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주대장경 속장경 팔만대장경으로 이어지는 고려의 장경들은 그 당시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기술을 보여준다.
인쇄기술은 상감청자 기술과 함께 고려기술의 발전을 대표하는 창조적 전통의 소산이다.
고려의 목판인쇄기술은 대규모의 대장경 주판(雕板)사업으로 특징지어진다. 고려의 기술자들과 불교적 신앙심이 두터웠던 고려귀족들의 손과 마음을 통해 이루어진 인쇄기술은 무척 높은 수준이었고 규모가 큰 것이었다.
●- 한장씩 운반해
국가적인 사업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큰 프로젝트를 몇번이나 추진하고 그때마다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던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고려사람들은 한번에 몇만장의 목판을 새겨서 그 방대한 대장경을 인쇄해냈다. 수천명이 몇년씩 걸리는 큰 일이었다.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한마음에서 그들은 그 일을 추진했다. 대장경을 펴 내면서 부처님께 나라를 보호해 달라고 호소했다.
해인사에 지금 보존돼 있는 팔만대장경의 목판은 그 사실을 극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8만여장의 목판이 하나같이 똑같게 제작돼 7백50년의 긴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합천 해인사에 가서 대장경 판고 안에 들어가서 있으면 8백년 전의 먼 옛날에 타임머신을 타고 가 있는 듯한 환상적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0세기 말의 첨단기술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지금 보아도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대장경판. 13세기 전반기, 처음 제작되었을 당시의 그 기술적 노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나라를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구하려는 간절한 마음을 불천(佛天)에 호소하는 종교적 열정이 없었더라면 그 일은 성취되기 어려웠으리라.
우리에게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으로 알려지고 있는 재주대장경(再雕大藏經)은 8만6천6백88장의 목판이다. 세로 26.4cm, 가로 72.6cm, 두께 2.8~3.7cm 무게 2.4~3.75kg이 그 제원이다. 그리고 제주도 완도 거제도에서 나는 후박(厚朴)나무가 그 재료다. 전체의 무게가 자그마치 26만kg. 4t 트럭으로 환산하면 65대의 분량이다.
물론 고려시대의 운송수단은 배와 수레가 전부였다. 이 엄청난 재료를 5백대 이상의 우차로 운반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사람이 한장씩 운반했을 것이다. 그것은 하물이 아니고 불경(佛經)이었기 때문이다. 강화도에서 만들어 합천 해인사까지 바닷길과 산길을 통과, 마침내 '봉안'(奉安)할 때의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먼저 쓰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역사가는 역사가대로, 민속학자는 민속학자라서, 과학자는 현대과학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아무도 이런 상황을 계량적으로 분석, 재구성해 보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작업의 결과 못지 않게 그 과정도 중요시해야 한다. 과학기술사는 역사다. 역사는 과정의 기록에서 출발한다. 과학적인 분석과 실험적인 접근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 후박나무를 재료로
대장경판의 제작으로 다시 돌아가자. 대장경 판목은 양쪽에 편목(片木)을 끼어 붙이고 네 귀에는 청동판으로 된 직사각형의 띠를 둘러쳐서 판목이 뒤틀리지 않게 했다. 이런 제작수법은 다른 목판에서는 볼 수 없는 기술이다. 이것은 목판을 온전하게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 재료로 후박을 썼다는 사실도 그런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후박나무를 수년 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소금물에 찌서 진을 뺀 뒤 다시 수년동안 그늘에서 말렸다고 한다. 그리고 판목에 크기대로 다듬어서 글자를 새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우리나라가구용 목재의 전통적 처리방법과 같다.
그래야만 목판이 단단해져 뒤틀리지 않고 갈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거기에다 또 전면에 얇게 옻칠을 했다. 이렇게 처리했기 때문에 8백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보존상태가 매우 좋아서 뒤틀리거나 갈라진 판목이 거의 없다.
목판면의 주변에는 세로 24.5cm, 가로 52cm의 테를 둘렀다. 그러나 괘선은 치지 않았다. 한면은 23행이고 한줄에 14자를 새겼다. 글자의 크기는 약 1.5㎠이고 앞뒷면에 경문을 새겼다. 판의 한쪽 끝에는 작은 글자로 된 경명(經名) 권차(卷次) 장수 및 천자문 순서로 된 함수(函數)의 번호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경판들 중에는 판본 및 판면의 가로·세로 길이와 행수 자수 글자의 크기들이 꼭 같지 않은 것들도 있다. 또 윤곽과 괘선이 있는 것, 한면만 조각한 것도 있다. 16년이라는 장기간 동안 제작하면서 때에 따라 제작기법이 조금씩 달라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판목의 크기에서 나타나는 차이도 오랜 제작기간에서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팔만대장경.
학자들은 그것을 재주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 부른다. 11세기 초에 제작됐던 1만여권에 달하는 대장경이 불행히도 1232년의 몽고침략으로 모두 불타 버리고 말았다. 고려정부는 강화도로 쫓겨가고 적을 몰아낼 가망이 희박해지자 더욱 불심에 의존하게 되었다. 현종 때(11세기 초) 거란의 침략군을 몰아내기 위해 대장경을 각판했을 때와 같이 이번에도 대장경을 다시 조판했던 것이다. 그래서 재주대장경이다. 현종 때의 대장경은 초주대장경이라 부른다.
●- 통풍은 잘 되게, 습기는 안차게
강화도로 쫓겨간 고려정부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이라는 대장경판 제작을 위한 특별기구를 설치했다. 곧 이어 국력을 기울인 목판제작사업을 전개했다. 1236년(고종 23년)에 임시수도인 강화도에 본부를 두고 분사(分司 )를 진주 부근의 남해도(南海島)에 설치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1237년에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나오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은 대장경에 관한 가장 자세한 문헌이다.
착수한지 16년만에 완성된 8만6천여장의 대장경 판본은 강화도성(城) 서문(西門) 밖의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보존되었다. 이 당시 건물은 어떤 것이고 경판은 어떤 식으로 보존됐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그리고 언제 현재의 합천 해인사로 옮겨져 보존되기 시작했는지도 정설이 없다. 이는 김두종(金斗鍾)씨가 그의 저서 '한국고인쇄문화사'(韓國古印刷文化史, 서울, 1980년)에서 밝히고 있다.
그가 요약한 바에 따르면, 재주대장경판들은 고려 말까지 강화도에 보관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1398년(태조 7년) 5월에 강화 선원사(禪源寺)로 부터 일단 서울 서대문 밖 태평관(太平館) 근처인 지천사(支天寺)에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름 장마철을 보낸 다음 그해 가을에서 겨울에 이르는 사이에 해인사로 옮겨져 안치됐다는 것이다.
고려 때 강화도의 경판보존고가 어떤 건물이었는지, 그것이 현재의 해인사 보존고와 어떤 기능적 공통점이 있는지는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조선시대의 보존고는 8만6천여장의 방대한 목판을 보존하는데 가장 이상적인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아울러 그 자연환경에 잘 어울리는 설계로 건축되었다.
해인사의 대장경 판전(板殿)이라고 불리는 건물은 모두 2동이다. 판전은 그 구조와 건물위치가 통풍이 잘 되고 습기가 차지 않도록 설계됐다. 또 판전은 장방형의 1자집인데 앞과 뒤에 통풍용 창이 나 있다. 경판고 앞쪽의 창은 아래쪽에 내고 뒤쪽은 위에 통풍용 창을 내었다.
판목은 옆으로 세워서 차곡차곡 끼워 넣게 만든 판가(板架)에 보존하게 해 놓았다. 경판고의 이런 구조와 판가의 배치, 그리고 경판목을 끼워넣는 방식 등은 실로 과학적인 것이었다. 통풍이 잘 되게 하고 습도의 큰 변화가 없게 하려는 잘 계획된 설계였다.
이런 생각을 일찍부터 가지고 있던 사람은 과학평론가 박익수(朴益洙)씨였다. 그는 나에게 자기의 생각이 틀림없다는 주장을 정연한 이론을 바탕으로 전개하곤 했다. 그의 분석적 아이디어는 몇번에 걸친 나의 현지답사를 강행하게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의 이론이 과학적으로 무리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 기술고고학적으로 접근해야
이제 그런 생각을 실험적으로 정리해 보자. 통풍용 창문은 남북으로 트여 있다. 한국의 전통한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험적으로 증명된 바람이 잘 통하는 구조다. 공기는 아래 통풍창으로 들어오는데 판가 사이에 목판이 평형하게 옆으로 세워져 있을 때 잘 통한다. 판목 양쪽에 끼워 붙인 편목 때문에 무수하게 뚫린 틈새로 골목바람을 일으켜 가면서 굴뚝의 연기처럼 위로 올라간다. 위로 올라간 공기는 뒤쪽 위에 나있는 통풍창으로 흘러 나갈 것이다.
해인사의 판전은 판목의 보존창고로는 아주 이상적인 건물로 설계되고 지어졌음에 틀림없다. 판고에 들어서 보면 그 안의 공기가 상쾌함을 피부로도 느낄 수 있다. 이 느낌은 앞으로 측정계기를 활용, 정확한 데이터로 작성해 볼만 하다. 그러면 실험적으로 증명이 될 것이다. 기술고고학적 연구가 여기에도 필요하게 된다.
재주대장경은 그 내용이 정확하고 글씨(字體)가 아름다우며 목판제작기술이 뛰어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판본이다. 그래서 그것은 고려대장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아시아에서 20여종의 대장경이 간행됐다. 그중에서 고려대장경은 가장 으뜸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려의 목판인쇄는 팔만대장경판의 제작과정에서 최고의 기술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종교적으로도 그 의미는 대단하다. 고려의 불교가 대장경의 조판에 이르러 하나의 정리를 이룩하게 되었다. 고려불교의 교리가 여기서 정리됐다는데서도 의의가 있다.
이렇게 고려의 목판인쇄기술은 불교경전의 인쇄반포에 고무돼 발전했다. 여러 사찰에서 소규모의 불경인쇄를 해온 기술이 축적돼 오다가 1011년(현종 2년)의 초주대장경 조판을 계기로 국가적인 사업으로 확대되었다. 기술혁신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 초주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으로 수도인 송도가 함락되면서 국가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제작됐다. 남은 길은 불력(佛力)에 호소하는 수 밖에 없다고 믿어 국력을 기울여 조판하기를 발원(發願)하고 서약한 결과였다. 국왕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이 종교적으로 승화돼 나타난 기술혁신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기술의 '중앙집권'이 다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중앙에 대장도감 같은 특별기구가 설치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모든 경비는 국고에서 부담하고 경판의 제작은 각 지방의 여러 사찰에서 분담해 추진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제작사업은 70여년이 걸렸다. 참으로 끈질기게 해낸 일이었다. 그 분량은 5천축(軸)에 달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오랜 세월동안 그 많은 목판을 만들면서 이루어진 기술의 향상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업은 당시 고려에 수입된 수많은 당(唐) 송(宋)판 한역(漢譯) 대장경들을 거의 망라한 것이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그 경판들은 1232년 몽고침략의 전화로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 초주대장경의 비극
초주대장경의 인본들은 지금 일본 교토(京都)의 난젠지(南禪寺)에 3백10첩(帖)이 비장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는데, 최근에 10여첩이 발견되었다.
교토의 난젠지는 내가 여러차례 가본 멋있는 절이다. 지금도 이 글을 교토대학의 내 방에서 쓰고 있지만, (필자는 현재 연구를 위하여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에 체류중임-편집자) 난젠지에 비장된 11세기의 대장경은 아직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아쉬움에는 퍽 익숙해져 있다. 한국의 과학기술사 연구 30년의 길목에서 늘 그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진으로 본 초주대장경본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너무도 당당하고 멋있는 인쇄본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에서는 그후 이른바 의천(義天)의 속장경(續藏經) 판각사업이 11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1091년(선종 8년)부터 1101년(숙종 6년)에 이르는 동안에 전개된 작업에서 두루마리 4천8백57권이 인쇄·제작되었다. 그 인본 중 40권이 지금 일본의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에 남아 있다. 그것은 송판본(宋板本)을 그대로 모각한 것이 아니고, "자체(字體)는 송판본 보다 청아(淸雅) 단정(端正)하다"고 김두종씨는 평가했다.
송판본의 아름다움에 끌려 그런 인쇄본을 갖고 싶어했던 고려의 귀족들이 그보다 나은 판본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려의 목판인쇄기술은 마침내 세계최고 수준에까지 이를만큼 발전했다.
고려대장경은 오랜 기술의 축적이 이루어 낸 목판인쇄기술의 완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