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유학일기를 써오며 보기 좋게 해외 유학의 판타지를 깨부수고 있는 것 같아 독자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있다. 이번 이야기의 주제는 방학인데, 또 죄송하다.
독일 대학에도 당연히 방학이 있다. 카를스루에공대의 경우 공식적으로 7월 25일부터 9월 30일까지 약 두 달 동안 방학이다(2020년 여름학기 기준). 학교에서는 분명 방학이라 말하지만, 학생 입장에선 절대 방학이라 볼 수 없다. 방학과 동시에 시험 기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조금 생소할 순 있지만, 독일의 공대에서는 방학 중에 시험을 보는 게 흔하다. 특히 공학계열과 자연과학계열이 이런 만행(?)을 저지른다.
이는 독일 대학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 독일 대학은 대부분 국립대다. 대학을 다니면서 내야 하는 등록금은 거의 없다. 대학을 유지하는 데 학생들이 내는 등록금이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대학은 학생이 없어도 딱히 아쉬워하지 않는다.
또 독일은 학생들이 어려운 전공을 선택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의학을 제외한 이공계 진학을 기피하는 현상이 만연하다. 즉, 대학 이공계 지원자가 적다. 심지어 지원자가 정원보다 적을 때도 있다.
이공계 학과는 이런 상황에서도 가능한 우수한 학생을 많이 뽑으려a고 한다. 일단 최대 정원에 맞춰 가능한 많은 학생을 뽑는다. 입학 기준 점수가 매우 낮은 이유다. 그 이후에 학과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못 맞춘 학생들은 낙제시킨다. 그래서 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할 양도 많고, 문제도 굉장히 어렵다. 독일의 대학은 시험을 한 학기에 한 번만 치르기 때문에 애초에 시험 범위도 두 배다.
따라서 평소에 충분히 공부해야 한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막상 실천하지 못 하는 이유가, 학기 중에는 할 일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시험 보는 것조차 빠듯할 정도다. 대학에서도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시험 날짜를 방학 중으로 미루는 것이다.
모든 학과가 다 이런 것은 아니다. 경영, 경제 관련 학과와 산업공학과는 방학이 되면 온전히 쉰다. 물론 나름대로 학기 중에 치열하게 시험공부를 하고, 방학에는 인턴십을 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러나 방학 때 시험을 치르는 공대생은 2개월을 자유롭게 쓰는 그들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결과적으로 공대생들에게 진짜 방학은 시험까지 끝난 뒤의 1~2주 정도뿐이다. 다시 말하면, 조금 억울해도 방학 때 쉴 시간이 아예 없는 건 아니란 뜻이다. 물론 시험을 철저히 계획대로 준비하면, 시험 기간 전이든 후든 쉴 수 있다.
나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쉬려고 하는 편이다. 그리고 쉴 때는 보통 여행을 간다. 내가 사는 곳 근처에는 숲도 많고 호수도 많아 휴식을 취하기 제격이다. 작년 여름방학에는 친구들과 당일치기로 근처 호수에 놀러 가서 수영도 하고 바비큐도 먹었다.
가족과 스위스로 여행가서 캠핑을 한 적도 있다. 참고로 스위스는 내가 사는 곳에서 자동차로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독일은 지리적 위치가 특히 좋아 스위스뿐 아니라 웬만한 국가는 반나절이면 차를 이용해 갈 수 있다. 방학 때 자동차로 국경을 넘어가며 유럽을 여행할 수 있는 건 유럽 유학생의 특권이다.
최근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단연 2019년 겨울방학에 친구들과 떠난 여행이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한국의 친구들과 렌터카를 타고 2주 동안 동유럽을 여행했다.
내가 사는 독일 카를스루에서 출발해 폴란드까지, 총 5개 나라에 들러 친구들과 각국의 음식을 먹고, 문화를 즐기고, 웃고 떠들었다. 아쉽게도 나는 시험을 치르기 위해 도중에 따로 집에 돌아와야 했지만(이것이 독일 공대생의 현실이다), 그래도 방학 중 여행은 큰 힐링이었고, 다시 열심히 공부해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비록 시험은 치러야 하지만 평소 가보고 싶던 나라를 쉽게 여행할 수 있는 방학을 기다리는 건 다른 독일 유학생, 심지어 공대생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학기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방학이 될 예정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집에 콕 박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 보면 온라인 수업을 듣는 학기 중이나 방학이나 다를 것 없이 느껴진다. 무기력하고 시간 감각도 사라진 듯하다. 하루빨리 코로나19가 종식돼 진정한 방학을 즐길 수 있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