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19일 문화재청이 공개한 전북 익산시 미륵사지석탑의 사리장엄구에 대해
한 언론이 쓴 표현이다. 금제사리호(사리를 넣은 병), 금제사리봉안기(탑에 사리를 봉안한 배경을 적은 기록) 등 700여 점의 유물들은 백제 문화의 화려한 면모를 보여줄 뿐 아니라 삼국시대 최대 사찰로 알려진 미륵사의 창건 미스터리를 푼 국보급 보물이다.
크레인이 위의 돌덩어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 밑의 돌덩어리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이게 뭐지?’ 호기심에 다가선 순간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에는 금빛 찬란한 단지와 한자가 새겨진 금판, 수많은 옥구슬이 놓여 있었다.
지난 1월 14일, 미륵사지에서는 미륵사지석탑을 복원하기 위한 해체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10여 년에 걸친 해체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러 이제 1층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석탑이기는 하나 목탑의 양식을 변용했기 때문에 탑의 중심에는 기둥 돌인 심주석(心柱石)이 층층이 쌓여 있었는데, 심주석도 이제 단 두 단이 남아 있었다.
이날 남아 있던 2개 중 위에 있는 심주석을 들어 올리는 순간 아래 1층 심주석 중앙에서, 봉안된 뒤 지금까지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사리공(舍利孔)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안에 금제사리호, 금제사리봉안기, 각종 공양물 등 700여 점의 유물이 들어 있었다. 백제지역에서 무령왕릉과 백제금동대향로 발견에 맞먹을 정도로 대단한 고고학적 발견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미륵사지석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

미륵사가 자리 잡은 익산 지역은 백제가 수도 사비 이외에 또 다른 도읍으로 경영한 곳이라 말할 정도로 백제의 대규모 유적이 밀집돼 있는 곳이다. 특히 미륵사는 삼국시대 최대의 사찰로서 탑 3기와 금당 3채로 이뤄진 3원(院)식의 독특한 가람 형태를 지니고 있다. 즉 중원에는 거대한 목탑이, 서원과 동원에는 석탑이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다.
미륵사의 상징인 미륵사지석탑이 바로 서탑이다. 다른 건축물 대부분은 파괴돼 흔적만 남아 있다. 이 탑은 석재를 이용해 목탑처럼 만들었다.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목탑을 석탑 형태로 변용시킨 것으로서 한국 석탑의 시원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건축물로 손꼽혀 왔다. 원래는 9층으로 매우 장대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절반 이상 붕괴돼 6층까지 일부만 남아 있던 탑을 일제시대 1915년 일본인들이 콘크리트로 보강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사리장엄구란 사리를 담은 그릇과 예물로 함께 넣은 각종 장신구와 재화 등의 공양물을 통틀어 말한다. 삼국시대 사리장엄구는 ‘백제 창왕명 사리감’, ‘백제 왕흥사 목탑 사리구’ 등에서 보듯 탑의 지하에 위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인데, 탑의 기원이 무덤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지하에 넣는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미륵사 서탑의 사리장엄구는 지상에 위치한 1층 심주석에서 출토돼 눈길을 끈다.
미륵사 서탑 심주석 중앙의 사리공(가로 24.8cm, 세로 24.8cm, 깊이 27cm)에서 출토된 유물은 20여 종 700여 점에 달한다. 구슬이 650여 점이고 나머지는 각종 장신구와 사리 봉안용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등이다. 사리공의 바닥에는 두께 1cm의 판유리를 깔고 그 위에 차례로 공양품을 올려놓았다. 당시 유리는 귀금속 같은 귀한 재료였다. 사리공 가장자리에 원형의 합(盒) 6개를 놓고 이들 사이에 녹색 유리구슬을 채운 뒤 남쪽에는 당시 귀족들이 관에 꽂던 은제관식과 화폐 대용으로 보이는 금제 소형 판들을 뒀다. 북쪽에는 직물에 싼 도자(刀子, 작은 칼) 5자루를 뒀고, 서쪽에는 도자 2자루를 각각 올려놓았다. 마지막으로 금제사리봉안기를 남쪽 벽에 기대어 놓은 뒤 정중앙에 금제사리호를 봉안해 마무리했다.

서동과 선화공주 로맨스는 지어낸 이야기?

이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유물은 금제사리봉안기와 금제사리호다. 사리봉안기(가로 15.5㎝, 세로 10.5㎝)는 금판에 글씨를 새기고 붉은 칠을 해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금판 앞뒷면에 한자 193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만히 생각하건데, 법왕(法王, 부처님)께서 왕궁(王宮)에 태어나셔서 (중략)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사리(舍利)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 되게 하셨다. (중략)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
(宅)積德)의 따님으로 (중략)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639년)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중략)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왕후(王后)의 신심(身心)은 수경(水鏡)과 같아서 법계(法界)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의 구원(久遠)까지도 함께 복리(福利)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번역 김상현 동국대 교수
앞에서 보듯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자,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명확히 함으로써 백제의 역사를 밝히는 중요한 열쇠가 들어 있다. 이와 함께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무왕과 선화공주와의 드라마틱한 로맨스가 단지 설화가 아닐까 하는 논란에 휩싸이게 하는 결정적인 자료가 포함돼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를 연모한 서동(훗날 백제 무왕)이 ‘밤마다 선화공주가 서동의 방을 드나든다’는 내용의 ‘서동요’를 퍼뜨린다. 이 소문을 들은 진평왕이 대노해 딸을 쫓아내고 결국 선화공주는 서동과 결혼해 훗날 백제의 왕후가 된다. 이 부분에 이어 무왕과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에 관여했다는 다음의 구절이 나온다.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寺)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못가에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이 현신하므로 왕비의 청으로 이곳에 미륵 불상과 전각, 탑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
그런데 봉안기에 미륵사 창건에 시주한 백제 무왕의 아내(왕후)가 백제 귀족의 딸임을 명시하고 있다. 13세기 고려의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지은 건 미륵사가 창건된 지 600여 년 뒤의 일이다. 이번 발견은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가 허구임을 증명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미륵사 창건에 관여했다는 부분에 대해는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고 있어,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

백제 공예예술의 백미

사리호의 무늬들은 연꽃잎무늬와 넝쿨무늬인 인동당초문, 연봉오리와 넝쿨무늬를 합성한 연화당초무늬를 주요 소재로 했는데, 섬세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고 있다. 여기에 연꽃과 당초로부터 쏟아져 나와 흩뿌려지듯 여백을 빼곡하게 메운 연주문 덕분에 사리호는 한층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이 연주문은 물고기 알과 같다고 해 어자문(魚子文)이라고도 한다. 서아시아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장식기법으로서 특히 중국의 수·당대에 크게 유행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사용됐다.
이와 같은 무늬들이 백제 말에 완벽한 형태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은 백제가 국제적인 미술양식과 궤를 같이하는 선진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난 1월 중순,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들은 다른 곳에서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나고 또 그 종류도 다양하다. 디자인과 제작기법 등이 세련되고 섬세하며, 기운이 넘쳐나 생명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다.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이라고 할 만하다.
이번 사리장엄의 발견은 백제의 역사와 미륵사 창건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줬으며, 백제 사리장엄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정확한 연대를 새겨 넣은 금제사리봉안기는 이를 더욱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유물이며, 금제사리호는 백제 공예의 정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유물들에는 1400여 년 동안 가려져 있던 자신의 공덕이 마침내 드러난 것을 본 백제의 왕후가 미소 짓는 모습이 어려 있는 듯하다.
이귀영 실장은 고려대 한국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장을 역임했고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백제 무령왕릉 출토 금속공예품의 제작기법 고찰’,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