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여 년 전, 대양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던 인류는 목숨을 건 항해에 나섰다. 그 당시 바다는 미지의 신비로 가득 찬 신화의 세계였다. 금지된 해역으로 뛰어든 선원들은 낯선 바람과 조류를 신의 분노라며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다섯 세기가 지나기 전에 인류는 달에 도달했다. 인류는 태양계의 여러 행성들을 탐사했고, 이제는 태양계 너머까지 탐사선을 띄우고 있다. 인간은 왜 우주로 나아가려고 할까? 끝도없는 우주를 바라보며 우리가 느끼는 갈망은 무엇일까? 이번호에서는 경이로운 우주탐사의 여정을 살펴본다.
[제시문] 1984년에 화성은 고도로 진화한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는 일부 화성지도에 표시된 ‘운하’라는 복잡하게 얽힌 선에서 비롯됐다. 당시 화성지도는 망원경으로 관측한 결과를 바탕으로 제작되고 있었는데, 운하는 1878년에 처음 보고된 후로 30년 간 계속해서 여러 화성 지도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후세의 첨단 장비로 관측한 결과 화성에는 운하라고 불릴만한 특별한 지형이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지형이 그렇게 오랫동안 천문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구가 화성과 태양에 동시에 가까워져 화성의 표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보였던 1877년 9월, 영국의 아마추어 천문학자 그린은 대기가 청명한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에서 13인치 반사 망원경으로 화성을 관측했다. 그린은 화성 관측 경험이 많았다. 그는 망원경으로 보이는 화성의 모습을 직접 스케치했는데 자신이 관측한 결과 외에도 다른 천문학자들의 관측 결과를 참고해 당시로서는 가장 정교한 화성 지도를 제작했다.
그런데 이듬해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인 스키아파렐리의 화성 지도가 나오면서 그린의 지도는 정확성에서 도전받았다. 그린과 관측 시기가 같은 스키아파렐리의 지도에는 그린의 지도에서 흐릿하게 표현된 지역에 평행한 선들이 그물 모양으로 교차하는 지형이 나타나 있었다. 스키아파렐리는 이것을 ‘카날리(canali)’라고 불렀는데, 이는 ‘해협’이나 ‘운하’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다.
㉠절차적 측면에서는 그린이 스키아파렐리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우선 스키아파렐리는 전문 천문학자였지만 화성 관측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는 마데이라 섬보다 대기의 청명도가 떨어지는 자신의 천문대에서 관측을 했고, 배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8인치 반사 망원경을 사용했다. 또한 그는 짧은 시간에 특징만 스케치한 뒤 나중에 기억에 의존해 지도를 완성했으며 자신이 관측한 결과만 가지고 지도를 제작했다.
그런데도 승리는 스키아파렐리에게 돌아갔다. 그가 천문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존경받는 천문학자였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천문학자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천문학자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지형을 지도에 그려 넣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스키아파렐리의 지도는 지리학의 채색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그린의 지도보다 호소력이 강했다. 그 후 스키아파렐리가 몇 번 더 ‘운하’의 관측을 보고하자 다른 천문학자들도 ‘운하’의 존재를 보고하기 시작했고, 이후 더 많은 ‘운하’들이 화성 지도에 나타나게 됐다.
일단 권위자가 무엇인가를 발견했다고 알려지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관측의 신뢰도를 결정하는 척도로 망원경의 성능보다 다른 조건들이 더 중시되던 당시 분위기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수정되기 어려웠다. 성능이 더 좋은 대형 망원경으로는 ‘운하’가 보이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운하’ 가설 옹호자들은 이것에 대해 대형 망원경이 높은 배율 때문에 어떤 대기 상태에서는 오히려 왜곡이 심해서 소형 망원경보다 해상도가 떨어질 수 있다고 해명하곤 했다.
[문제] 위 글을 읽은 독자의 반응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관측에서 사용하는 과학 장비의 우수성이 논쟁에서 승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군.
② 과학적 관찰 결과가 이론의 진위를 판단하는 기준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군.
③ 어떠한 표현 방식을 채택하는가에 따라 과학적 주장의 설득력이 달라지기도 하는군.
④ 과학자들과 일반 대중의 인식 차이로 인해 과학적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는군.
⑤ 지금 널리 받아들여지는 과학 이론도 미래에는 틀린 것으로 밝혀질 수 있겠군.
- 2007 대학수학능력시험
우주 탐사의 역사
“멀리 떨어진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은 나를 괴롭힌다. 나는 금지된 해역으로 항해하길 원한다.” -허먼 멜빌, ‘모비딕’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세계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공간에 띄우는데 성공한다. 스푸트니크 1호가 보내오는 전파신호가 삐, 삐, 삐 소리를 내며 전 세계로 퍼지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경악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사이의 패권다툼이 치열하던 시기에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는 심각한 군사적 위협이 됐기 때문이다.
스푸트니크호를 싣고 우주로 날아갔던 로켓의 본체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개발된 R-7이었다. 이 로켓은 32개의 초대형 엔진을 탑재했으며 축구장만한 길이에 50만 kg이나 되는 연료를 가득 싣고 미국 본토로 날아갈 수 있었다.
소련의 첫 인공위성 발사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미국은 독일에서 망명한 나치의 과학자, 폰 브라운 박사에게 위성 발사를 최단기간 안에 완수할 것을 지시했다. 히틀러의 위력적인 무기, V-2 미사일의 개발책임자였던 폰 브라운은 미공군의 미사일 레드스톤(Red Stone)을 개량해 쥬피터(JUPITER-C)라는 이름이 붙은 발사체를 만들었다. 미국은 1958년 1월 31일, 인공위성 익스플로러(EXPLORER) 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우주시대의 서막은 냉전시기의 무기경쟁에서 비롯됐다.
최초의 인공위성을 띄우겠다는 목표로 진행된 소련과 미국의 우주 탐사는 유인 우주 비행의 경쟁으로 이어졌지만 이 경쟁에서도 미국은 소련에 뒤졌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지구 대기권을 벗어나 궤도비행에 성공한 최초의 인간이 됐다. 한편 미국은 머큐리 계획(1958~1963)을 통해 6명의 우주비행사를 배출했다. “1960년대 말까지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고 천명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어떠한 희생과 예산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그의 다짐은 그 후 우주탐사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를 가져왔다. 제미니 계획(1964~1966)은 인간이 달에 도달하기까지 우주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달 여행의 준비과정이었다. 무중력 상태에서 장기간의 우주비행, 우주선의 랑데부와 도킹, 우주공간에서의 작업을 통해 미국은 우주비행인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아폴로 계획(1967~1972)이 이어졌다. 세 명의 우주인을 달에 보낸다는 야심찬 계획은 여러 명의 희생을 치른 후 1969년에 가서야 현실로 이루어졌고(11호), 아폴로 13호의 돌발 사고를 제외하면 17호에 이르기까지 6번 달 착륙에 성공했다.
태양계 행성탐사
마리너, 파이어니어, 바이킹, 보이저 등의 미션을 성공시킨 미국은 1960년대와 1970년대 행성 탐사의 선두 주자였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에 탐사선을 쏘아 보내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1970년대에 발사된 탐사선 보이저호는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명을 이어가며 예상 밖의 성과를 거두었다.
낮에는 햇볕에 끓어오르고 밤에는 모든 것이 얼어붙는 수성은 달처럼 수많은 크레이터로 뒤덮여 있었다. 원시지구처럼 질척거리는 늪지대로 묘사되던 금성은 그곳에 처음 도착한 소련의 탐사선을 깡통처럼 찌그러뜨릴 만큼 높은 대기압을 가지고 있었고, 촬영 장비를 녹일 정도로 뜨거운 열 지옥(약 470℃)이었다. 지형이라고는 거의 없는 거대한 가스행성인 토성에는 시속 수천 km에 이르는 거센 폭풍이 불고 있었고, 숨이 막힐 듯 우아한 곡선으로 휘어진 토성의 고리는 아주 작은 얼음조각들이었다. 지구와 비슷한 대기를 가진 토성의 위성 타이탄, 아직도 활발하게 화산을 뿜어내는 목성의 위성 이오, 차가운 얼음 밑에 거대한 바다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목성의 위성 유로파, 넘실거리는 푸른 물의 세계 해왕성, 다른 행성과는 반대방향으로 자전하며 태양을 공전하는 불가사의한 행성 천왕성…. 태양계의 행성과 위성들은 어느 것도 비슷한 모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과학자와 대중들의 관심을 끈 것은 화성이었다. 희미한 이산화탄소 대기를 가진 화성은 과학자들이 망원경으로 그 천체를 관찰할 당시부터 운하로 짐작되는 물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신비로운 상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화성에 직접 탐사선이 착륙해 찍은 사진들에는 황량한 사막과 모래언덕뿐이었다. 탐사선은 미세한 유기물의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수행했지만 명백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몇몇 사진들과 분석 자료들은 아직까지도 화성의 생명현상에 대한 논란을 낳고 있다. 화성 전체에 걸쳐 분포하는 수많은 협곡들과 거대한 홍수에 의한 침식의 흔적은 아주 오래 전에 화성에 물이 흐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과학자들은 화성의 지표 아래에 대량의 물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거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겉보기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아홉 개의 행성은 하나의 태양을 공전하고 있으며 그 중력에 묶여 있다. 끝도 없이 드넓은 우주에서 미약한 태양의 중력에 이끌려 함께 배회하는 태양계의 행성들은 마치 하나의 가족 같다.
외계 탐사
1990년 2월, 미국항공우주국의 과학자들은 ‘과학과는 전혀 무관한 이벤트’를 실행에 옮겼다. 1977년 9월에 발사된 이후 목성과 토성을 탐사하는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태양계 바깥을 향해 항해하는 보이저 1호에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미션을 전송한 것이다. 보이저 1호의 공식적인 임무는 토성 탐사까지였는데, 탐사를 마친 이후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나사의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은 아직 남아있는 연료를 분사해 탐사선의 방향을 지구 쪽으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태양계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지구로 전송했다. 물론 수십억 킬로미터나 떨어진 탐사선과 지구 사이에 신호를 주고받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6만 4000개의 작은 점으로 이루어진 스냅사진 60장이 지구로 전송되었는데, 그 속에는 태양계의 가족사진이 담겨 있었다.
그 이벤트에 참가했던 한 과학자는 뿌옇게 현상된 사진을 쳐다보며 미세한 먼지 같은 이물질을 닦아내기 위해 사진을 훑었다. 순간 그는 그 먼지 같은 하얀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렸고 그러자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 먼지는 다름 아닌 지구였던 것이다.
저 먼 우주 속에서 지구는 먼지처럼 작게 빛나고 있었다. 보이저 계획을 기획하고 태양계의 가족사진을 건의했던 저명한 과학자 칼 세이건은 보이저 1호가 보내 온 사진 속의 작은 먼지를 가리켜 ‘창백한 푸른 점’(the pale blue dot)이라 불렀다. 그는 태양계의 가족사진이 지닌 미학적 가치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구는 광대한 우주의 무대 속에서 하나의 극히 작은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조그만 점의 한 구석에서 일시적 지배자가 되려고 장군이나 황제들이 흐르게 했던 핏빛 강을 생각해 보라. 또 이 점의 어느 한 구석의 주민들이 거의 구별할 수 없는 다른 한 구석의 주민들에게 자행했던 무수한 잔인한 행위들, 그들은 얼마나 빈번하게 오해를 했고, 서로 죽이려고 날뛰었으며, 얼마나 지독하게 서로 미워했던가. 우리의 거만함, 스스로의 중요성에 대한 과신, 우리가 우주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망상….
2005년 5월 말에 보이저 1호는 지구를 떠난 지 28년 만에 헬리오스 지대라 부르는 태양계와 항성 간 우주공간의 경계지역에 도달했다. 보이저 1호는 거의 한 세대 동안 140억 km를 비행했으며 여전히 지구와의 교신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데이터들을 보내오고 있다.
2015년에 이르면, 인간이 만든 비행체가 처음으로 태양계를 벗어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