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기능이 들어 있어 맛있는 요리를 뚝딱 만들어낸다는 광고를 보고 최첨단 외제 오븐을 하나 샀다. 사용설명서를 보고 이것저것 눌러 보다가 고장을 내 버렸다. 그래서 기계를 구입한 회사에 어렵게 연락해서 수리했다. 그런데 요리를 하려고 사용설명서를 자세히 보니 내가 원하는 요리를 할 수 있는 오븐이 아니었다. 만약 이런 상황이 일반 가정에서 구입하는 기계보다 더 크고 더 복잡하고 더 비싼 연구장비에서 일어났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지난 8월 1일에 출범한,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이하 기초연) 안에 있는 ‘국가연구시설장비진흥센터(National research Facilities & Equipment Center, 이하 NFEC)’는 한마디로 이런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주는 기관이다. 지난 3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기반이 되는 연구 시설과 장비를 전략적으로 확충하고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게 투자하는 NFEC를 설치·운영하도록 했다. NFEC의 유경만 센터장은 “NFEC는 국가 예산을 지원해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한 연구장비를 잘 운영할 수 있게 돕고 장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전문가를 양성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고가특수연구기기지원사업 확장한다
국내에는 물리공학, 화학분석, 지구환경, 생명과학 분야에 관련된 고가 연구장비가 50여 종 있다. 예를 들어 지름 6m의 안테나로 천체에서 방출되는 전파를 관측해 천체의 물리화학적 상태를 연구하는 서울대의 ‘서울전파천문대 6m 전파망원경’, 시료에 전자빔을 쏴 튕겨 나오는 전자를 검출해 시료 표면을 구성하는 원자들을 분석하는 충북대의 ‘오제이 전자 분광기’, X선을 쏴 시료를 분석하는 ‘X선 형광분석기’, 원자핵의 공명 상태를 관측해 분자의 구조와 화학반응을 알아내는 ‘핵자기 공명 분광기’ 등이 있다.
서울대병원에 있는 4차원 뇌기능 영상장비 ‘뇌자도(MEG)’도 이런 고가 장비 중 하나로 지난 2년 동안 고가특수연구기기지원사업을 통해 운영비를 지원받았다. 뇌자도는 초전도 코일을 이용해 뇌신경에서 발생하는 전류인뇌파를 1000분의 1초마다 측정하고 영상화시켜 뇌신경의 위치를 나타내는 기기다.
기존의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비(fMRI),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장비는 각각 2초, 60초에 1번 영상을 얻을 수 있을 뿐이라 빠르게 변화하는 뇌신경 활동을 담기가 어려웠지만, 뇌자도는 초당 1000~1만 번 정도 영상을 얻어 뇌파가 생기는 위치 뿐 아니라 뇌파가 어떤 순서로 뇌의 각 영역을 지나가는지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간질처럼 뇌파가 비정상적인 형태를 보이는 질환을 진단하고 정확히 뇌의 어느 부위에 문제가 있는지를 찾아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뇌자도로 통증을 느끼는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NFEC의 지원이 필요한 셈이다.
충북대의 오제이 전자 분광기도 고가특수연구기기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은 기기다. 충북대 물리학과 강희재 교수는 “이 사업을 통해 운영지원비를 받아 오제이 전자 분광기를 보수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특히 이 장비는 사용한 연구팀의 70% 이상이 충북대가 아닌 외부 기관 소속일 만큼 공동 활용도가 높다. 앞으로 NFEC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고가특수연구기기지원사업의 연장선에 놓인 NFEC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연구장비는 설치한 뒤 활용되고 폐기될 때까지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가장 먼저 직면하는 문제는 연구자들이 자기 연구에 적합한 장비를 구입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국내에는 장비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이 있어 조언을 할 수 있는 장비 전문가도 거의 없다.
또 국내에 있는 연구장비의 약 85%는 외국에서 들여온 것인데 첨단 연구장비의 원천기술은 미국, 독일, 일본 같은 선진국이 대부분 보유하고 있다. 결국 연구장비를 구축할수록 외화가 유출돼 장비를 개발한 국가들의 경쟁력만 강화시키는 악순환만 더해진다.
NFEC는 국내 연구자들이 스스로 연구장비를 개발하는 기술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다. 유 센터장은 “올해 교육과학기술부에서 8억 원을 지원받았다”며 “NFEC가 국내 연구시설과 장비를 총전담하는 기관으로, 국내 과학기술 환경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