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한 대 설계하는 데 걸리는 시간 약 1년. 휴대전화 한 대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데 걸리는 시간 약 5개월. 그런데 만약 마우스 클릭 한 번만으로 자동차와 휴대전화를 눈 깜짝할 새 설계할 수 있다면? 아마 자동차와 휴대전화 가격은 내려가고 저마다 다른 디자인의 차를 타며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휴대전화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이들이 있다.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김윤영 교수가 이끄는 멀티스케일 설계 연구단이 바로 그들이다.
무엇이든 설계하는 ‘마법 상자’
연구단의 ‘비법’은 자동설계기술. 자동설계란 설계 목적과 조건만 입력하면 컴퓨터가 알아서 최적의 설계도를 그려내는 기술이다. 연구단은 이 ‘마법 상자’를 이용해 2002년부터 CD와 DVD플레이어에 사용하는 레이저 구동장치, 초소형 광학거울에 쓰이는 열구동기, 자동차 히터 등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기지국 중계기로 들어온 광신호를 여러 방향으로 보내는 초소형 거울을 만든다고 하자. 이 거울을 움직이기 위해서 6V 정도의 낮은 전압에서도 잘 회전하고 가로세로가 800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 정도인 열구동기가 필요하다면 컴퓨터에 구동기의 전압과 길이만 입력하면 된다. 그 뒤 컴퓨터는 알아서 기존 구동기보다 회전각을 2배 이상 높인 구동기를 그린다.
하지만 컴퓨터가 설계도를 ‘뚝딱’하고 한 순간에 그리는 것은 아니다. 컴퓨터에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이 바로 자동설계기술의 비밀이다. 연구단은 기계적 움직임, 열, 전기, 자기, 음향 등 여러 가지 물리현상을 분석해 설계 목적에 맞는 알고리즘을 개발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법 상자’ 안에서는 최종 설계물이 완성될 때까지 컴퓨터에 프로그래밍 된 알고리즘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셈이다. 컴퓨터는 다양한 변수와 설계 목적을 고려해 설계와 해석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마찰력이나 열 같이 추가로 발생하는 설계 변수까지 계산해 최적화된 설계를 찾아낸다.
김 단장은 “자동설계기술을 이용하면 설계 시간을 최대 1만분의 1 이하로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기존 방식으로 설계하면 1년이 걸릴 일을 자동설계기술을 이용하면 52분 만에 끝낸다는 뜻이다.
자동설계기술이 설계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이유는 설계 초기부터 모든 물리적 변수를 고려해 시행착오를 줄이기 때문이다. 가령 인류는 수백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경험적으로 아치형 다리가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리를 설계하는 사람의 직관에 의존하거나 설계물에 변형을 가한 뒤 실험과 해석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에 수백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반면 자동설계기술에서는 처음부터 강의 폭, 다리가 받는 무게, 강물의 유량을 변수로 삼아 수학적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클릭 한 번으로 5분 만에 가장 안전한 아치형 다리를 그린다.
자동설계는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형태를 디자인 할 수도 있다. 기존 형상이나 고정된 틀에 매이지 않고 가장 이상적인 모델을 찾기 때문이다. 김 단장은 “기존의 설계가 밑그림을 조금씩 지우고 고치며 완성하는 방식이라면 자동설계는 백지에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그리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고정된 틀이 없다고 해서 황당무계하거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설계도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소음을 흡수하는 데 사용되는 흡음재 대부분은 현재 삼각뿔 모양이다. 연구팀은 자동설계기술을 이용해 설계한 결과 흡음재를 풍뎅이 모양으로 만들었을 때 100Hz 영역의 소음 흡수율이 약 4배 향상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김 단장은 “풍뎅이 모양 흡음재는 삼각뿔 모양 흡음재가 잘 흡수하지 못하는 10~400Hz 진동수 음까지 흡수한다”고 자랑했다.
비행기 안전 책임지는 트랜스듀서
2005년 연구단이 자동설계기술로 개발한 Z형 자기변형 트랜스듀서는 히트 제품 중 하나. 트랜스듀서는 비행기 날개나 기름을 운반하는 송유관 같은 각종 구조물의 안전성을 감지하는 데 쓰인다. 트랜스듀서의 자석과 코일이 자기장을 만들면 우리 몸에 붙이는 ‘파스’ 같은 패치 형태의 자기변형 물질이 늘었다 줄었다 하며 초음파를 발생시킨다. 그런데 구조물이 파손되면 초음파가 변형돼 돌아오거나 센서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센서가 변형된 초음파를 감지하면 초음파의 속도와 도달 시간을 분석해 문제가 생긴 지점을 재빨리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기존 일자형 트랜스듀서는 감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김 단장은 “트랜스듀서의 감도를 높이고 이상 부위를 잘 찾아낼 수 있는 비틀림파 같은 특정 초음파를 발생시키려면 패치의 형상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비틀림파는 파의 진행방향과 진동방향이 90。를 이루는 초음파의 일종으로 신호 왜곡 현상이 가장 적어 이상 부위를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다. 연구단은 자동설계기술로 설계한 Z형 트랜스듀서가 기존 일자형 트랜스듀서보다 신호 출력이 13배 높고 품질도 3배가량 우수해 이상부위를 쉽게 진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전통적인 설계 방식으로 원하는 패치 형상을 찾아내려면 패치에서 발생하는 자기장과 초음파뿐 아니라 온도, 이력현상(과거에 받은 자기력에 따라 패치의 변형 정도가 달라지는 현상) 같은 여러 현상을 수식화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 복잡하고 해석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현실적으로 수행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연구단은 실험에서 패치의 기계적 변형, 발생하는 초음파 등 핵심적인 물리 현상만을 추출해 설계에 적용하는 현상학적 모델링(PMD) 기법을 개발했다. 그리고 이를 자동설계에 적용해 설계 시간을 크게 줄였다.
Z형 트랜스듀서는 2007년 전기공학국제심포지엄(ISEF)에서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외국 대학과 연구기관의 ‘러브콜’도 끊이지 않고 있다. 연구단의 윤길호 박사는 자동설계의 핵심기술 중 하나인 ‘요소연결매개기법’(연결 부위에 스프링이 있다고 가정해 원하는 형상을 찾는 방법)을 개발한 성과를 인정받아 2005년 덴마크 공대 교수로 임용됐다. 미국의 일리노이대와 네덜란드 델프트대 같은 외국 대학에서 온 연구원들이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연구단에 몇 달씩 머물기도 한다.
김 단장은 문득 멀티스케일 설계 연구단의 구호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즐겁게 연구해서 남 주자”라고 이야기했다. 설계는 산업의 가장 기본이 되는 분야지만 그 자체가 돈을 벌기 위한 일은 아니다. 김단장은 설계 방법을 개발해 기업체에 기술을 이전해 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김 단장은 “앞으로 5년 정도면 트랜스듀서를 상용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단 1%의 가능성만 있다면 연구단은 무엇이든 도전할 것”이라며 포부를 밝혔다.
인터뷰_김윤영 단장
설계 분야에 ‘무한도전’
멀티스케일 설계 연구단은 두 가지 이상의 물리 현상이 동시에 작용하는 복합물리계에서 자동설계기술을 개발한다. 김 단장은 1990년대 중반부터 자동설계 연구를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최초였다. 외국에서도 미국의 일리노이대나 네덜란드 델프트대 등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시작도 하지 못한 분야였다. 이런 미개척분야에 도전한 이유는 그가 엔지니어로서 ‘어떻게 하면 좋은 제품을 빠르고 값싸게 만들 수 있을까’를 늘 고민했기 때문이다.
김 단장은 어려서부터 주어진 일에 안주하기보다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설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인은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상상력이다. 그는 종종 혼자서 영화나 야구 경기를 관람하러 가거나 생물학이나 의학 같은 다른 분야의 세미나에도 자주 참석 한다.
김 단장의 이런 성향은 연구단 운영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멀티스케일 설계 연구단은 웬만한 연구단이 약 10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수행할 연구 5~6개를 동시에 한다. 최근 김 단장은 생물학 세미나에 참가했다가 수정란 분화과정에서 영감을 얻어 세포의 분화 과정을 설계에 도입한 ‘신개념 유전알고리즘’도 개발하고 있다. 신개념 유전알고리즘은 처음에는 설계 변수 가운데 몇 가지만 고려해 빠르게 전체 형태를 설계한 뒤 세포가 분화하듯 설계 변수를 점차 늘리며 구체적인 모습을 설계하는 방식이다. 기존 방식보다 10배나 빠르게 설계할 수 있다.
자동설계 연구를 시작한지 10년이 넘은 베테랑이지만 그는 여전히 초심을 간직하고 있다.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새로운 설계를 시작할 때면 관련 연구 논문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읽는다.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하듯 창의적인 연구자가 되려면 관련 분야의 연구를 먼저 섭렵해야 합니다.”
김 단장은 자신의 연구 과정을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걷는 것’에 비유한다.
“발자국이 없는 눈 덮인 산길을 걷다보면 처음이라는 흥분도 느끼지만 한편으론 길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느끼죠. 하지만 언젠가 뒤를 돌아봤을 때 제가 걸어온 길을 보고 따라오는 후배와 제자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김 단장은 자신의 역할을 “설계 분야에 ‘창의적 상상력의 길’을 내는 것”이라며 “앞으로 설계 분야의 세계적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할 멀티스케일 설계 연구단을 지켜봐 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