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GP506’은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 공포물 ‘알 포인트’(2004년)로 유명한 공수창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영화에서 사건이 발생하는 GP(Guard Post)는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최전방 감시초소로 북한군의 침투나 매복을 조기에 발견하는 임무를 갖는다. 군인 20여명이 상주하는 GP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하다.
광견병 닮은 상상 속 질병
GP506에 급파된 노 원사와 군수사대는 생존자 한 명을 발견한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왕따’를 당한 것으로 알려진 강진원 상병(이영훈 분). 발견 당시 온몸에 피를 묻힌 채 도끼를 들고 서있던 강 상병은 단번에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그러나 강 상병은 의식불명으로 사경을 헤맨다.
한편 시체를 검시하던 군의관은 시신의 훼손 상태가 심하고 일부 사체의 피부에서 기괴한 흔적을 발견해 노 원사에게 알린다. 병사들 사이에 끔찍한 살육이 벌어진 것일까? 아니면 전염병이 돌았던 것일까?
GP를 샅샅이 뒤지던 군수사대는 또 다른 생존자 유정우 중위(조현재 분)를 발견한다. 유 중위는 GP 책임자로 사건의 전모를 밝혀줄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비무장지대에 순찰 나갔다가 실종된 병사들이 복귀하면서 부대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며 이들이 침을 흘리며 공격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증언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병사들의 증상은 광견병과 유사하다. 물론 증상이 호전됐다 악화되기를 반복하고 기억상실 증상을 보이는 점은 광견병에는 없는 것으로, 영화 속 질병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직까지 의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상상속의 질병에 가깝다.
광견병은 주로 너구리, 오소리 같은 야생동물에 잘 나타난다. 광견병에 걸린 짐승에게 물리면 누구나 광견병에 걸린다. 대개 집에서 기르는 개가 야생동물에게 물리고, 집주인이 이 개에게 물려 광견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일단 사람이 광견병에 걸리면 치사율이 99.9%로 매우 위험하다. 그런데 광견병에 걸린 짐승에게 물린다고 해서 사람에게 곧바로 광견병 증상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피부를 뚫고 몸에 들어온 광견병 바이러스는 신경을 따라 뇌로 이동하는데, 바이러스가 뇌에 침입해야 증상이 나타난다. 성인의 경우 물린 부위에 따라 바이러스가 뇌에 도달하는 기간은 발이 30일, 손이 15일, 얼굴이나 목이 7일 정도다.
따라서 광견병 감염 여부를 알 수 없는 짐승에게 얼굴이나 목을 물렸다면 무조건 광견병 치료제를 맞는 것이 좋고, 손이나 발에 물렸다면 먼저 짐승을 붙잡아 일주일 동안 관찰하면서 광견병 증상을 보이는지 확인하면 된다. 짐승이 광견병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면 굳이 치료제를 맞을 필요가 없다.
광견병에 걸린 짐승은 공격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겁에 질려 날뛰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물을 무서워해 예로부터 광견병을 ‘공수병’(恐水病)으로 부른다.
시간에 따라 증상 달라져
영화 중반 내무반을 수색하던 노 원사는 유 중위가 의무병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신분이 탄로 난 유 중위는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힌다. 자포자기한 유 중위는 사건의 진상을 고백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GP 병사들이 걸린 ‘전염병’은 초기엔 피부 발진이 나타나면서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지만 그 뒤 몇 시간 동안은 멀쩡한 상태가 되고 마지막에는 온몸으로 피부 발진이 퍼진다. 이렇게 시간에 따라 증상이 달라지는 질병이 있을까?
실제로는 영화에서처럼 증상이 급격히 변하는 괴상한 질병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질병은 시간에 따라 증상이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말라리아의 경우 흔히 ‘삼일열’이라고 불리는데, 환자는 이틀 동안 멀쩡하다가 3일째 되는 날 40℃가 넘는 고열 증상을 보인다. 고열증세를 보일 때를 제외하곤 너무 정상적이기 때문에 감기로 오인돼 몇 달씩 진단이 지연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말라리아가 휴전선 인근에서 풍토병처럼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비무장지대에 사는 야생동물이 말라리아 원충의 숙주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기가 말라리아에 걸린 야생동물의 피를 빨아먹은 뒤 사람을 물어 말라리아를 옮긴다.
홍역은 잠복기가 14일 정도로 처음에는 고열 증상이 나타나고 임파선이 붓다가 며칠 뒤 발진기에 들어가면 얼굴, 몸통, 팔다리 순서로 피부에 발진이 생긴다. 후기에는 피부껍질이 벗겨지며 병이 낫는다. 홍역은 대부분 어린아이들이 잘 걸리는데, 성인이 걸릴 경우 피부 발진이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고 폐렴과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
이처럼 같은 질병이라도 시간에 따라 혹은 누가 걸리느냐에 따라 증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 때문에 경험 많은 의사들도 환자를 보는 시점에 따라 때때로 오진을 하기도 한다.
영화 후반 노 원사는 병사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이유를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 상병이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부대원을 모두 죽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강 상병은 숙주를 죽여야만 바이러스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노 원사를 포함한 군수사대 전원은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군수사대 본 병력은 곧 GP506에 도착할 예정이다. 노 원사는 이대로 생존해서 이들에게까지 바이러스를 퍼뜨릴 것인가, 아니면 부대원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어야 하는 것일까.
숙주가 죽어도 바이러스는 산다
강 상병과 노 원사는 숙주를 죽이면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는 대기 중에 떠돌다가 적절한 온도와 습도, 영양분이 있는 곳을 찾아 번식한다. 박테리아는 열이나 빛에 쉽게 파괴되지만 바이러스는 잘 파괴되지 않는다. 박테리아가 유전물질과 세포질, 세포막으로 구성된 생명체라면 바이러스는 유전물질로만 이뤄진 특수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생명체와 비생명체를 나누는 가장 큰 특징은 생명체의 번식 여부다. 박테리아는 외부에서 영양물질을 획득해 스스로 번식하는데 반해 바이러스는 다른 세포 내부에 침입한 다음 숙주세포의 유전물질 속에 들어가야만 번식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중간단계에 있는 셈이다.
우리 주변에서는 감기 바이러스가 가장 흔하다. 감기 바이러스는 100여종이 넘는데, 코 점막세포에 들어가 감기를 일으킨다. 면역성이 떨어지는 질환을 앓거나 50세 이상 노인, 당뇨환자, 임산부 등은 매년 10월 이전에 독감예방접종을 하는 편이 좋다.
에이즈를 일으키는 바이러스 즉 HIV는 ‘인류의 적’으로 불린다. 그러나 최근 의학기술의 발달로 에이즈 치료제가 개발되고 있으며 아프리카에는 HIV에 내성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 씩 나타나고 있다. 사실 사람의 유전자에서는 HIV와 비슷한 역전사기능을 가진 부분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인류가 HIV 이전에도 비슷한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증거일 수 있다. 바이러스는 ‘인류의 적’이 아니라 오랜 세월 인간과 공생관계로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한편 영화 중반 꼭 짚고 넘어가야할 옥의 티가 있다. 사건의 열쇠를 쥔 강 상병이 심장마비를 일으키는데, 군의관이 제세동기로 심장에 전기 쇼크를 주고 심장마사지를 하지만 결국 강 상병은 사망한다.
심폐소생술의 기본은 ABC다. 즉 기도확보(Airway), 구강호흡을 통한 산소공급(Breathing), 그리고 심장마사지(Circulation)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영화에서는 기도확보나 산소공급 없이 바로 심장마사지를 하는데, 이렇게 해서는 살 수 있는 환자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