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우우~”
펄럭이는 태극기를 매단 한척의 쇄빙선이 바다 위에 얼어있는 해빙을 깨뜨리며 북극점을 향해 전진한다.
“빠지직~ 빠지직~” 쇄빙선이 엄청난 힘으로 얼음을 밀어붙여 얼음들이 쉴 새 없이 갈라진다. 선내 수족관에는 과학자들이 항해 중 연구용 샘플로 채취한 바다생물들이 분주하게 헤엄친다. 선실에서는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실시간 들어오는 과학 데이터를 분석하느라 바쁘다.
내년 취항할 우리나라 최초의 쇄빙선 ‘아라온’(ARAON)의 모습을 미리 그려봤다. ‘아라온’은 바다를 뜻하는 순우리말인 ‘아라’와 전부 또는 모두를 나타내는 관형사 ‘온’을 붙여서 만든 이름으로 전 세계 해역을 누비라는 뜻이 담겨있다.
쇄빙선, 얼음 위로 올라타 짓눌러 깬다
21세기 들어 북극권에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북극의 해빙이 급속히 줄면서 그동안 접근하기 힘들었던 북극권 자원과 항로에 세계 각국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북극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들까지 극지 연구와 자원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 전쟁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얼음을 깨고 나가는 배’인 쇄빙선. 물론 쇄빙선이 실제로 망치나 드릴로 얼음을 부수는 건 아니다. 같은 급의 보통 선박보다 추진력이 2~4배 강한 엔진으로 마치 씨름에서 밀어치기를 하듯 얼음을 밀어 깨뜨린다. 배의 앞부분은 보통 선박의 2배 두께의 강철판으로 이뤄져 단단한 얼음 덩어리와 부딪혀도 끄떡없다.
얼음 두께가 단지 밀어치기로 깨기에는 좀 두꺼울 경우 쇄빙선이 얼음 위에 직접 올라가 체중으로 눌러 깨뜨리기도 한다. 쇄빙선 바닥에는 물탱크가 여러 개 연결돼 있는데, 이 물탱크 속의 물을 배 뒤로 보내면 뱃머리 부분이 가벼워져 약간 들려 배가 얼음 위로 올라탄다. 배가 얼음 위에 올라탄 뒤 배꼬리의 물을 여러 물탱크를 거쳐 다시 배 앞쪽으로 보내면 배가 앞쪽으로 쏠리면서 얼음을 짓눌러 깨는 원리다.
쇄빙선은 주로 북극해에 인접한 나라들이 빙해역에서 항로를 개척해 화물수송을 하거나 빙해역을 운항하던 선박이 빙해 속에 갇힐 경우 이를 구조하는 역할을 해왔다. 연구 목적으로 지어진 쇄빙선이 등장한 때는 1960년대 이후 세계 각국이 남극에 경쟁적으로 연구기지를 세우면서 부터다. 현재 남극에 기지를 둔 20개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와 폴란드 두 나라만 쇄빙선이 없다.
북극 향한 스위치는 이미 ‘On’
2004년 설계를 시작해 지난 1월 착공에 들어간 아라온이 내년 출항하면 우리나라도 여엿한 쇄빙선 보유국이 된다. 2011년 남극에 세워질 대륙기지에 물품을 보급할 뿐만 아니라, 북극해의 자원을 탐사하고 연구를 하는 ‘바다 위의 연구소’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6950t급 쇄빙선 아라온은 외국 쇄빙선에 비해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연구 수행 능력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해양생물, 해저지질, 자원, 해양, 대기, 빙하 등 극지와 해양연구 관련 장비만 60여 종이 실린다. 게다가 큰 쇄빙선이 접근하기 어려운 수심이 얕은 빙하에도 접근할 수 있어 국지적인 연구조사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라온의 연구능력에 대한 세계 각국의 관심은 벌써부터 뜨겁다. 캐나다는 자국의 북극지역에 있는 연구기지인 ‘레졸루트’를 개방해 한국과 공동실험실을 설치하는 대신 아라온을 공동으로 활용하자는 제안을 극지연구소에 해 와 현재 활발하게 협의가 진행 중이다. 지난 6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31차 남극조약당사국회의(ATCM)에서도 우리나라가 쇄빙연구선 건조 현황을 발표하자 참가국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각국 대표들은 아라온을 이용해 어떤 연구를 할 수 있는 지, 쇄빙선 운항 일정은 어떻게 되는 지 질문을 쏟아냈다.
아라온의 ‘온’은 ‘켜 있는 상태’를 뜻하는 영어 ‘on’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북극 전쟁에 뛰어든 우리나라 의지의 스위치는 이미 켜진 셈이다.
북극으로 몰려드는 ‘얼음 깨기’의 귀재들
※이름, 배수량, 선체길이, 선폭, 최고속력, 건조년도 순
쇄빙선은 1837년 증기엔진을 이용해 만든 미국의 ‘시티 아이스 보트 1호’를 시작으로 초기에는 주로 해안선 근처를 운항하는 목적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극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경쟁적으로 쇄빙선을 건조하기 시작해 현재 세계 각국의 연구용 쇄빙선만 40여 척에 이른다.
쇄빙선을 이용한 북극 탐사에 가장 열을 올리고 있는 나라는 러시아다. 1864년 미국보다 약 30년 늦게 첫 쇄빙선 ‘파일럿’을 만든 러시아는 1959년 세계 최초로 원자력을 추진력으로 사용하는 쇄빙선 ‘레닌’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 2007년 핵추진 쇄빙선 ‘승전 50주년 기념호’를 출항했다. 이 쇄빙선은 2만 5000t 급 규모에 선체 길이가 159m, 선폭이 30m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크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중 4척의 쇄빙선을 처음 건조한 뒤 1970년대 핵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쇄빙선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출력을 가진 ‘폴라스타’와 ‘폴라씨’를 만들어 북극해 탐사를 벌이고 있다.
캐나다 역시 북극해 주변에서 천연자원을 활발하게 개발하면서 1978년 2만 8000t 급 쇄빙선 ‘아틱’을 건조했고, 영국은 1992년 5700t 급 ‘제임스 클락 로스’, 노르웨이는 2001년 3500t 급 ‘폴라뵤른’을 각각 건조하며 쇄빙선 경쟁에 뛰어들었다.
우리나라의 이웃인 중국과 일본도 전력이 만만치 않다. 중국은 1993년부터 이미 1만t 급 쇄빙선 ‘설룡’을 운영하고 있으며, 1982년 ‘시라세’를 만들어 일찌감치 극지탐사에 나선 일본도 같은 이름의 1만 2700t 급 쇄빙선을 내년에 출항할 예정이다.
2009년 첫 출항하는 우리나라의 쇄빙선 ‘아라온’은 규모가 큰 편은 아니지만 최첨단 연구장비로 무장해 연구 수행 능력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09년 9월 첫 출항 예정인 쇄빙선 아라온은 남극과 북극기지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보급선’ 역할뿐만 아니라, 60가지가 넘는 최첨단 연구 장비를 갖추고 세계적 수준의 과학연구를 하는 ‘떠다니는 실험실’ 역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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