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존재 이유는 다양하다. 전문적인 교육으로 인재를 배출하고, 진리에 대한 탐구로 사회에 기여하는 것. 이를 통해 한 국가, 더 나아가 인류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 이런 측면에서 이공계 특성화 대학의 책임감은 막중하다. 특히 기초과학의 성과를 사업화하는 과정은 국민이 과학기술의 혜택을 직접적으로 누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몇 년 전부터 포스텍(POSTECH) 내부에서는 그간 대표적인 기업을 탄생시키지 못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포스텍은 1986년 개교 이래 우수한 연구 성과를 수없이 내놓았고 지금은 76개의 부설 연구소를 갖추고 있으며, 더타임스 ‘개교 50년 이내의 신생대학 세계평가’에서 최근 3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하는 등 대표적인 연구중심대학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기술을 사업화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는 다소 부족했다. 이에 2012년 동문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후배들의 기술사업화와 벤처 창업을 돕는 조직을 설립했다. 바로 ‘포스텍 연계성장기업협의체(APGC)’다.
선배 기업가가 후배 창업자 돕는다
박성진 기술사업화센터장(기계공학과 교수)은 “APGC는 졸업 동문들이 등기 이사 이상으로 활약하는 기업들의 모임”이라며 “이 모임과 체계적인 창업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선배 기업가가 후배 기업가를 키우는, 포스텍만의 고유한 창업 생태계를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동문으로 이뤄진 벤처 캐피탈리스트 모임, 변호사 모임, 변리사 모임, 컨설턴트 모임 등 또다른 네트워크도 속속 만들어졌다.
“포스텍 출신들은 개교 당시부터 공유하는 내적인 신념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혜택을 공동체에 베풀어야 한다’, ‘어려운 과제에 내가 도전해야 한다’ 등이죠. 그 수혜를 처음 받은 87학번 1회 졸업생들이 현재 40대 중반으로 사회에서 활발히 활약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후배와 사회에 기여할 적절한 시점인 셈이죠.”
이들은 지난 9월 중순 학생들의 본격적인 창업을 돕는 ‘APGC-Lab’을 설립했다. 두 가지 프로그램을 마련해 올해 가을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그 중 하나인 ‘테크이노베이션(TechInnovation)’은 예비 기업가를 발굴하는 프로그램으로, APGC 회원사가 특정 프로젝트를 제안하면 관심 있는 학생이 참여하는 식이다. 학기를 포함해 약 5~6개월 동안 참여 학생과 기업이 협업해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창업에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는 학생에겐 스타트업(신생 벤처)을 경험해볼 좋은 기회며, APGC 회원사는 기업에서 하기 어려웠던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시험해볼 수 있다. 말하자면 ‘윈-윈’이다. 만약 프로젝트가 잘 되면 실질적으로 창업을 도모하는 ‘테크스타(TechStar)’ 프로그램으로 업그레이드한다. 테크스타는 아이디어가 있지만 시장성에 의문이 있는 학생, 제품을 구현하고 싶지만 공간이나 멘토가 없어 어려움을 겪는 학생, 혹은 제품을 만들었지만 사업화하는 단계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창업 과정에 필요한 공간과 인적, 지적 자원을 제공한다. 창업에 나선 학생들은 프로젝트 담당 기업으로부터 1:1 멘토링도 받을 수 있다.
학생들의 반응은 뜨겁다. 30여 명 정도 참여할 것으로 예상했던 설명회에 무려 80여명이 참석했다. 박 센터장은 “젊은 학생들에게 자신이 개발한 기술로 창업을 하고픈 욕구가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이 제도가 이런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우수한 비즈니스 모델과 플랜을 수립한 학생에게는 연구 장학금도 지원할 계획이다.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투자 제안을 발표하기까지 팀 당 한 명의 전문가가 멘토링을 해준다. 최대 6개 팀까지 선발해 총 6000만 원을 지급한다.
박영상 기술사업화센터 팀장은 “이제는 기업 운영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가 정신’을 갖추는 게 중요한 시대”라며 “선배 기업가에게 멘토링 받으면서 창업 이전부터 기업가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게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박성진 센터장은 “지금 당장은 실패하더라도 벤처창업을 경험해보는 것 자체가 학생들에겐 아주 큰 소득일 것”이라며 “현실과 시장을 이해하고 내가 연구한 게 사회에 갖는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시각을 배우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제2의 포스코 키우겠다”
APGC는 2035년까지 동문 기업 500개 이상을 세우고, 30만 명의 고용 창출과 총 매출액 100조 원을 달성하는 게 장기 목표다. 이런 목표를 통해 대학은 물론 궁극적으로 지역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함께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포스텍은 포스코가 1968년 포항 영일만의 모래밭에 제철소를 세우면서 포항은 물론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역사에 주목한다. 포스텍 학생들이 창업지원 프로그램 및 선배 기업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포스코의 역사와 정신을 자연스레 체득하고 자신의 성공을 공동체와 공유할 것이라는 기대다.
이처럼 지역사회와 함께 발전하기 위해 포스텍은 실리콘밸리처럼 고부가가치사업이 모인 연구소-기업 연구단지를 포항에 만들 계획이다. 이미 포스텍 동문 이석우 팬타시큐리티시스템 사장이 참여한 1호 기업 연구소가 세워졌다. 박 센터장은 “제2의 포스코 같은 기업이 반드시 나오도록 할 것”이라며 “그게 앞으로 우리나라가 발전할 길”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움직임에 지역사회도 힘을 보태고 있다. 포스텍은 지난 2000년부터 매년 40~60여 개 과제를 선정해 과제당 최대 500만원을 지원하는 학부생 연구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마련한 것이 ‘1사 1학생(연구과제) 후원 캠페인’으로, 취지에 공감한 기업이 필요한 연구자금을 장학금 형태로 지원하는 것이다.
캠페인 소식을 들은 포항상공회의소와 포항철강관리공단이 적극 나서면서 현재 조선내화, 삼화피앤씨, ㈜융진 등 지역 기업들의 참여가 잇따르고 있다. 장학금을 출연한 기업체와 개인은 우수인재 양성에 기여하면서 신선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접하고 기업 운용에 응용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 연구를 수행하는 학생들에게도 기업의 도움을 받아 전문성을 키우고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을 키우는 계기가 된다. 나주영 철강관리공단 이사장은 “우리나라를 이끌 소중한 인재를 키우는 데 보탬이 돼 보람을 느낀다”며 “포항지역과 포스텍이 동반 관계를 강화하고 궁극적인 상호 발전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