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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기술 한계, 사회 갈등은 인지과학으로 푼다”

성균관대 심리학과 이정모 교수

“여기가 어디냐면, 사거리에서 우회전해서… 아이고, 설명하자니 복잡하네. 차로 움직이지? 야, 그냥 내비 찍고 와!”

이제 ‘내비 찍고’ 다니는 게 자연스런 일상이 됐다. 위성항법장치(GPS)로 차량의 위치를 지도에 자동으로 표시해주는 내비게이션(차량항법장치)을 장착하지 않은 차를 보기 드물 정도다. ‘길치’나 ‘방향치’에겐 더 없이 좋은 세상이다. 한 번 찾아가도 길을 정확히 기억해내는 탁월한 공간감각을 가진 사람은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줄어 아쉬울 것 같기도 하다.

한 원로 심리학자가 이 같은 사회현상 속에서 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패러다임이 곧 현대과학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보여줄 거라고 조심스럽게 예고하고 있다. 8월 말 퇴임을 앞둔 성균관대 심리학과 이정모 교수를 만나 인지과학이 이끌어갈 미래사회의 모습을 미리 들어봤다.



인공물에 의존하는 현대인의 일상

한동안 연락이 뜸했었다. 이 교수는 홈페이지와 게시판, e메일을 통해 지인들에게 인지과학의 최신 연구동향을 주기적으로 알려왔다. 그런데 몇 달간 그 소식이 잠잠했던 것이다. 이 교수의 e메일에서 기사로 쓸 수 있는 좋은 정보를 얻기도 했던 터라 은근히 다음 소식을 기다렸다. 하지만 지난 7월 오랜만에 받은 e메일엔 안타까운 소식이 담겨 있었다.

‘지난해 가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충분히 쉬지 않았던 까닭에 올 3월 전립선암 초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한동안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5월 말 입원해 암 부위 절제수술을 받았습니다.’깜짝 놀라 수화기를 들었다가 혹시 폐가 될까 해서 다시 내려놓고 e메일을 썼다.

한 달 뒤 회복되실 때쯤 한번 뵙고 싶다고. 8월 11일 서울 혜화동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는 다행히 예상보다 많이 건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처음엔 말을 연속해서 이어가기가 조금 힘겨운 듯 보였지만 ‘인지과학’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점점 활기가 되살아났다. 평생 몸담아온 연구 분야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 바로 그 때문일 게다.



“내비게이션이 나오기 전에는 운전자 머릿속에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이 다 들어 있었어요. 하지만 이젠 굳이 길을 기억할 필요가 없죠. 오히려 내비게이션에 의존하다 갑자기 고장 나면 자주 가던 길도 못 찾을지몰라요.‘인공물’이 없으면 생각이 막히는 거죠.”

그러고 보니 노랫말도 마찬가지 아닌가. 노래방 기기가 없을 땐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를 외워 불렀다. 손바닥이나 종이에다 적어가면서 외우는 노력파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 회식자리에서 무반주로 노래를 시키면 “가사를 몰라서…”라며 많이들 머뭇거린다. 머리를 쓰는 노력 없이 기기에 의존해 음악을 즐기는 데 어느새 익숙해진 탓이다.

“어떤 소설가나 시인은 자기가 항상 쓰는 연필이 아니면 글이 안 나온다고도 하죠. 과제물이나 보고서를 준비할 때 머릿속으로 정리하려면 뒤죽박죽이 되지만 컴퓨터 자판에 손을 딱 올려놓고 나면 그때서야 차곡차곡 문장이 돼 나오는 경험, 한번쯤은 했을 겁니다.”

이 교수는 이런 현상이 “마음이 인공물에 연결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음? 그거 뇌의 작용 아닌가. 현대 과학에선 인간의 행동과 마음 모두 뇌 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신경활동의 결과로 설명하니까 말이다. 이 교수의 설명은 자칫 신경과학자들의 신경을 거스를 수 있는 말로 들린다.

인지과학의 세 번째 변화

그런데도 그는 거침이 없다. “인간의 마음은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뇌에 의해 좌우되는 측면과 그렇지 않은 측면이죠. 현대 신경과학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까지도 수많은 신경세포의 움직임으로 설명하려 해요. 하지만 그건 그저 뇌의 한 작용일 뿐이고, 사랑이나 미움에 내포된 의미까지 표현할 수는 없잖아요. 신경세포만으로 사랑이라는 현상을 완전히 설명할 순 없다는 거죠.”

마음을 완벽하게 설명하려면 뭐가 더 있어야 할까. 이 교수는 현대 신경과학에는 ‘상호작용’이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 감정의 상호작용, 인간과 인공물이 만나 생기는 상호작용 말이다. 이 상호작용은 뇌신경만으로 설명 못하는‘의미’를 만든다.

“미국이나 유럽, 호주의 많은 과학자들이 이미 이 같은 관점에 동의하고 있어요. 학계에선 이를 인지과학의 제3패러다임이라고 부르죠.”

인지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한 초기 단계인 제1패러다임은 흔히 말하는 인공지능이라고 보면 된다. 컴퓨터나 로봇 같은 기계가 미리 저장해둔 다량의 지식을활용해 주어진 상황에서 임무를 정확히 수행하게 만드는 것. 가장 기초적인 인지과학의 활용 모습이다.



인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영상기술이 발달하면서 생긴 인지과학 제2패러다임의 핵심어는 뇌과학이다. 인간의 뇌 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신경망이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저장하는지를 밝혀내는 접근이다.

이 교수는 “뇌의 작용에 수학이나 물리학 공식을 적용해 설명하려는 시도가 늘면서 실제 뇌와는 사뭇 다른, 과학자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뇌를 구현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며 “인공물에 점점 의존해가는 인간의 행동패턴도 제2패러다임인 현재의 뇌과학
만으론 설명이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지과학의 제3패러다임이 절실히 필요한 분야로 이 교수가 든 건 로보틱스다. 지금까지 개발된 로봇은 정해진 과정에 따라 자동으로 할 일을 찾아 수행하는 로봇, 인간의 유연한 움직임을 최대한 비슷하게 따라 하는 로봇이 대부분이다. 이들 로봇은 제1, 제2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이 교수의 견해다.

“미래에 정말 유용하게 활용하려면 ‘진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로봇이 나와야 해요. 태어난 직후엔 아무런 지식도 없고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어린 아이가 발달과정을 거치면서 상대방의 반응까지 고려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잖아요? 로봇도 이렇게 진화해야죠. 일부 로봇 전문가들은 그래서 ‘발달로보틱스’라는 말을 씁니다.”

발달로보틱스 연구가 가능하려면 기존 뇌과학으로설명하지 못하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인공물 간의 상호작용을 밝히는 제3패러다임의 인지과학이 발전해야 한다는 얘기다.

인간은 비합리적 존재

쉼 없이 여기까지 왔다. 2시간 가까이 다소‘철학적인’설명을 듣다 보니 아침부터 내린 굵은 빗줄기가 어느새 잦아들고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인지과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이 교수의 모습에서 퇴임을 눈앞에 둔 원로학자의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1980년대 초 인지과학이라는 낯선 분야를 한국 학계에 소개한 그에게 퇴임을 앞두고 아쉬운 점은 없는지 물었다.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다 보니 국내에 연구기관이 참 많더군요. 이름도 생소해 뭘 연구하는지 몰랐던 곳도 적지 않았어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게 빠졌습니다. 인간 사이의 갈등을 전문적으로 예측하고 대안을 만들어내는 연구소가 필요해요.”

그는 최근 쌍용차 사태나 광우병 촛불시위 같은 현상이 모두 사람들의‘사회적 인지과정’이 빚어내는 문제라고 보고 있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인지과학자 다니엘 카네만은‘인간은 비합리적’이라고 했어요. 저 사람이 가진 지식과 이 사람이 처한 상황이 만날 때 항상 합리적인 상호작용만 이뤄지는 건 아니죠. 최선의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지만,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이 전개될 가능성도 있어요. 각자의 인지과정을 이해하면 어느 쪽이 일방적으로 나쁘다고 얘기할 순 없을 겁니다. 그럼 갈등을 보는 관점 자체도 달라지겠죠.”

암 수술 후유증 때문에 가뜩이나 자다가 자주 깨는데, 요즘은 제3패러다임 인지과학 생각 때문에 그나마 든 잠도 설치기 일쑤란다. 퇴임이란 말이 무색하게 들린다.

인터뷰 3일 뒤. 이 교수에게서 e메일이 왔다.‘퇴임을 계기로 홈페이지를 개편합니다. 개인 공간이 아닌 인지과학 공동체 형태로 바꿔 인지과학에 흥미 있는 다른 누리꾼들과 공유하는 곳으로 만들려는 취지입니다.’

로봇기술의 한계와 사회적 갈등을 넘어설 수 있는 인지과학 연구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 방문해보는 것도 좋겠다. 주소는 cogpsy.skku.ac.k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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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임소형 기자 · 사진 이훈구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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