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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 오른 한국 수학, 국제수학자대회 유치 도전

박형주 ICM 유치위원장

세계 최고 수준의 권위를 갖는 ‘수학계의 올림픽’ 국제수학자대회(ICM)를 한국에 유치하려는 학계의 열기가 뜨겁다. 수학에 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는 한편 남북 화해의 물꼬까지 넓힐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2월 말 실사단 방문을 앞두고 막바지 준비 중인 박형주 유치위원장을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국제수학자대회(ICM)는 단순한 학술행사가 아닙니다. ‘수학 올림픽’이라는 별칭처럼 개최국의 학문적 실력과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이벤트예요.”

2014년에 열릴 ICM을 한국에 유치하기 위해 국제수학연맹(IMU)에 출사표를 던진 박형주 유치위원장(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교수). 서글서글한 표정과 자신감이 듬뿍 묻어나는 어투로 박 유치위원장은 ICM이 지닌 ‘폭발력’을 유독 강조했다. 폭발력의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수학 자체의 발전은 물론 주변 과학기술, 나아가 사회적인 변화까지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된다는 설명이었다.

한국 수학 등급, 두 계단 급상승
ICM은 1897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된 세계 최대의 수학계 학술행사다. 4년마다 열리며 100여 개국에서 4000여 명의 수학자가 몰려들 만큼 매머드급 규모를 자랑한다. 특히 대회에서 당대 최고 수학자에게 수여되는 ‘필즈 메달’의 권위는 노벨상에 견줄 만하다는 게 학계 설명이다. 노벨상에 없는 수학 부문을 필즈 메달이 사실상 대신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은 박 유치위원장 주도로 지난해 11월 IMU에 대회 유치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ICM은 대규모 학술행사에만 그치지 않는다. 개최국 원수가 수상자의 목에 필즈 메달을 직접 걸어주는 이벤트가 열리는 것만 봐도 이 대회가 수학자들만의 잔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이 이 대회를 유치하면 우리 대통령이 시상자로 나선다. 기초과학 얘기가 오가는 학술대회에 국가 원수가 참석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한국이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의미가 큰 이런 대회의 유치에 나서게 된 것은 크게 향상된 수학 실력 덕택이다. 수학계에서 주요 국가로 인정될 만큼 국제적 위상이 올라갔다는 얘기다. IMU가 평가하는 국가별 수학 등급이 한국은 2등급에서 4등급으로 2007년 두 계단이나 뛰어올랐다. 선례가 없을 정도의 고속 성장이다. 일부 국가의 학자들 사이에선 한국이 미국, 러시아, 일본 등이 포함된 5등급 수준이라는 반응도 나왔다.

크게 늘어난 논문 건수가 한국의 실력 향상을 입증한다. 1997년 ‘과학논문인용색인 확장판’(SCIE)급 학술지에 154건의 논문을 게재한 한국은 2002년에는 261건, 2007년에는 408건을 실었다. 이 정도 높은 성장세를 보인 다른 국가는 중국과 브라질 정도다.

공교롭게도 이번 유치전에는 브라질이 뛰어들었다. 캐나다도 출사표를 던진 상태이긴 하지만 국내외 수학계는 이번 유치전의 흐름이 브라질과 한국의 맞대결로 가고 있다고 본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경쟁자를 만난 셈이죠. 긴장은 되지만 2002년 개최국인 중국 사회에 ICM이 파급시킨 성과를 보면 반드시 유치해야겠다는 결심도 강해집니다.”

2002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ICM에는 당시 국가 주석이던 장쩌민이 참석했다. 필즈 메달을 시상한 것은 물론 오전 발표시간 내내 행사장에서 자리를 지켰다. 온갖 바쁜 일정을 뒤로하고 국가 원수가 이 대회에 보여준 뜨거운 관심은 중국 사회에 큰 메시지를 던졌다.

중국 수학계는 ICM을 성황리에 마친 뒤 SCIE급 논문 게재 건수를 크게 끌어올렸다. ICM이 열린 2002년에 1387건이던 게재 건수가 5년 뒤인 2007년에는 무려 2627건까지 증가한 것. 중국의 게재 건수는 2002년 이전에도 꾸준히 늘어 왔지만 이처럼 높은 성장을 기록한 적은 없었다.

“중국 수학자들 사이에선 ICM을 치르고 나서 연구비가 10배는 늘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 대회의 힘을 보여준 좋은 사례죠.”

토종 실력 내세우고 일부 행사 북한서 개최 추진
브라질이라는 강적을 만났지만 박 유치위원장은 ‘자신 있다’는 태도다. 우선 좋은 명분을 선점했다. “늦게 출발한 자들의 꿈과 희망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이만큼 성장한 한국이 개발도상국들의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죠.”

브라질의 높은 수학 수준이 사실상 ‘용병’이 이룬 성과라는 점도 이번 유치전에서 한국에 유리하게 작용할 변수라는 게 박 유치위원장의 설명이다. 브라질은 1990년대 들어 냉전이 끝나자 동구권에 있던 수학계의 고급 두뇌를 대거 받아들였다. 반면 한국 수학의 발전은 ‘토종’ 인력이 주축을 이뤄 일궈냈다. 자생력을 갖췄다는 면에서 한국이 우월하다는 얘기다.

일부 학술행사를 북한에서 개최할 계획도 한국의 ‘필승카드’ 가운데 하나다. 분단 상태인 한반도가 학술 행사를 통해 교류를 확대한다면 ICM의 ‘폭발력’이 학술적 의미를 넘어 사회적인 방향에서 실현되는 셈이라는 게 박 유치위원장의 생각이다.

“아직 북한과 구체적으로 협의가 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분명 있습니다. ‘북한통’인 박찬모 청와대 과학기술특별보좌관에게 이런 제안을 북한에 전달해 달라고 요청한 상태입니다.”

북한은 남북 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도 유독 과학기술 분야에선 유연한 태도를 보여 왔다. 남북 과학기술계의 꾸준한 협력 속에 평양과학기술대가 올해 개교할 예정인 사례가 대표적이다. 개교를 준비하는 남한 인사가 북한에 들어가는 일도 비교적 큰 무리 없이 진행돼 왔다.

“2월 24일부터 26일까지 방한할 IMU 실사단 3명 가운데 한 명인 마르틴 그뢰첼 IMU 사무총장이 독일인입니다. 동서독 통일 상황이던 1990년대 초반에 독일에 ICM을 유치한 인물이죠. 당시 내걸었던 기치가 ‘동서독 통합’이었습니다. IMU를 통해 한국의 분단 상황에서 돌파구를 만들려는 우리 수학계의 노력이 그에게 특별한 감흥으로 다가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청소년이여, 수학계 노벨상에 도전하라”
국내 학계에선 ICM이 촉발한 수학 발전이 주변 과학기술과 현실 생활을 바꾸는 성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와이브로처럼 최근 모습을 드러낸 통신수단의 경우 수학적 예측을 통해 효과적인 경영 모델을 만들 수 있다. 소비자에게 혜택을 주면서도 기업 이익을 늘리는 요금제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수학은 이미 우리 생활 깊은 곳에서 현대 과학기술 문명을 떠받치는 기둥이 돼 있다. 인터넷으로 신용거래를 할 때 사용하는 공인인증서가 대표적이다. 이 기술의 바탕이 된 ‘암호론’은 자릿수가 많은 정수를 소인수분해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활용한 것이다. 조 단위처럼 엄청나게 큰 숫자를 소인수분해하도록 해 ‘도둑’이 쉽게 문을 열 수 없도록 한다.

파일압축 프로그램에도 수학의 ‘신호압축이론’이 활용된다. 반복되는 단어를 간단한 기호로 만들어 차지하는 공간을 크게 줄이는 게 핵심원리다. 공책에 수업 내용을 필기할 때 ‘경기 하락’을 ‘경기 ↓’으로 표기하는 식이다. 전달 받은 압축 기호를 원래 단어로 풀어내면 된다.

박 유치위원장은 이 대회가 수학에 대한 한국 청소년의 관심을 자극할 것으로 전망한다. “우리 청소년들은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선진국을 제치며 매년 3~4위 성적을 거둘 만큼 실력이 뛰어납니다. 이번 대회를 유치하면 청소년들이 수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거예요. 미래에 필즈 메달 수상자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겁니다.”

박 유치위원장에 따르면 지금까지 필즈 메달을 받은 48명 가운데 8명이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입상한 경력이 있다. 이번 대회가 현재 한국 수학 실력을 알리는 일 외에도 10~20년 뒤 한국 수학을 짊어질 인재를 양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학계에선 대회 과정에서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기업 마이크로소프트의 엘리트 연구원이던 김정한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과 같은 국내 수학계의 여러 ‘보물’이 알려지면 청소년에게 역할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란 예측도 내놓는다.

IMU는 2월까지 모든 후보국에 대한 실사를 마치고 올해 4월 중국에서 열릴 집행위원회에서 단일 후보국을 추천한다. 2010년 회원국 총회에서 최종 승인을 거쳐야 하지만 사실상 개최 여부는 집행위원회에서 결정된다. ICM을 개최해 한국 수학의 발전에 가속도를 붙이려는 박 유치위원장의 행보가 어떤 결과를 만들지 주목된다.

2009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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