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1년 G7 프로젝트 신청 과제 중 유일하게 탈락한 바 있는 감성공학이 올 연말부터 시작되는 제2차 G7 프로젝트에 선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 사업은 '한국형 감성공학'의 개념을 토대로 인간중심 연구와 감성시뮬레이터의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하철 승차권 자동발매기를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개를 갸우뚱해 보았을 것이다. 우리 한국사람들이 그동안 익혀온 대개의 구매 행위는 요금을 먼저 내고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건네받는 것인데, 이 기계는 먼저 행선지를 누른 후 요금을 지불하게 돼 있다.
지하철과 관련된 이야기 한가지 더. '차들은 오른쪽 길, 사람들은 왼쪽 길'이란 구절의 동요가 있듯이 우리의 도로 통행 방법은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규칙은 서울 지하철 1호선에선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열차가 왼쪽으로 주행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서 우리의 문화적 습성과 배치되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사용되는 기계가 우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즉 지하철 승차권 발매기는 프랑스에서 도입된 것이고, 서울 지하철 1호선은 일본의 도쿄 지하철을 '그대로 보고 베껴' 설계된 것이다.
용어만으로도 유명세 치러
감성공학을 논의하면서 먼저 살펴볼 것은 "돈을 먼저 내는 것과 나중 내는 것, 또 왼쪽통행과 오른쪽 통행중 어느 방식이 더 좋은 방법인가"가 아니다. 국내 감성공학자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문명 이기가 외부로부터 도입되는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적 습관을 전혀 고려치 않고 무분별하게 이루어짐으로써 생기는 개인, 더 나아가 사회 질서의 혼동이 우려할 만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익히 알려진 대로 감성공학이란 용어는 일본에서 처음 등장했고, 지금도 일본에서 가장 연구가 활발하다. 일본이 감성공학 분야에서 앞선 이유는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일본의 '특수상황'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자동차나 가전제품의 예처럼 제품의 성능과 품질 면에서 일본 제품은 이미 경쟁상대가 없다. 이를 달리 해석하자면 일본 기업은 제품 성능과 품질을 향상시켜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메이드 인 재팬' 제품이 새로운 소비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튼튼한 기계'만으로는 역부족, 덧붙여 소비자들의 감각을 자극하고 정서적 만족감을 제공하는 제품을 개발할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80년대 후반 일본 감성공학계의 대표적 인물인 히로시마 대학 나가마치 교수는 감성공학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소망으로서의 이미지나 감성을 구체적인 제품 설계로 실현해내는 공학적 접근"이라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 정의에 덧붙여 심리학적 방법론을 통해 인간의 감성을 정량적으로 측정하고, 다시 과학적으로 분석·평가해, 이를 제품이나 환경의 설계에 적극 응용함으로써 부가가치와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주장, 산업계의 욕구에 화답했다.
한때 나가마치 교수의 주장은 국내에서도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퍼지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이름을 붙인 제품들이 홍수를 이루면서 상품을 '멋있는 이름'으로 치장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던 시절이다. 감성이란 애매모호한 단어와 공학이란 구체성을 띤 단어가 하나로 묶인 감성공학은 그 용어 자체만으로 유명세를 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연구자들은 나가마치 교수의 연구기법과 '인간 감각 계측 연구'의 내용을 참고해 이들과 유사한 감성공학 연구를 일부에서 시도했다.
하지만 '잘 나가던' 감성공학은 91년 한차례의 고비를 맞았다. 당시 정부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2000년대 초까지 선진 7개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범정부 차원의 이른바 'G7 프로젝트' 사업을 추진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을 비롯해 가전3사, 자동차3사 등 기업 대학 연구소 등 24개 기관이 공동으로 감성공학 연구 개발을 위한 기획을 마련했으나, 분명한 정의나 연구 영역의 설정없이 다양한 연구 분야의 단순 집합체와 같다는 지적에 따라 신청 과제중 유일하게 탈락하는 비운을 맞보아야 했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연구자들은 "뚜렷한 목표점 없는 항해가 난파된 것은 당연하다"는 반성과 함께 감성공학에 대한 개념부터 다시 설정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 결과 최근에는 감성공학을 단순한 산업디자인 기법으로 파악했던 과거의 일본적인 시각에서 탈피, 서구의 인간공학을 토대로 하되 인간이 사용하는 제품이나 환경에 대한 종합적 만족감과 관계되는 '개인의 감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한국형 감성공학'의 개념을 만들어 가고 있다.
많은 연구자들은 감성공학의 개념과 목적이 모두가 수긍할 만큼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덤벼드는 경우가 아직도 적지 않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렇다 할 연구 결과물도 현재로선 선뜻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아직 대학내에 학과조차 설치되지 않았을 만큼 연구인력 측면에서도 미약하다. 그럼에도 국내 감성공학자들은 "우리나라에서 현재 추진중인 감성공학의 개념은 부분적인 연구나 활용 중심으로 접근해온 서구나 일본의 연구 활동과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기계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한국형 감성공학이란 기존에 알려진 감성공학보다 연구의 대상 폭이 훨씬 크다. 인간-사회-문화의 세 요소를 감성을 구성하는 축으로 삼고, 이 삼자가 어떻게 특정 제품이나 환경에 대한 개인의 선호도를 결절하는지를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같은 연구 목표는 기계 중심적 접근이 풍미했던 초기에, 감성공학을 '센서기술'의 또다른 이름으로 인식하기도 했던 것에 비하면 개념상 발전을 이룬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지난 10월 14일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감성 공학을 제2차 G7 프로젝트 연구 후보 과제로 다시 신청했다.
이번에 제출된 기획안은 ▲감성요소 기술 개발 ▲감성 측정 및 평가 시뮬레이터 개발 ▲감성 제품 및 환경 응용 기술 구축 등의 3대 과제를 구체적 실천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쾌적함(amenity)과 제품 설계의 미학(beauty), 인간존중의 새로운 기술문화(culture)를 창출함과 함께 제품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3대 실천 목표 가운데 가장 역점을 두는 분야는 감성 시뮬레이터의 개발. 여기에는 환경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시각 청각 후각 진동 조명 온습도 등 실내 환경 특성을 측정하는 모의환경 기술이 포함되는데, 이같은 대규모 시뮬레이터 개발을 시도하는 것은 세계 최초인 것으로 알려졌다.
감성공학 연구가 가진 의미는 단적으로 기술 우위의 제품 개발 공정이 인간 연구 우선으로 변화됨과 함께, 기계의 설계와 제조가 더이상 공학의 영역만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개인-사회-문화를 고려한 상품의 개념 개발이 선행되고, 엔지니어는 이에 맞춰 제품을 만들어 각 개인에게 최적의 만족감을 준다는 것이다.
흔히 감성공학의 연구 결과는 '콜럼버스 달걀'에 비유되곤 한다. 연구에 소요되는 비용과 시간이 적지 않음에 비해 그 결과는 종이 한 장에 모두 담을 수 있을 만큼 간단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들어 세계인이 함께 쓴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정부출연 연구소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외에도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아우른 30여 업체가 자동차 전자 주거환경 의복 등과 관련된 총24개의 과제를 제출했다. 이들이 제출된 기획안을 얼핏 보아도 이번 연구가 한두가지 학문적 배경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당연히 여기에는 인간공학 생리학 심리학 등에 기반을 둔 학제적 연구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LG그룹의 회장 직속 기구인 커뮤니카토피아 연구소는 기업체가 가진 한계를 뛰어넘은 독특한 연구 스타일로 감성공학 연구자들의 화제에 자주 등장한다. 작년 6월 문을 연 이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인간공학이나 심리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전공자들이 주류. 이들이 연구하는 것은 한국인의 식생활 습관에서부터 전자제품의 사용 편리성에 이르기까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마감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연구 과제들은 최종적으로 '한국인이 만들어 세계인이 함께 쓰는 최초의 무엇'이 될 것이라고 한다.
연구소의 창립을 주도한 이구형 박사는 이같은 연구소의 개념은 우리보다 앞선 구미와 일본에서 조차 유사한 예를 찾지 못할 만큼 독특한 것이라고 소개하면서 "서구인과 논리 구조가 다른 우리의 사고 형태가 세계 시장에서 보편성을 띠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연구가 더욱 치밀하게 진행되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이와 함께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감성공학의 G7프로젝트 사업과 관련, "현재의 G7 프로젝트는 이미 남들이 해놓은 노하우(know-how)나 노홧(know-what)을 쫓아가기에 바쁘다"고 진단하고 "이들을 능가하기 위해서는 노화이(know-why)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야 한다"고 기초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상업화 이전에 있는 기술을 도입해서 엔지니어링을 통해 곧바로 상품화 한다는 이른바 '미드 엔트리(mid-entry) 전략'의 하나로 추진되고 있는 이 연구는 이박사의 말처럼 축적된 기초자료가 국내에 거의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까닭에 사상누각(砂上樓閣)이 될 공산도 없지 않다는 주장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이런 우려를 의식한 탓인지 프로젝트 기안을 담당한 표준과학연구원측은 감성 시뮬레이터의 개발만큼이나 오감 및 평형 감각에 의한 감성의 심리적 생화학적 영향 파악이라든지 감성 디자인 지식 베이스 구축과 같은 기반 기술 확보에도 역점을 둘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외국에서 이미 엄청나게 쌓아놓고 있는 연구 결과를 도입하는 것에 그칠 것이란 염려의 시각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황민철 박사(인공공학연구실)는 "현재 국내의 감성공학 연구는 산학연 3자에 고루 비중을 두고 있다"고 밝히고 "하지만 투입량에 대한 결과가 단 시간에 나와야 하는 기업의 연구 속성상 기초 연구는 기업에서 수행하기 어려워 기반 기술 축적에는 국가 출연연구소가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