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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차니스트족을 위한 패션 2.0 시대

3차원 아바타에 디지털 의상 입혀보고 옷 산다

크리스마스에 남자친구와 로맨틱한 데이트를 즐길 생각에 나귀찬 씨는 벌써부터 마음이 들떴다. 어떤 옷을 입어야 남자친구에게 예쁘게 보일까. 새 옷을 한 벌 장만하고 싶은데 쇼핑은 딱 질색이다. 피팅룸에서 일일이 옷을 갈아입기가 너무 귀찮다. 허리는 잘록하고 다리는 길쭉한 ‘표준체형’이 아니라 어울리는 옷 찾기는 더 어렵다. 그래도 어쩌랴. 나 씨는 무거운 마음으로 백화점을 향한다.

한 의류매장을 둘러보던 나 씨의 눈에 ‘3차원 가상 피팅 서비스’라는 문구가 들어온다. ‘직접 입어보지 않고도 내 몸에 꼭 맞는 옷을 고를 수 있다’는 내용에 솔깃해 일단 커다란 원통형 피팅룸에 들어간다. 피팅룸 안에는 기계가 한 대 놓여 있다. 옷을 입은 채 기계 앞에 서라는 지시문이 눈에 띄었다.

뭐지? 궁금한 마음에 지시문을 따랐다. 마이크로웨이브 센서를 단 감지기가 윙~ 하는 소리를 내며 나 씨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좌우로 훑는다. 아, 스캐너구나. 측정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초.

밖으로 나온 나 씨는 매장 한 쪽에 놓인 모니터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의 얼굴과 몸매를 쏙 빼닮은 아바타가 모니터에 있는 것이 아닌가. 매장 직원이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여기에 달린 전자태그를 모니터 인식판에 갖다 대보라고 알려준다.

나 씨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는 초록색과 빨간색 체크무늬 코트를 고른 뒤 전자태그를 갖다 댔다. 모니터 화면에 ‘옷을 입는 중’이라는 안내창이 뜨더니 수초 뒤 나 씨의 아바타가 그녀의 손에 들린 옷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 ‘어깨 아주 적당’ ‘가슴 약간 넉넉하나 적당’ ‘허리 약간 낌’ 같은 신체 부위별 상세정보까지 뜬다. 이렇게 편리한 쇼핑 방법이 있었다니.

매장 직원은 나 씨에게 팁을 하나 더 알려준다. 앞으로 매장에 나올 필요 없이 집에서 인터넷 쇼핑몰에 접속해 나 씨의 아바타를 불러낸 뒤 실제와 똑같은 디지털 의상을 입혀보고 살 수 있단다. 아, 이제 ‘쇼핑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나 씨는 모니터 앞에서 자신의 ‘가상분신’에 이것저것 입혀보며 달콤한 데이트를 즐길 단꿈에 빠졌다.

옷 입는데 몇 초면 충분
지난 10월 CJ몰은 업계 최초로 3차원 아바타를 이용한 ‘가상 피팅 시스템’을 선보였다. 자신의 신체 사이즈와 같은 3차원 아바타를 만들어 옷을 입혀보고 몸에 잘 맞는지 확인한 뒤 구입할 수 있도록 한 것.

3차원 아바타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위에서처럼 직접 3차원 스캔을 하거나 자신의 키와 몸무게 등 10군데의 사이즈를 측정하는 방법이 있다. 이것도 귀찮은 사람은 키와 몸무게, 나이만 입력하면 한국인 표준 체형분류에 따라 자신과 비슷한 3차원 아바타가 자동으로 생성된다.

이 기술을 개발한 박창규 건국대 섬유공학과 교수는 “3차원 아바타를 만들어 실제 쇼핑에 적용한 것은 세계 최초”라며 “직접 입어보고 살 수 없는 인터넷 쇼핑몰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박 교수는 이 기술에 ‘i-패션’이란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i’는 소비자인 나를 의미한다. 또 IT와 패션을 융합했다는 뜻도 된다.

i-패션의 핵심 기술은 크게 3가지다. 3차원 아바타를 만들고, 의류회사가 매 시즌 디자인하는 ‘신상’을 디지털 의상으로 변환한 뒤 3차원 아바타에 이 의상을 입히면 된다. 쉽게 들리지만 사실 매우 어려운 기술이다.

우선 3차원 아바타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체를 입체적으로 스캔해야한다. 이때 스캐너는 인체 표면을 작은 격자로 잘게 나눠 이를 수학적인 정보(메시 데이터)로 나타내는데, 이 데이터를 실제로 사용할만한 수준으로 간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애니메이션에서야 이 데이터를 모두 사용해 수주에서 길게는 수개월까지 사실성을 높이는데 치중하지만, 실제 쇼핑객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비용과 시간 모두 경제성을 따질 수밖에 없다.

한 시즌에 브랜드 하나에서만 1000벌 가량 디자인되는 옷을 디지털 의상으로 전환하는 작업도 마찬가지다. 가령 디즈니나 픽사 같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옷을 입은 사람의 동작 하나를 표현하는 데 2~4주를 소비한다. 하지만 i-패션에서는 같은 기간 동안 옷 1000벌을 디지털 의상으로 제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제작된 디지털 의상을 3차원 아바타에 입히는 일도 문제다. 옷을 착용한 뒤 실루엣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쇼핑객에게 사실적인 정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옷을 입었을 때 원단이 신체 부위별로 어떻게 변하는지 정확하게 시뮬레이션해야 한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디지털 의상끼리 또는 디지털 의상과 아바타끼리 충돌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충돌 문제란 쉽게 말해 아바타 체형에 비해 너무 작은 옷을 입히면 옷이 살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박 교수는 이런 일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산 기술로 개발한 특수 소프트웨어를 사용했다. 이 소프트웨어는 우선 실제 디자인된 옷을 토대로 옷본(패턴)을 뜬다. 그리고 옷의 질감과 특성 같은 변수를 입력한다. 그러면 가상 봉제과정을 거쳐 디지털 의상이 완성된다. 의류공장에서 실제 옷 만드는 과정을 컴퓨터로 옮긴 셈이다. 마지막으로 텍스쳐 매핑으로 옷에 무늬를 넣는다. 이때 구김과 그림자 같은 요소가 모두 포함된다.

박 교수는 “소프트웨어로 디지털 의상을 한 벌 만드는 데 현재 1~2시간 걸린다”며 “이 의상을 아바타에 입히는 데도 몇 초면 충분하다”고 밝혔다. 이 정도면 의류업체가 실제 의상을 디지털 의상으로 전환하거나 쇼핑객이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 얼굴색이나 옷 색도 실제와 거의 똑같이 구현된다.

최근 세계적으로도 i-패션처럼 패션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가령 청바지로 유명한 미국 의류기업인 리바이스는 전국 매장에 3차원 스캐너를 설치해 이것으로 고객의 신체 사이즈를 측정한 뒤 청바지 사이즈를 추천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E-테일러’라는 프로젝트에서 개인 맞춤 주문형 신사복을 선보였는가 하면, 런던에 있는 패션기술회사인 바디메트릭스는 스캐너로 고객의 신체 사이즈를 정확히 측정해 런던, 파리 등 주요 백화점에서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청바지를 제작해 100만 원 정도의 고가에 팔고 있다. 다만 이들 시도는 아직 3차원 그래픽스가 아닌 텍스트 기반의 서비스에 머물고 있다.

고객 맞춤형 의상도 OK~!
현재 박 교수가 개발한 i-패션은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 등 외국에서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까르푸와 월마트 같은 세계적인 대형 할인 마트를 비롯해 나이키, 아디다스, 갭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도 i-패션 기술에 흥미를 나타내고 있다. 활용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모자, 장갑, 안경에서부터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시트를 설계할 때도 i-패션 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골프브랜드인 엘로드는 이미 i-패션으로 맞춤형 골프장갑을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그는 “과거 대량생산에서 현재의 다품종 소량생산을 뛰어넘어 앞으로는 소비자 취향에 맞는 맞춤형 양산이 주를 이루는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날 것”이라며 “i-패션이 이런 기술을 이끌 것”으로 기대했다. 나를 옷에 맞추는 대신 옷을 나에 맞추는 ‘패션 2.0’ 시대가 머지않았다.

독일에선 ‘매직거울’ 보고 옷 산다

지난 8월 29일부터 9월 3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가전박람회인 IFA가 열렸다. 관람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초대형 옴니아폰(삼성전자)부터 손가락을 대면 반응하는 터치스크린 디스플레이(LG전자)까지 최첨단 가전기기들이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인기를 끈 것은 ‘가상거울’(Virtual Mirror). 독일 프라운호퍼 통신연구소 안나 힐스만 박사는 e메일 인터뷰에서 가상거울을 “일종의 의류 쇼핑 도우미”라고 소개했다. 쇼핑객이 가상거울 앞에 서서 옷을 선택하면 마치 마술처럼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나타난다.

힐스만 박사팀이 이를 위해 고안한 방법은 가상거울 위쪽에 카메라를 달아 쇼핑객을 실시간으로 찍는 것. 카메라는 수 밀리초 간격으로 쇼핑객을 촬영한 뒤 이 이미지들을 컴퓨터로 전송한다. 쇼핑객이 옷을 선택한 뒤 입으면 컴퓨터는 이를 토대로 다른 색과 무늬의 옷을 입었을 때 모습을 거울에 나타낸다. 옷을 입었을 때 구김과 늘어지는 정도까지 자세히 표현돼 실제로 옷을 입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가상거울은 2006년 아디다스가 파리에 플래그십 스토어(브랜드의 성격과 이미지를 극대화한 매장)를 열면서 시작됐다. 당시 아디다스의 요청으로 힐스만 박사팀은 다리와 신발을 스캔해 가상으로 신발을 갈아 신을 수 있는 가상거울을 개발했고, 이 기술을 최근 의류까지 확대했다.

힐스만 박사는 “가상거울은 옷이나 신발뿐 아니라 안경이나 보석 등 적용할 수 있는 범위가 무궁무진하다”며 “아직은 쇼핑객이 입은 옷의 색이나 무늬만 바꾸는 2차원 기술이지만 3차원 기술로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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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이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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