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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멧돼지가 나타났다. 영화 얘기가 아니다. 실제로 지난 11월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창덕궁에 몸무게 30~40kg 가량으로 추정되는 멧돼지가 나타나 궁궐 관람이 잠시 중단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최근 멧돼지가 출몰하는 장소는 공원, 유원지, 주택가처럼 사람들에게 밀접한 생활공간이다. 멧돼지가 서울을 비롯한 도심에 출현한 횟수가 올해에만 30회에 이른다. 사실 멧돼지는 8개도 전 지역에서 출현 중이다. 경북 상주시 야외수영장, 강원 춘천시 아파트 단지, 경기 광주시 도로 등 전국 곳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멧돼지로 인한 피해도 늘었다. 야생동물에 의한 농작물 피해액은 2008년에 138억 원. 이 중 멧돼지로 인한 피해가 40%를 차지한다. 피해 대상은 옥수수, 고구마, 복숭아 같은 농작물부터 닭 같은 가축까지 다양하다. 전남 완도군 생일도에서는 기르던 염소가 잔인하게 물어뜯기는 사건이 매일 밤 발생했는데, 범인은 멧돼지였다.



멧돼지 증가는 이미 세계적인 골칫거리

멧돼지가 산을 내려와 도시에 나타나는 이유는 뭘까. 이유는 간단하다. 산에 살고 있는 멧돼지의 개체 수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2008년 현재 전국 멧돼지 개체 수는 26만 7000마리로 추정된다. 환경부 소속 국립생물자원관의‘야생동물 개체군의 생태학적 특성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전국 주요 산악지대에서 관찰된 멧돼지 개체 수는 1km2당 4.1마리로, 2007년(3.8마리)보다 8% 가량 증가했다. 농작물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설정된 멧돼지의 적정 서식밀도는 1km2당 1.1마리. 현재 이 기준보다 4배가 많은 개체 수가 살고 있는 셈이다. 도별로 보면 경남이 1km2당 7.2마리로 가장 높고, 충남이 1km2당 0.4마리로 가장 낮다.



멧돼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주요 원인은 총이나 덫을 이용한 밀렵을 금지하고 포식자인 호랑이, 표범, 늑대 등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호랑이 같은 천적이 산에서 사라진 지금 멧돼지는 국내 생태계 먹이사슬의 꼭대기를 차지했다.

이에 정부는 매년 넉 달간 ‘유해동물 구제기간(파종기부터 수확기까지)’을 지정하고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야생동물을 포획하고 있지만 효과는 크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멧돼지의 왕성한 번식력 때문. 멧돼지는 보통 생후 2년이 되면 매년 한 번씩 평균 5~6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새끼는 사망률이 높아서 보통 5마리 중에 한 마리 정도만 성돈(成豚)으로 자라나지만, 일단 1년을 무사히 보내고 나면 이후에는 거의 죽지 않는다. 이들은 2년 뒤 또 다른 새끼를 낳는다.

그런데 요즘엔 멧돼지의 생존력이 좀 더 증가했단다. 기후가 점차 따뜻해지고,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지 않게 되면서 멧돼지 새끼들의 사망률이 점점 낮아졌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경향이라면 멧돼지가 매년 150%, 많게는 200%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올해보다 내년에 더, 내년보다 내후년에 더 멧돼지가 많아진다는 얘기다. 실제로 멧돼지 전문가들이나 사냥꾼들은“이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전에는 멧돼지를 만나려면 며칠씩 멧돼지의 흔적을 쫓아 산을 헤매곤 했는데, 요즘은 불과 한 나절 안에 멧돼지를 만난다. 불과 3년 만의 일이다.

이런 상황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일본도 멧돼지의 수와 서식 지역이 매년 늘어나 연간 약 50억 엔(약 650억 원)의 농작물 피해를 입고 있다. 일본에서 멧돼지가 증가한 이유는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서식환경이 좋아져 멧돼지의 번식률이 높아졌고, 수렵인의 수가 감소해 멧돼지 포획이 줄어들었다. 미국과 호주는 방목해 사육하던 집돼지와 수렵하기 위해 방사한 멧돼지가 야생으로 탈출하면서 야생 멧돼지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곳의 피해만도 각각 8억 달러(9280억 원), 1억 달러(1160억 원)에 이른다. 어그러진 생태계의 결과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을로 내려와

계속해서 수가 늘어나는 멧돼지. 이들이 도시로 내려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우선 개체 수가 늘어 서식지가 좁아지자 먹이와 영역 다툼에서 밀린 녀석들이 도심으로 내려오고 있다. 환경부는 ‘수도권 야생멧돼지 관리대책’에서 2004년, 2005년에 청와대 뒷편과 홍은동, 공릉동, 경기 구리시 인창동 인근에서 발견된 멧돼지들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분석했다. 서울과 경기 지역은 수렵장이 개설되지 않기 때문에 멧돼지 서식 밀도가 높고 도심으로 진출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최근 도심이나 마을에서 멧돼지가 발견된 사례들은 대부분 9~10월에 집중돼 있다. 이 시기는 산에 먹을 것이 비교적 많은 결실의 계절이기 때문에 멧돼지가 먹이를 찾아서 산을 내려온다는 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먹이가 부족하다면 1, 2월에 내려와야 할 터. 이에 대해 국립환경과학원 바이오안전연구과 김원명 박사는 “멧돼지는 물체의 윤곽을 간신히 구분할 정도로 시력이 매우 좋지 않은 편”이라며 “멧돼지들이 잎이 채 떨어지지 않은 나무들을 보고 숲이 계속되는 줄 알고 달리다가 산 끝까지 다다른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달리던 멧돼지들이 숲인지, 마을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그대로 마을 어귀까지 내려온다는 뜻이다. 멧돼지는 하룻밤 사이에 산 하나 정도는 거뜬히 넘나들 정도로 활동반경이 크다고 하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포획과정에서 사냥개에 쫓기거나 등산객들에게 놀라 정상적인 이동경로를 이탈한 사례도 있다. 2008년 9월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서 발견된 수컷 멧돼지는 사냥개에 쫓겨 내려왔고, 같은 해 10월 광진구 광장동에서 발견된 멧돼지는 등산객들에게 놀라서 이동경로를 이탈했다. 김 박사는 “멧돼지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 냄새를 극도로 싫어한다”고 설명했다. 즉 멧돼지는 등산객을 피하려 도망가다가 산 끝까지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사냥 외 포획 틀도 고려해야

이에 정부가 멧돼지와의 전쟁에 나섰다. 환경부는 최근 동물 전문가와 16개 시도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대책회의를 잇따라 열고 ‘도심 출현 야생 멧돼지 관리대책’을 마련했다. 우선 11월부터 2월까지 전국의 19개 시·군에 수렵장 7527km2를 마련해 멧돼지 2만 마리를 포획하기로 했다. 이는 보통 한 해 잡히는 멧돼지 3000~4000마리의 5배가 넘는다. 19개 시·군에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야생 멧돼지 4만 마리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이기도 하다.

사냥꾼 2만 3800명은 지난해 1명당 3마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에서 올해는 6마리까지 잡을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야생동물의 적정 밀도를 유지하고 농작물 등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안전을 고려한 수렵 규칙도 세웠다. 수렵은 해가 떠 있는 동안에만 이뤄지고 시가지와 인가가 있는 곳에서는 금지된다. 사냥꾼들은 시장이나 군수로부터 총기를 소지하도록 허가를 받아야 하며 수렵을 할 때는 반드시 안전요원들과 함께 단체로 다녀야 한다.

일본, 미국, 호주에서는 우리보다 더 강력하게 ‘멧돼지 무제한 수렵’을 허용하고 있다. 특히 호주는 야생돼지를 농작물에 피해를 주고 질병을 전파하는 유해동물로 규정해 독극물, 헬기, 포획 틀 등을 동원해 잡아들인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수렵의 한계를 지적한다. 넉 달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지금의 인력으로 목표한 2만 마리를 포획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련한 사냥꾼이라도 발 빠른 멧돼지를 하루에 한 마리 이상씩 꾸준히 잡는 건 무리다. 실제로 사냥꾼들은 반나절 이상은 멧돼지의 흔적을 쫓아다닌 끝에야 겨우 멧돼지를 만난다. 포획은 그 다음 문제다.

수도권처럼 사냥이 어려운 지역은 먹이로 유인해 멧돼지를 사로잡는 ‘포획 틀’ 같은 장치를 이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가로 70cm, 세로 220cm, 높이 100cm의 포획 틀은 이안에 놓은 먹이를 먹으러 온 멧돼지를 가둬버린다. 포획 틀은 수렵만큼의 노동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멧돼지를 생포할 수 있어 유용하다.



사실 멧돼지가 유해동물이라고 지정된 이유는 사람들이 가꿔놓은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멧돼지의 입장에서 보면 전원주택을 짓겠다고 점점 더 많은 산림을 훼손하는 사람이나 도토리, 더덕 같은 야생동물들의 먹이를 찾으러 산속을 헤매는 사람이 오히려 유해동물이 아닐까. 무너진 피라미드를 복구하려는 노력이야 필요하지만, 멧돼지 포획이라는 극단의 처방이 내려지게 된 데에는 인간이 가장 큰 원인임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멧돼지를 만나면? 몸을 가려 숨는 게 상책

사실 멧돼지를 만나면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무서워서 도망가는 게 상책일까. 하지만 전문가들은 뛰거나 소리 지르지 말고 우선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하라고 조언한다. 뛰거나 소리치면 오히려 멧돼지가 놀라면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속 40km로 달려드는 멧돼지가 정면으로 들이받을 때의 힘은 1t으로 누르는 힘보다 크다. 따라서 멧돼지를 자극하지 말고 나무나 바위 뒤에 숨어서 몸을 가리도록 한다. 그렇다고 등을 보이며 빨리 달아나서도 안 된다. 이 경우 야생동물은 직감적으로 상대가 겁을 먹었다고 느끼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우제목(牛蹄目) 멧돼지과에 속하는 멧돼지(Sus scrofa , wild bore)는 우리나라에는 단 1종이 서식한다. 멧돼지의 팔다리는 짧지만 몸이 굵고 길며, 주둥이는 긴 원통형이다. 아래턱 송곳니가 무척 예리해 적을 만날 때 무기로 사용한다. 갈기털은 목부터 엉덩이까지 3~5갈래로 갈라져 무성하게 나 있는데, 적이 접근하면 갈기털을 세워서 적을 위협한다.

교미기는 보통 12월부터 이음해 2월까지이다. 임신기간은 약 넉 달이고 4~6월에 5~8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새끼는 황갈색 바탕에 9~10개의 흰색 줄무늬가 나 있어 다람쥐와 흡사하다. 멧돼지 새끼는 감기에 걸려 죽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비를 맞고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멧돼지는 땀샘이 없어서 추위와 더위에 아주 민감하다. 새끼는 생후 2년까지 어미와 함께 산다.

주로 서식하는 곳은 상수리나무와 같은 종자식물이 무성한 깊은 산속이고 전방이 트인 넓은 지역에 10m2의 크기로 나뭇가지를 쌓아 생활한다. 멧돼지는 야행성 동물이기 때문에 낮에는 어두운 계곡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해가 지는 시각에 활동한다. ‘일부다처’의 동물이기 때문에 수컷 한 마리가 12월~이듬해 1월에 1~3마리의 암컷과 교미하며, 교미 후 수컷은 단독생활을 한다.

200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김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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