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할 땐 레몬향, 점심시간엔 장미향, 퇴근할 땐 라벤더향. 평소 핸드백에 서너 개의 향수병을 넣고 다니는 향수 마니아 김씨는 최근 향수전문점에서 립스틱 크기의 향수조합기를 구입했다. 이 조합기에는 1백여종의 향수 원료액이 담겨 있고, 각 원료가 담긴 파이프는 서로 실처럼 가는 모세관으로 연결돼 있다. 사용자는 번거롭게 향수병을 여러개씩 갖고 다니지않더라도 조합기를 이용해 원하는 때에 원하는 향기를 즉석에서 만들어낼 수 있다.
휴대용 자동인슐린투약기는 당뇨병 환자에게 병원가는 번거로움을 없애준다. 미세한 바늘이 붙은 인슐린투약기를 팔뚝에 살짝 대면 혈당 측정이 순식간에 이뤄지고, 측정된 혈당량에 따라 적당량의 인슐린이 투여된다.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세한 칩 위에 정밀화학공장을 짓는 일이 수년 이내에 가능해질 것입니다. 향수병 대신 향수조합기를 갖고 다니면서 원하는 향을 즉석에서 얻을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만들어낼 수 있죠.”
KAIST 초미세화학공정시스템 연구센터 우성일 교수의 말이다.
머리카락 굵기에서 기술 구현
향수조합기나 자동인슐린투약기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기술은 바로 초미세 화학공정이다. 초미세 화학공정이란 말 그대로 실리콘칩 제조공정, 미세가공 공정기술을 이용해 머리카락 굵기(1백μm) 정도인 마이크로미터(1μm=${10}^{-6}$m) 단위에서 물질의 이동과 혼합, 그리고 분리 과정을 구현하는 기술을 말한다.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실생활에서 쓸 수 있는 휴대용품뿐만 아니라 각종 화합물을 합성하는 마이크로반응기, 다양한 조성의 물질을 한꺼번에 만들어 특성을 일괄 분석하고 평가하는 고속연구개발기법 등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실로 그 응용범위가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컴퓨터 마이크로프로세서칩 위에 상상할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가 펼쳐지듯 화학에서도 기판위에 마이크로공장이 탄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이크로 액체반응기를 예로 들어보자. 액체반응기에는 혼합기, 냉각기, 온도센서가 붙어 있어서 반응 조건을 조절한다. 일단 액체를 주입하면 혼합기에서 액체가 확산에 의해 서로 섞인 뒤 파이프를 통과하면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반응혼합물의 온도가 올라가면 냉각기에서 냉각수가 흘러나와 온도를 조절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온도센서에서는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전기저항을 통해 온도 변화를 파악하게 해준다.
최근 세계적인 화학회사인 듀폰사는 반응성이 매우 크고 유독해서 저장과 운반이 어려운 원료들을 마이크로반응기에서 합성해서 쓰고 있다. 이 반응기는 히터나 촉매반응기 등의 각종 장치가 실리콘 기판 위에 미세한 파이프로 연결된 구조로 이뤄져 있다. 따라서 화학원료를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양만큼 제조해서 쓰면 되고, 만일 사고가 나더라도 규모가 매우 작기 때문에 그 피해도 크지 않다. 또한 기존 실험장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를 엄청나게 줄인셈이므로 경제적인 이득이 매우 크다. 예를 들어 지름 3cm의 플라스크 대신 1백분의 1크기인 3백μm 마이크로반응기를 쓸 경우 시료의 양을 1백만분의 1로 줄일 수 있다.
1년 걸릴 일 며칠만에 해결
초미세 화학공정이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성능을 발휘하기 위해 개발된 신물질은 급속도로 진행되는 과학기술의 발전속도에 발맞춰 그 수명이 점차 짧아지는 추세다. 신물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료를 만들어 테스트하는 과정을 거쳐야하는데, 이에 따른 연구비용의 증가와 연구기간의 장기화가 큰 부담이 된다.
이런 이유로 한번에 많은 수의 연구시료를 저렴한 비용으로 제작하고, 이들의 성능을 고속으로 측정∙평가한 후 상업화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초미세 화학공정의 고속연구개발기법이 도입된 것이다. 초미세화학공정시스템 연구센터에서는 특히 자동차 배기가스를 절감하는 촉매, 연료전지 촉매 등을 이 기법으로 연구∙개발하고 있다.
우 교수는“칩 위에 서로 조성이 다른 1백여가지 재료를 한꺼번에 만들어 성능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예전에는 1년 걸릴 일을 이제는 단 며칠만에 해결할 수 있다”면서“화학뿐만 아니라 전자공학, 컴퓨터공학, 생명공학, 환경공학, 나노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공동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초미세 화학공정기술은 사용자가 필요한 것을 즉석에서 얻을 수 있는 POU(Point Of Use) 개념의 제품을 생산하고, 고기능성 화학소재를 고속연구개발기법으로 탄생시킨다는 목표를 향해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이미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연구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아직은 기술 태동기에 서있다. 향후 우리나라에서 신화학공정시장을 직접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여지가 크기 때문에 엄청난 기술적∙경제적 파급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초미세화학공정시스템 연구센터에는 전문가만도 현재KAIST 교수진9명을비롯해산∙학∙연박사급인력이 27명이다. 올해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재단으로부터 신규우수연구센터(ERC)로 지정돼 향후 10년동안 1백억원의 예산을 지원받는다. 센터에서는 이 분야의 전문지식을 보유한 연구원을 양성하기 위해 석∙박사 과정의 대학원생을 해외 선진연구센터와의 교류협력에 적극 참여시킬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