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부터 이거 입어야해.”
여성이라면 누구나 브래지어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기자는 토끼가 그려진(!) 예쁜 아동용 브래지어를 처음 입었을 때, 마침 집에 와 계시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어디 한번 보자’ 며 극성을 부리는 통에 시달렸던 기억이 있다. 처음에는 너무 부끄럽고 불편했는데, 이내 ‘진짜’ 여자가 된 것처럼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엔 브래지어를 계속 입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 브래지어가 유방 모양을 해치고 유방암을 유발한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 통념상 낮에는 브래지어 없이 생활하기는 어려우니, 그저 밤 시간만이라도 브래지어를 벗고 잔다는 여성이 늘고 있다. 브래지어에 대한 루머, 진실과 거짓을 가려보자.
Q. 브래지어를 입어야 유방이 덜 늘어진다?
1972년 ‘미국의학협회지’에 브래지어와 가슴 건강에 대해 토론한 내용이 실렸다. 의사 알프레드 선드퀴스트가 물었다.
“최근 젊은 여성 사이에서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 패션이 유행입니다. 브래지어로 받쳐주지 않으면 가슴과 유방을 연결해주는 부위의 섬유조직이 늘어나 가슴이 처진다고 미국의학협회에서 경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의사가 대답했다.
“네, 유방을 받쳐주는 연결 부위의 섬유조직이 중력의 영향을 받아 늘어나면 가슴이 처지게 됩니다. 이 섬유조직은 한번 처지면 다시 젊었을 때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두 의사가 언급한 ‘연결 부위의 섬유조직’은 젖을 만드는 유선조직 사이사이에 뻗어 있는 ‘쿠퍼 인대’다. 이후 여성들은 브래지어로 쿠퍼 인대에 걸리는 하중을 덜어줘야 유방이 덜 처진다고 믿게 됐다. 브래지어를 입지 않는 패션은 곧 인기가 시들해졌다.
A. 유방이 늙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가슴이 처지는 주원인은 ‘노화’다. 나이가 들면, 유방 피부가 탄력을 잃어 가슴이 처진다. 폐경으로 여성호르몬과 프로게스테론이 감소해 유방이 퇴화하면서 처지기도 한다. 브래지어가 아무리 유방의 하중을 덜어준다고 해도, 나이가 들어서 처지는 것까지 막아주지는 못한다.
가슴을 처지게 만드는 다른 원인도 마찬가지다. 임신과 수유로 유선 조직이 급속히 팽창했다 축소하면 그 사이에 있는 쿠퍼 인대가 늘어난다. 급격하게 다이어트를 하면 유방의 지방층이 과도하게 빠지면서 가슴이 처진다. 담배를 피우면 피부 단백질이 파괴돼 탄력을 잃는다. 역시 브래지어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윤을식 고려대병원 유방성형클리닉 교수가 말했다. “뭐, 무거운 유방을 받쳐주면 도움이 되기야 되겠죠.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는 전혀 없습니다.”

Q. 브래지어가 오히려 가슴을 망친다?
브래지어가 오히려 가슴 모양을 망친다는 주장도 있다. 올해 4월, 많은 국내 언론이 이를 보도했다. 기존의 믿음을 완전히 뒤집는 결과로 눈길을 끌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 브장송대 스포츠과학 전문가 장 드니 루이용 교수팀은 18~35세 여성 330명을 1997년부터 2012년까지 15년간 관찰했다. 그 결과,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여성들은 매년 가슴이 7mm씩 처진 반면 브래지어를 꾸준히 착용한 여성의 가슴은 더빨리 처졌다. 연구팀은 브래지어가 유방을 지지하는 조직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방해하는 것으로 추측했다.”
A. 개인차가 너무 커 연구 자체가 어렵다
기자는 정확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원본 논문을 찾기 시작했다.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유명 저널에 실린 논문이라면 여러전문가에게 검증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논문은 찾을 수 없었고, 최종적으로 도달한 출처는 ‘The Local’이라는 유럽 온라인 매체에 실린 기사였다. “루이용 교수가 ‘프랑스 인포’ 라디오에서 ‘브래지어가 오히려 유방을 처지게 한다’고 말했다.”
루이용 교수가 위와 같은 연구를 했다고 (라디오에서) 주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연구 방법이나 결론에 대해 다른 전문가에게 검증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잘못된 연구일 가능성도 있다. 윤 교수가 말했다.
“가슴 모양은 가슴 피부가 얼마나 선천적으로 탄력이 있는지, 임신과 수유 경험이 얼마나 되는지 등 개인마다 다릅니다. 모유수유를 하고도 가슴이 금방 회복되는 사람도 있고, 60대인데 30대의 가슴 모양을 선천적으로 유지하는 사람도 있어요. 제대로 연구를 하려면 한 사람을 유방 한쪽에만 브래지어를 착용하게 하고 몇 년 동안 관찰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연구가 과연 가능할까요?”

Q. 운동할 때 꼭 스포츠브래지어를 입어야 한다?
조깅 같은 격렬한 운동을 즐기는 여성은 ‘스포츠브래지어’를 입는다. 스포츠브래지어는 1970년대 후반, 여성이 운동할 때 유방이 심하게 흔들리는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만든 속옷이다. 유방을 몸 쪽으로 압박해 흔들리는 것을 최소화한다.
스포츠브래지어를 생산하는 업체는 흔히 “유방이 상하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면 내부 조직이 파손되거나 인대가 늘어나 모양이 변할 수 있다. 한번 늘어난 인대는 탄력을 잃고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게 정말일까. 꼭 스포츠브래지어를 입을 필요는 없는데 업체의 상술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A. 준비되지 않은 운동은 유방통을 부른다
심하게 달리면 유방이 위아래로 과하게 흔들리면서 떨어져 나갈 듯 아프다. 여성이라면 경험으로 안다. 실제로 영국 연구진이 마라톤에 출전한 여성 참가자 1400명을 조사했는데, 세 명 중 한명이 유방 통증을 느꼈다고 응답했다. 유방의 크기와는 거의 상관이 없었다.
유방에 이렇게 통증을 느낄 정도의 충격이 가해지면, 유선 조직이나 쿠퍼 인대가 급격히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유방이 크면 더 많이 흔들려 쉽게 처진다.
스포츠브래지어를 착용하면 유방의 움직임을 줄여 통증과 처짐을 예방할 수 있다. 영국 포츠머스대 조안나 스컬 교수팀이 여성 70명을 러닝머신을 달리게 하면서 유방의 움직임을 측정한 결과, 스포츠브래지어를 착용했을 때 흔들림을 74%까지 막을 수 있었다.
일반 브래지어는 대부분 와이어가 있다. 땀을 흘리면 마찰이 일어나 피부가 손상되기 쉽다. 반면 스포츠브래지어는 자극이 적은 밴드로 돼 있어 안전하다. 보통 땀을 흡수하는 소재로 만들어져 더 쾌적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Q. 브래지어를 오래 착용하면 유방암이 생긴다?
몇 년 전, 국내 언론이 “브래지어를 오래 착용하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고 보도했다. 당시 바탕이 된 근거 자료는 ‘아름다움이 여자를 공격한다’는 책 한 권. 부부 의료인류학자라고 소개한 두 명의 저자는 유방암이 있는 2056명의 여성과 건강한 여성 2674명의 브래지어 착용 습관을 인터뷰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했다.
“평균적으로 여성 8명 중 1명이 유방암에 걸린다. 하루 24시간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사람은 유방암 발병 확률이 6배 높고, 하루 12시간 이상 입지만 잘 때 입지 않는 사람은 발병 확률이 1.1배 높다. 하루 12시간 이하 착용하면 19배, 전혀 착용하지 않으면 유방암이 21배 예방된다. 요약하면, 24시간 입는 사람과 전혀 입지 않는 사람의 유방암 발병률은 무려 126배다. 흡연자의 폐암 발병률이 비흡연자의 10~30배인 것과 비교하면 무척 높은 수치다.”
이들이 제시한 의학적 근거는 이렇다.
“브래지어가 가슴 주변의 림프 기관을 압박하면 독소가 축적됩니다. 특히 와이어가 든 브래지어를 입고 잠을 자면, 산소 결핍증이 일어나 섬유낭병(물혹)이 생겨 유방암으로 발전할 위험이 높습니다. 브래지어가 가슴 부위의 온도를 높이면 호르몬이 교란될 수 있는데, 이 또한 유방암 위험을 높이는 요인으로 추측됩니다.”
A. 림프 기관 압박돼 유방암 생긴다는 근거는 없다
미국암학회는 2007년 이 부부의 주장을 ‘루머’로 분류해 홈페이지에 발표했다.
“과학적 근거가 없습니다. 이들의 연구는 다른 유방암 위험 인자를 통제하지 않았습니다. 림프 기관이 압박돼 독소가 축적된다는 설명도 생리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브래지어를 입는 습관이 유방암의 원인이라는 연구 결과가 저널에 실린 경우도 없습니다.”
미국암학회에서 2012년에 발간한 ‘유방암백서’에 따르면, 유방암 위험 인자는 고령(65세 이상), 브라카 유전자, 알콜, 30세 이상의 초산, 55세 이후의 페경, 모유 수유 경력이 없는 경우, 폐경 이후의 비만 등이다. 저자가 언급한 섬유낭병(유방에 생기는 혹)은 양성 종양으로, 악성 종양인 유방암과 전혀 관계가 없다.
어떤 다큐멘터리에서는 여성의 모세혈관을 직접 촬영해 브래지어를 착용했을 때 혈류 흐름이 줄고 림프 기관이 많은 겨드랑이 부위가 등보다 7배나 더 압박된다는 것을 보였다. 그러나 이 실험은 브래지어가 몸을 조인다는 것만 증명했을 뿐, 유방암을 유발한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윤 교수는 “브래지어가 겨드랑이 부위의 림프 기관을 누를 수는 있지만, 브래지어를 벗으면 금방 회복된다”고 말했다.
어쩌면 브래지어를 오래 착용하는 여성에서 실제로 유방암 발병 확률이 높을 수 있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다. 비만은 유방암 위험 인자 가운데 하나인데, 비만으로 유방이 큰 여성은 브래지어를 항상 착용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브래지어, 벗을 수 없다면 바로 입자
브래지어를 포기할 수는 없다. 패드가 든 ‘뽕브래지어’를 입으면 가슴이 풍만해 보인다. 브래지어를 입지 않으면 수치심도 든다.
옷 위에 유두를 노출한 채 회사에 출근할 상상을 하면 끔찍하다. 문제는 브래지어를 잘못 착용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브래지어 끈을 ‘탁’ 풀었을 때, 가슴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면 당신은 브래지어를 잘못 입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습관적으로 브래지어의 아랫단을 손으로 잡아 올렸다가 내리거나, 브래지어 컵을 손가락으로 눌렀을 때 들어갔다 나오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윤 교수는 “브래지어는 몸매를 보정하고 외부로부터 유방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입거나 체형에 맞지 않는 브래지어를 입으면 허리나 목에 통증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의 성장은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연령보다는 성장 단계를 확인하고 구입하는 것이 좋다. 보통 초경 전, 유두 주변이 부풀기 시작하면 브래지어를 입는다. 신축성이 좋은 소재이면서 가슴을 전체적으로 감싸주는 모양이 좋은데, 성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사이즈를 자주 재는 것이 중요하다. 성인도 1년에 한 번씩은 속옷 매장을 찾아 유방 크기를 측정하고 직접 입어본 뒤 구입하는 것이 좋다. 집에서만큼은 브래지어를 벗고 편안하게 생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