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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추위에 강한 생물자원의 보고

1g에 1000만 원 ‘천연부동액’을 찾아라

러시아 시베리아 반도와 미국 알래스카 사이 남쪽에 있는 베링해. 명태, 대구, 연어, 넙치, 게가 풍부한 이곳은 미국 어획량의 절반, 러시아 어획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황금어장’이다.

최근 베링해에서 조업을 하는 어부들이 베링해협을 넘어 예전엔 상업적 조업이 거의 없었던 바렌츠해와 뷰포트-추크치해 같은 북극해로 이동하고 있다.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바닷물이 따뜻해져 어장이 북쪽으로 이동한 탓이다.

어부들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동해안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해 천혜의 어장을 형성하는 곳이었지만, 이젠 한류보다는 난류성 어종이 더 많이 산다. 동해 명태잡이 선단이 북쪽 바다로 이동한지는 이미 오래됐다.

따뜻한 바닷물을 피해 달아난 생물자원을 따라 북극으로 몰려드는 이들은 어부 말고도 또 있다. 바로 북극 생태계를 연구하는 극지생물학자들이다. 그들은 왜 북극으로 달려가는 걸까.
 

극지 얼음 속에 사는 식물플랑크톤‘파에오시스티스’ (Phaeocystis)는 영하 50℃ 얼음 속에서도 죽지 않는다.


생물학자들이 북극으로 간 이유

북극으로 몰려든 극지생물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구온난화에 관심이 많은 미생물학자다.

이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북극 생물은 조류(藻類), 균류, 원생동물류 같은 미생물이다.
극지에만 서식하는 미생물은 생존의 최저온 한계점에서 적응해왔기 때문에 작은 환경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즉 미생물이 북극의 환경변화를 감지하고 감시하는 파라미터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들 미생물 중 해양 표층에 서식하는 부유성 조류인 식물성플랑크톤은 해양생태계 먹이사슬의 1차 생산자라는 점에서 북극 해양생태계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북극 미생물은 대부분이 높은 영양염과 유기물이 포함된 해빙 주변에 살기 때문에, 얼음 분포의 변화는 미생물 서식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 변화는 미생물을 먹고 사는 동물성플랑크톤에 영향을 주어 이에 의존하는 어류, 물개, 고래 등과 같은 큰 동물에 영향을 주어 북극해 전체 해양생태계의 변화로 이어진다.

‘변화의 릴레이’는 이미 시작됐다. 최근 보고에 따르면 1년 중 대부분이 얼음으로 덥혀있던 뷰포트해, 추크치해, 그린란드해 등 북극해 전체가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해빙(海氷)의 두께와 크기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해마다 해빙의 위치가 점점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미생물의 분포도 달라졌고, 베링해 등 남쪽에 살고 있는 연어, 바다새, 회색고래, 물범 같은 동물들도 먹이를 따라 뷰포트해 동쪽과 북쪽으로 이동했다. 이를 먹이로 삼는 북극곰도 따라 이동했음은 물론이다. 극지생물학자들은 기후 변화에 재빨리 반응하는 미생물을 추적해 북극에서 일어나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환경 변화를 감지하고 예측한다.

북극의 미생물은 고미생물학자나 우주생물학자에게도 관심의 대상이다. 지구의 생성 역사를 설명하는 ‘눈덩이 지구’ 가설에 따르면, 지구는 7억 5000만 년 전부터 5억 7000만 년 전까지 적도 바다까지 얼고 녹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 뒤 빙하기가 끝나고 대륙이 다시 조각나면서 해빙기가 올 때 산소를 내뿜는 박테리아와 ‘진핵세포’로 불리는 다세포 유기물이 지구에 처음 등장했다. 따라서 고미생물학자에게 수천, 수백만 년 동안 영구동토층 안에 ‘냉동보존’ 돼 온 다양한 미생물은 생명 진화의 비밀을 푸는 열쇠나 다름없다.

한편 우주생물학자들은 얼음 속 미생물에서 외계 생명체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이들은 화성과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는 지구 남북극의 환경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지구에서 발견한 저온 생명체를 다른 천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 6월 말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화성에 보낸 탐사로봇 ‘피닉스’가 화성 북극 동토지대에서 탐사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해마다 줄어드는 북극 해빙^지구온난화 영향으로 북극 해빙의 넓이가 급격하게 줄고 있다. 2007년에는 해빙 넓이가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영하 50℃에서도 살아남는 비밀

북극으로 달려가는 극지생물학자들이 눈독을 들이는 진짜 ‘보물’은 따로 있다. 바로 북극의 얼음에 사는 미생물 몸속 결빙방지물질이다.

북극 얼음 속에 사는 식물플랑크톤, 돌말, 균류와 같은 미생물은 영하 50℃의 얼음 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는다. 이들 미생물은 세포 안과 주변에 다당류, 지질, 지방산, 단백질 등으로 이뤄져 있는 천연 ‘결빙방지물질’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결빙방지단백질(AFPs, Antifreeze Proteins)은 얼음 표면에서 물 분자와 수소결합해 얼음 결정의 성장을 방해하고, 얼음과 얼음 사이의 결정에 세포가 눌려 파괴되는 일을 막는다. 그래서 결빙방지단백질을 분비하는 미생물은 얼음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세포 주변에 분비된 AFPs덕분에 얼음결정에 파괴되지 않고 살아 남아있다.

저온생물학자들은 북극 미생물에서 뽑은 AFPs의 유전자를 대장균 유전자와 합성한 뒤 이를 대량 생산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AFPs를 인체 장기나 성체 또는 배아 줄기세포, *제대혈, 혈액, 골수 같은 세포와 조직을 오랫동안 냉동 보존하는데 활용할 셈이다.

예컨대 헌혈한 혈액(전혈)에 항응고제를 넣은 뒤 이를 냉장 보관하면 유통기한이 35일 정도지만, AFPs를 넣어 더 낮은 온도에서 냉장보관하면 유통기한을 더 늘릴 수 있다는 뜻이다.

AFPs는 생명공학뿐만 아니라 농업에도 활용될 수 있다. 저온숙성을 해야 하는 유가공 식품에 이를 활용하면 더 낮은 온도에서 얼지 않은 상태로 유제품을 숙성시킬 수 있어 제품생산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또 감자 같은 고랭지 작물에 적용하면 냉해에 견디는 능력이 좋아져 생산량이 늘고 더 추운 곳까지 농경지를 확대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AFPs로 암세포를 파괴하는 저온수술이 시도되고 있다. AFPs는 낮은 농도에서는 얼음결정의 성장을 억제하지만, 농도를 높이면 오히려 얼음을 한 방향으로 성장시킨다. 그 결과 바늘모양 얼음을 만들어 세포를 파괴한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린다 팜 교수는 AFPs를 이용한 저온수술로 생쥐에 생긴 피부 암세포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을 1999년 실험으로 처음 보였다. 보통 피부암 세포는 수술로 모두 제거하기 힘들다. 하지만 농도가 10mg/l인 ‘AFP I’이라는 결빙방지물질을 생쥐 피부 암세포에 주입한 뒤 온도를 0℃ 이하로 낮췄다 올리기를 반복하니 암세포만 깨끗하게 파괴됐다.

현재 국내에서도 결빙방지물질을 활용한 냉동수술을 시행하는 병원들이 몇 군데 있지만, 화학적으로 합성해 만든 결빙방지물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가격이 비싼 편이다. 하지만 생명공학적 방법으로 결빙방지물질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면 수술비를 크게 낮출 수 있을 전망이다.


극지연구소 생물배양실에서 극지 미생물을 보고 있는 강성호 박사. 극지연구소는 극지 식물과 미생물 50여 종을 확보해 연구용으로 배양하고 있다.


천연 결빙방지단백질 1g에 1000만 원

1992년 지구정상회담에서 각국의 생물자원 주권을 인정하는 ‘생물다양성보존협약’이 체결된 뒤 세계 각국은 자국의 생물자원뿐만 아니라 극지에서 특이한 생물자원을 확보하려는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생물자원을 먼저 발견한 국가는 연구나 상업적 활용에 우선권을 갖는다.

현재 결빙방지물질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이 1970년대 남극해에 사는 물고기의 피에서 추출한 천연 결빙방지물질은 1g당 1000만 원을 호가한다. 앞으로 가격이 얼마나 떨어질지 모르지만 유용한 생물자원을 독점할 경우 ‘부르는 게 값’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극지 생물을 연구해 결빙방지물질을 상용화한다면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큰 ‘냉동보존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

다행히 현재 우리나라는 저온에서 사는 극지 식물과 미생물 50여 종을 확보한 상태로 미국, 일본, 독일과 함께 세계에서 선두주자에 속한다. 지난 6월에는 극지연구소 극지해양생물연구팀이 북극 다산기지 인근 콩스표르덴 빙벽주변의 바다에서 AFPs를 분비하는 새로운 미생물 1종을 추가로 발견해 다산기지의 이름을 딴 ‘다사넨시스’(dasanensis)라는 학명으로 국제학술지인 ‘국제미생물분류학회지’에 등록을 마쳤다.

지구온난화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북극의 생태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어제까지 있던 종이 오늘 사라지기도 하고, 신종이 새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장 시급한 일은 지구온난화를 막는 일이지만, 그 이면에 생물자원에 대한 세계 각국의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대혈*

분만 시 탯줄에서 채취하는 혈액으로 적혈구, 백혈구 같은 혈액 성분을 만들어내는 조혈모(造血母) 세포가 풍부하다.


지난 6월 강성호 박사팀이 북극 다산기지 인근에서 발견해 학계에 보고한 신종 미생물‘다사넨시스’. 다산 기지의 이름을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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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성호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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