎에다 새기면서 널리 알려졌다. 말려서 일정한 규격으로 자른 다음, 칼이나 송곳으로 글자를 새기고 먹을 넣었다. 양쪽에 구멍을 뚫어 실로 수십장씩 꿰어 묶었다. 이것이 최초의 불교 경전인 패엽경이다.

이렇게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재료를 찾아 고심하던 사람들은 나무껍질이나 잎과는 비교할 수 없이 편리한 죽간을 발명하기에 이른다. 죽간이란 대나무 죽(竹)에다 편지, 문서 따위를 뜻하는 간(簡)을 합친 말로 글자가 쓰인 대나무 조각을 일컫는다. 즉 대나무의 마디를 잘라낸 다음, 마디 사이의 부분을 세로로 쪼개고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얇은 판을 말한다. 모양은 오늘날의 책갈피 두세개쯤을 이어 놓은 형태다. 사용목적에 따라 여러가지 크기로 만들었으나 대체로 세로 20-25cm, 너비 2-4cm에 부러지지 않을 만큼의 두께로 만든다. 이 위에 붓으로 글자를 쓰거나 칼로 새기고 먹물을 넣으면 완성된다.

대나무는 열대에서 온대지방까지 비교적 널리 자라고 칼로 얇게 쪼갤 수 있다. 또 표면이 단단하고 매끄러워 죽간과 같은 얇은 판을 얻기가 다른 어떤 나무보다 쉽고 효율적이다. 굵은 대나무라면 글자를 세로로 두세줄 써넣을 수 있을 만큼 제법 넓은 판도 얻을 수도 있다. ‘논어’에는 공자가 하도 ‘책’을 많이 읽어 가죽끈이 세번이나 끊어졌다는 구절이 있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니 이 ‘책’은 아마 죽간일 것이다. 그래서 한자어 ‘책’(冊)은 여러 개의 죽간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이은 모양을 본 따 만들어졌다.
 

인류의 기록매체 중 하나였 던 종려나무의 모습. 종려나 무 잎사귀는 나란한 잎맥과 적은 수분에 두껍기까지 해 죽간과 목간 이전에 글자를 새기기에 적당했다.


유럽 탐사단이 먼저 발굴

한편 나무로 만든 기록매체에는 죽간 이외에도 목간(木簡)이 있다. 죽간이 만들기 쉽고 편리하나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에서는 재료 자체를 구하기 어렵다. 이리저리 궁리를 해본 사람들은 주위에 흔한 보통 나무를 얇게 켜거나 쪼개 죽간처럼 만들 아이디어를 냈다. 나무로 만들었으니 이름은 당연히 목간이다. 죽간보다 더 넓은 판을 얻을 수 있어 편리하나 두께를 얇게 하기가 어려우며 무거운 단점이 있다.

목간을 만드는 나무의 종류는 일정하지 않고 여러가지다. 소나무를 비롯해 밤나무, 참나무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를 흔히 사용했다. 목간을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 첫째는 큰 나무를 얇게 켜서 넓은 판자를 만들고 표면을 대패로 다듬은 뒤, 필요한 크기만큼 잘라내 쓰는 방식이다. 주로 소나무와 같은 바늘잎 나무로 만들며 많은 양이 한꺼번에 필요할 경우 이 방법을 썼다. 이에 비해 몇개만 만들거나 중요성이 떨어질 때는 나뭇가지나 작은 나무를 잘라 칼이나 낫으로 껍질을 벗겨내고 표면을 적당히 다듬어 목간을 만드는 방법을 사용했다.

옛 사람이 쓴 죽간과 목간의 실물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세기 초 동양의 유물을 탐내던 유럽의 고고유물탐사단이 중국에 들어와 여러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목간은 비로소 햇빛을 보게 된다. 한나라 때의 러우란유적(樓蘭遺蹟)에서 처음 목간이 발굴됐고, 이어 출토된 쥐옌한간(居延漢簡)은 그 다양한 내용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이번에 발굴된 진나라 죽간을 포함해 중국에서는 수십만점의 죽간과 목간이 출토돼 옛 영광을 엿보기에 모자람이 없다. 일본도 1961년 고대왕국의 수도였던 나라(奈良) 부근의 궁궐터에서 41점의 목간이 발굴된 것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거의 20만점에 가깝게 출토됐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늦은 1975년 경주 안압지를 준설하는 과정에서 51점의 목간이 찾아진 것이 처음이다. 그 후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 발굴된 27점을 비롯해 부여 능산리 유적 터에서 23점, 경기 하남 이성산성 등 지금까지 1백50여점 정도가 발견됐다. 전부 목간이고 죽간은 없다. 우리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목간의 양이 이렇게 적은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나무유물이 썩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는 저습지가 많지 않은 것도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죽간과 목간은 20세기 들 어서야 발굴되기 시작했다. 중 국의 경우 20세기 초 유럽탐 사단에 의해 처음 발견됐고, 우리나라의 경우 1975년 경 주에서 처음 발굴됐다.


목간 연습장 지우개는 낫

죽간이 발달하면서 세로로 내려 쓴 글자판을 여러 장 이어 끈으로 묶으면, 비록 글자 수는 적지만 책으로서의 기능에 부족함은 없었다. 그래서 죽간은 알고 있는 지식을 서로 교환하고 널리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에 반해 목간은 죽간으로 만들어진 책처럼 여러 장을 묶어서 사용되기보다 하나하나에 간단한 내용을 적는데 주로 사용됐다. 목간의 가장 흔한 쓰임새는 물건을 멀리 보낼 때,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을 나타내기 위해 매다는 꼬리표다. 이런 쓰임새의 목간에는 끈으로 묶을 수 있도록 위쪽 좌우에 V자 홈이 파져있고 구멍이 뚫려 있는 것도 있다. 그 외 신분을 나타내거나 출신지를 나타내는 명찰로도 목간이 쓰였다.

목간은 비록 희미한 글자 몇자가 쓰여 있는 작은 나무토막에 불과하지만, 지나가버린 역사의 현장을 증언해줄 중요한 정보를 갖고 있는 보물창고다. 예를 들어 안압지에서 찾아낸 목간에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세택’(洗宅)이라는 신라관직의 이름이 나와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경남 함안산성 목간에서는 신라시대의 경상북도 여러 지방 이름이 적혀있어 성을 쌓기 위해 먼 지방의 백성까지 동원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충남 부여의 능산리에서 나온 목간에는 보희사(寶憙寺)나 자기사(子基寺)라는 삼국시대 절 이름이 나오기도 한다. 또한 부여 궁남지의 목간에서는 일본에만 자라는 삼나무로 만든 목간이 하나 확인돼 당시 일본과 백제의 관계를 짐작케하는 중요한 자료가 됐다. 그 외 우리의 것은 아니지만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에서 1984년에 인양한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던 무역선에서는 ‘지치3년6월1일’(至治三年六月一日)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목간이 발견돼, 이 배의 침몰 연대가 1323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목간의 여러 쓰임새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연습장’이다. 요즘은 신문지에서 광고지까지 너무 흔해진 종이에 익숙해져 옛 사람이 무엇으로 연습장을 만들어 공부했는지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가장 경제적이고 편리한 연습장은 목간이었다. 나무는 바늘처럼 가늘고 긴 모양의 세포로 옆으로 촘촘히 박혀 있는데, 목간은 이런 세포가 모여 있는 표면이므로 먹물이 그렇게 깊이 스며들지 않는다. 따라서 글씨를 쓰고 난 후 칼이나 낫으로 목간 표면을 얇게 깎아내면 다시 쓸 수 있다. 아예 닳아 없어질 때까지 쓰고 또 쓰고 계속할 수 있으니 정말 요술방망이 연습장인 셈이다. 실제로 안압지 목간에서는 글씨 연습에 쓰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연습장 목간’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죽간과 목간은 나무껍질이나 잎사귀를 대신해 문자를 기록하는 재료로서 오랫동안 옛 사람들과 세월을 함께 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경 종이가 만들어지면서 영광을 뒤로 한 채 차츰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그렇다고 금세 종이에 떠밀려 없어져 버린것은 아니다. 종이를 만드는데는 엄청난 비용과 시간,노력이 요구됐으므로 손쉽게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죽간과 목간은 그후로 한동안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오늘의 우리에게는 이름마저 가물가물한 죽간과 목간이지만, 인류의 문화사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일 것이다.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발굴 된 목간(왼쪽)과 경주 안압지 에서 발굴된 목간(오른쪽)의 모습. 목간에는 당시의 사 회상을 말해주는 귀중한 글자 들이 새겨져 있어 역사 연구 에 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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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박상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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