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과학자들이 펼친 죽음의 안무

맨해튼계획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홀쭉이(리틀 보이)


1939년 여름 아인슈타인(1879-1955)은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한가롭게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나치스에 쫓겨 뉴욕에 머물고 있던 레오 질라드(1898-1964)가 그를 찾아왔다. 질라드는 한때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가정용 냉장고(독일 제너럴 일렉트릭에서 제작했으나 소음이 너무 커 시판되지 않음)를 비롯해 10여개의 발명특허를 냈던 헝가리 출신의 독일 물리학자.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은 미국에 와서 마음고생을 하던 아인슈타인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사람의 방문이었다.

질라드가 찾아온 이유는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1882-1945)에게 핵폭탄을 개발해 달라는 편지를 써줄 것을 아인슈타인에게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유럽에서 펼쳐지고 있는 나치스의 횡포와 히틀러가 핵폭탄을 먼저 개발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핵폭탄의 개발 이야기는 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물리학자 채드윅(1891-1974)이 중성자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핵폭탄은 탄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32년 발견된 중성자는 물리학의 숙원이었던 원자의 질량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전까지는 전자와 양성자 밖에 알려지지 않아 원자의 질량이 양성자 질량(전자 질량은 매우 작음)을 모두 합한 것보다 훨씬 무거운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게다가 중성자의 발견은 또 하나의 혁명을 예고했다. 전하를 띠지 않는 중성자는 전하를 띤 원자핵 내부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던 것. 다시 말해 중성자는 원자핵 내부를 여는 유일한 열쇠였다. 채드윅은 중성자를 발견한 공로로 1935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중성자의 발견이 알려지자 과학자들은 너나없이 원자핵 내부의 비밀을 캐려고 뛰어들었다.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1901-1954)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물이나 파라핀을 통과시켜 중성자의 속도를 느리게 하면 매우 재미있는 결과가 생김을 알았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공격을 받은 진주만.


속도가 느려진 중성자는 원자 내부를 통과할 때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그만큼 원자핵에 흡수될 가능성이 높다. 또 속도가 느려지면 파장이 길어지므로 중성자의 부피가 커지는 것과 같은 효과가 발생한다. 결국 속도가 느린 중성자는 원자핵 내부의 중성자나 양성자와 충돌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골프공보다 부피가 큰 볼링공이 쉽게 볼링핀을 넘어뜨리는 이치다.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면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 공로로 페르미는 193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런데 원자번호가 92인 우라늄에 중성자 하나를 보태 원자번호가 93인 새로운 원소를 만들려는 페르미의 실험은 어찌된 일인지 계속 실패했다. 그 이유는 1939년 독일의 과학자 오토 한(1879-1968)과 그의 제자 슈트라스만(1902-1980), 그리고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 물리학자 마이트너(1878-1968)에 의해 밝혀졌다. 중성자를 흡수한 우라늄은 질량이 큰 원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핵분열로 인해 질량수가 작은 두개의 원소로 변했던 것이다. 게다가 계속 쏟아지는 중성자 때문에 일어나는 연쇄반응은 아인슈타인의 질량 에너지 등가원리(E=mc2)에 따라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한은 이러한 현상을 발견한 공로로 194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한이 핵분열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마이트너 조카인 프리슈가 덴마크에 있는 닐스 보어(1885-1962)에게 알렸고, 보어는 곧바로 워싱턴에서 열린 이론물리학회에 참석해 미국 물리학자들에게 알려주었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한마당

핵분열을 이용해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사람은 질라드였다. 그는 불현듯 영국의 SF소설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1866-1946)가 1914년에 발표한 ‘자유로워진 세계’(The World Set Free)가 생각났다. 이 소설은 엄청난 핵에너지를 이용한 핵폭탄이 개발되고, 1956년 영국, 프랑스, 미국 등과 독일, 오스트리아가 싸우는 세계대전에서 사용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만약 한과 슈트라스만이 히틀러와 나치스에 협력해 핵폭탄을 만든다면 유럽은 끝장이라고 질라드는 생각했다.

그러나 질라드로부터 자초지종을 설명들은 아인슈타인은 선뜻 협조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전쟁이 싫었고, 더구나 자신이 휘말리는 것은 더욱 싫었다. 그렇지만 질라드의 집요한 설득으로 아인슈타인은 1939년 8월 2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히틀러보다 미국이 먼저 핵폭탄을 개발해야 한다고. 질라드가 염려했던 2차대전은 그해 9월 1일 일어났으며, 아인슈타인의 편지는 10월 11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미국의 핵폭탄 개발인 맨해튼계획(정식 명칭은 맨해튼엔지니어구역)은 1941년 12월 6일에서야 시작됐다.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다가 자칫 실패하는 날에는 정치적 생명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으로서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사이에 아인슈타인은 핵폭탄 개발을 촉구하는 편지를 두번이나 더 썼다. 맨해튼이란 이름은 당시 핵분열에 관한 연구가 주로 뉴욕 맨해튼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붙여진 것.

맨해튼계획의 책임자로는 놀랍게도 37세의 캘리포니아공과대학(Caltech) 교수인 오펜하이머(1904-1967)가 선정됐다. 사이클로트론을 발명한 로렌스(1901-1958, 1939년 노벨물리학상), 중수를 발견한 유리(1893-1981, 1934년 노벨화학상), 콤프턴 효과를 발견한 콤프턴(1892-1962, 1927년 노벨물리학상) 등 일찍이 핵폭탄 개발을 추진해왔던 명망가들은 모두 뒷통수를 얻어맞았다. 오펜하이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래비(1898-1988, 1944년 노벨물리학상)를 비롯해 핵폭탄 개발에 반대하는 수많은 과학자들을 맨해튼계획을 추진하던 뉴멕시코주 로스알라모스연구소로 불러들였다. 오펜하이머의 암호명은 ‘브래들리’.

맨해튼계획에는 나치스에 쫓겨온 유럽과학자들도 대거 참여했다. 독일 출신의 제임스 프랑크(1882-1964, 1925년 노벨물리학상)와 한스 베테(1906-, 1967년 노벨물리학상), 이탈리아 출신의 페르미와 세그레(1905-1989, 1959년 노벨물리학상), 헝가리 출신의 질라드, 노이만(1903-1957), 위그너(1902-1995, 1963년 노벨물리학상), 그리고 ‘수소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드워드 텔러(1908-).

특히 영국 과학자들의 활약은 돋보였다. 채드윅, 독일 출신의 클라우스 푹스(1912-1988, 전쟁이 끝난 후 소련간첩으로 체포돼 9년 동안 감옥에 갇힘) 등 상당수에 이른다. 닐스 보어와 그의 아들 아게 보어(1922-, 1975년 노벨물리학상)는 영국팀의 고문 자격으로 참여했다. 핵폭탄을 가지고 싶었던 처칠이 1943년 8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획하던 퀴벡 밀약에서 어떤 나라와도 핵폭탄을 공동개발하기를 원치 않았던 루스벨트를 굴복시킨 결과였다. 영국은 1952년 세계에서 3번째로 핵폭탄을 보유했다.

4천5백여명의 과학기술자들이 참여한 맨해튼계획은 노벨상의 등용문으로도 유명했다. 에드윈 맥밀런(1907-1991, 1951년 노벨화학상), 리차드 파인만(1918-1988, 1965년 노벨물리학상), 노먼 램지(1915-, 1989년 노벨물리학상) 등은 로스알라모스연구소 출신의 노벨상 수상자들이다.


일본의 가미카제(신이 불게 한 바람)로 선발된 조종사


홀쭉이와 뚱뚱이

그러나 막상 맨해튼계획에 착수하려고 하니 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핵폭탄을 개발하려면 제일 먼저 자연적으로 연쇄반응을 일으킬만한 양(임계질량)의 우라늄을 구해야 한다. 우라늄은 지각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원소. 비록 1t의 암석에 2g 밖에 들어있지 않지만 금보다 4백배나 많다. 그러나 금과 달리 농축된 원석이 없어 정제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핵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우라늄 235는 140개의 우라늄원자 중 1개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우라늄 238이었다(우라늄 238은 우라늄 235와 달리 양성자와 중성자의 합이 짝수가 돼 안정적이므로 핵폭탄 원료로는 부적합함). 우라늄 235를 분리해내는 방법은 1942년에 개발됐다.

또 핵폭탄을 만들려면 중성자의 속도를 늦출 감속재가 필요했다. 보통의 물은 수소가 중성자를 가속시키므로, 중성자를 포획하지 않는 중수(수소의 중성자가 2개)가 필요했다. 중수는 전기분해를 통해 만들었다. 그러나 중수는 우라늄을 부식시키는 결점을 안고 있어서, 맨해튼계획에서는 순수한 흑연을 감속재로 사용했다.

이제 이론으로 존재했던 우라늄의 연쇄반응을 실험함으로써 핵폭탄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일만 남았다. 만약 중성자가 우라늄 235를 때려 1.001배의 중성자만 만들어내더라도 연쇄반응에 의해 핵폭탄이 될 수 있다. 그 가능성은 1942년 12월 2일 이론과 실험을 겸비한 천재 물리학자인 페르미가 확인해주었다.

페르미는 시카고대학 축구경기장 지하에다 임계질량에 이르는 우라늄 조각을 흑연과 교대로 쌓아 원자로를 만들었다. 이때 그가 만든 원자로의 암호명은 ‘시카고 파일’(pile). 우라늄과 흑연을 교대로 쌓아놓은 모습에서 유추된 것이다. 실험이 시작되자마자 52t의 산화우라늄(순수한 우라늄 235는 2백55g에 불과) 속의 중성자 생성비율이 순식간에 1에 도달했다. 만약 중성자의 생성비율이 1.001보다 조금이라도 컸더라면 이날 페르미팀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우라늄말고 핵분열하는 또 다른 원소가 발견됐다. 바로 원자번호 94인 플루토늄 239이다.

1945년 우라늄 235와 플루토늄 239를 충분히 확보한 과학자들은 이를 어떻게 폭탄으로 만들지 마지막 고민을 해결해야 했다. 임계질량을 가진 핵연료를 한곳에 모아두었다가는 적국에 싣고 가기도 전에 대기 중에 존재하는 중성자에 의해 스스로 폭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가지 방법에 의해 폭탄을 만들었다. ‘홀쭉이’(little boy)라는 핵폭탄은 긴 관의 양 끝에 우라늄 235를 분리해 넣은 것이고, ‘뚱뚱이’(fat man)는 속이 빈 공 모양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레이다를 이용해 화약을 폭발시키면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한곳에 모이도록 설계됐다. 당시 과학자 사이에 홀쭉이는 루스벨트를, 뚱뚱이는 처칠을 일컫는 말로도 사용됐다.


원자폭탄이 떨어져 폐허가 된 나가사키의 모습.


미국의 유아독존

미국이 맨해튼계획을 추진하는 동안 독일, 일본, 소련에서도 핵폭탄 개발계획이 수립됐다.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던 1939년 8월 하이젠베르크(1901-1976, 1932년 노벨물리학상)는 군병기청으로부터 소집영장을 받았다. 독일은 하이젠베르크를 중심으로 ‘우라늄계획’을 수립했으며, 곧바로 한과 슈트라스만, 발터 보테(1891-1957, 1954년 노벨물리학상), 한스 가이거(1882-1945) 등이 합류했다. 연합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마련된 핵폭탄 개발장소는 스타티름이라는 작은 마을.

독일은 미국보다 핵폭탄을 개발하는데 훨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점령지인 노르웨이 중수공장에서 만든 4백L의 중수를 손아귀에 넣었고, 벨기에로부터 1천2백t의 우라늄을 빼앗았다. 게다가 독일은 우라늄 235를 쉽게 분리하는 방법까지 개발했다. 다만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히틀러가 핵폭탄에 대해 무지했다는 점.

결국 독일은 미루적거리다가 핵폭탄을 개발하지 못했다. 1943년에 이르러서 재정이 극도로 악화되자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핵폭탄 개발은 더욱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노르웨이 베목에 있던 중수공장은 1942년 영국 특수부대에 의해 폭파됐다. 또 프랑스에서 만든 중수는 졸리오-퀴리 부부(1935년 노벨화학상)가 나치스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빼돌렸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1943년 말 독일이 핵폭탄을 개발했다는 소문이 유럽에 퍼진 적이 있다. 당시 독일은 전선에서 밀리던 시절이었으므로 혹시 이 비밀병기를 꺼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럽은 온통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비밀병기는 페네뮌데에서 개발했던 V1, V2로켓으로 판명됐다. 두 로켓은 1944년 6월 13일 첫선을 보이며 영국을 강타했다.

일본은 1941년부터 육군 항공대와 제국 해군이 각각 핵폭탄개발에 착수했다. 육군 핵폭탄 개발의 중심은 사이클로트론을 만들었던 도쿄대학 이화학연구소의 니시나 요시오(1890-1951). 해군은 1903년 토성형 원자모델을 제안했던 나가오카 한타로(1865-1950)가 주도했다. 이들은 천왕에게 직접 보고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문제는 우라늄 235를 확보하는 것. 이를 정제하기 위해서는 연간 전력 생산량의 10%가 필요했다. 또 기술력으로는 10년이 걸린다는 보고도 나왔다. 결국 독일이나 미국도 개발하기 힘들 것이라고 보고 일본은 핵폭탄 개발 계획을 철수했다.

소련의 핵폭탄 연구는 1939년 36세의 핵물리학자인 이고르 쿠르차토프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1949년 8월 29일 핵실험에 성공했다.

미국은 2차대전의 주범인 독일이 핵폭탄을 개발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와 나치스는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완전히 패색이 짙었으며, 미국이 핵폭탄을 만들기에 충분한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마련된 1945년 5월에는 독일이 항복하고 말았다.

희생양은 일본

그러나 미국은 핵폭탄을 사용하겠다는 야심을 버리지 않았다. 아직 희생양으로 삼을 일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5월 오펜하이머, 페르미, 로렌스, 콤프턴 등 4명의 과학자는 일본에 핵폭탄을 투여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오펜하이머는 ‘배타적인 것은 서로 보완적’이라는 보어의 상보성을 내세웠다. 핵폭탄은 죽음의 무기지만, 역으로 전쟁을 끝내고 인류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 결국 네 사람은 만장일치로 일본의 인구밀집지역에 핵폭탄을 투하할 것을 결정했다. 사막에서 핵폭탄을 실험하는 전시효과만으로는 일본을 위협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최초의 핵폭탄 실험이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알라모고도에서 실시됐지만 일본은 동요하지 않았다. 물론 이 실험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그 파괴력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지만. 질라드와 같은 과학자들은 이 실험을 보고 일본에 핵폭탄을 투여하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최초의 핵실험 이후 핵폭탄은 ‘원자폭탄’(atomic bomb)이라고 불렸다(일반적인 화약들은 원자결합에너지의 변화에 의해, 핵폭탄은 핵결합에너지의 변화에 의해 발생하는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원자폭탄은 잘못된 말임). 그리고 첫 핵폭탄을 실험했던 곳에 ‘트리니티’(삼위일체)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붙였다.

마침내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운명의 날이 결정되고, 1945년 8월 6일 ‘에놀라 게이’라고 하는 B29 폭격기는 최초의 핵폭탄인 홀쭉이를 일본의 산업도시인 히로시마에 투하함으로써 그 날을 확인해 주었다. 우라늄으로 만든 4.5t의 홀쭉이는 반경 3km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14만명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지금까지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한 사람은 20만명, 당시 히로시마 인구의 3분의 2가 죽은 것이다.

플루토늄으로 만든 5t의 뚱뚱이는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져 7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인류의 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참혹한 대학살이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했고, 이로써 2백억달러라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 맨해튼계획은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예견했던 바와 같이 2차대전이 핵폭탄으로 결론이 나자, 웰스는 비관적인 나날을 보내다 1946년 8월 삶을 마감했다. 질라드는 전공을 생물학으로 바꿔 시카고대학 생물학과 교수가 됐다. 페르미와 텔러(1908-)는 수소폭탄(열핵폭탄) 개발에 착수해 1952년 완성했다.

오펜하이머는 유명인사가 됐지만, 핵폭탄으로 받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는 “내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고 말해,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그 얼간이를 다시는 이곳에 부르지 말라”는 책망을 듣기도 했다. 수소폭탄 개발 계획에서 그가 제외된 것은 알고보면 ‘자의 반 타의 반’. 그는 로스알라모스연구소 소장직에서 물러난 후 죽을 때까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소장으로 지냈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9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GAMMA
  • 사진

    동아일보 조사연구팀
  • 홍대길 기자

🎓️ 진로 추천

  • 물리학
  • 화학·화학공학
  • 역사·고고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