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 개봉한 영화 ‘괴물’은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관객 1300만 명을 꿀꺽 ‘집어삼키며’ 한국영화의 흥행 신화를 세웠다. 그 중심엔 ‘돌연변이 올챙이’를 닮은 ‘연꽃 모양의 입’을 가진 ‘디지털 크리처’‘괴물’이 있었다.
‘괴물’의 성공은 한편으론 씁쓸함을 남겼다. 국내 디자이너가 무려 1년 4개월 동안 스케치만 2000여 장을 그려 ‘괴물’의 모습을 완성했지만, 정작 디자인에 생명을 불어넣는 컴퓨터그래픽(CG) 작업은 ‘메이드 인 아메리카’였기 때문이다.
KAIST 비주얼미디어랩 노준용 교수는 지난해 5월부터 이 작업에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이름표를 달기 위해 연구 중이다. 어류와 파충류부터 포유류, 조류까지 이들에게 헤엄치고 기고 달리고 나는 동작을 만들어 주겠다는 계획이다.
뱀은 사인과 코사인 함수로 움직인다
영화 속 캐릭터를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서는 리깅(rigging) 작업이 필수다. 리깅은 쉽게 말해 3D 모델에 뼈와 근육을 ‘심는’ 작업. 관절을 위, 아래로 움직이고 근육을 줄였다 늘였다 할 수 있는 리깅 작업을 거쳐야 비로소 죽어있던 캐릭터가 살아 움직인다.
지금까지는 모델마다 또 동작마다 CG로 일일이 뼈와 근육을 만들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100개면 리깅 작업을 100번 반복하는 셈이다. 작업자의 숙련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캐릭터 하나를 살아 움직이도록 만드는 데 길게는 일주일까지 걸린다. 다양한 동작까지 구현하려면 만만한 일이 아니다. ‘시간=돈’인 영화판에서는 더 빨리 더 간편하게 캐릭터를 만드는 쪽이 경쟁력 있다.
비주얼미디어랩은 최근 이 부분에서 몇 가지 성과를 거뒀다. 뱀은 S자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4가지 형태(아코디언, 직진, 가로기기 운동)로 움직인다. 노 교수팀은 사인과 코사인 함수를 조합해 뱀의 다양한 움직임을 수식으로 나타냈다. 컴퓨터에서 이 수식만 실행시키면 꿈틀대며 바닥을 기어가는 뱀을 쉽게 묘사할 수 있다.
물고기의 비늘을 자동으로 배치하는 수식도 찾아냈다. 어류나 파충류의 경우 비늘이 사실적으로 표현돼야 진짜처럼 보인다. 대개 비늘의 사진을 몸통에 얹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만약 물고기가 알을 품어서 몸통의 표면적이 늘어나면 사진이 상하좌우로 늘어나 해상도가 떨어진다.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려면 비늘을 CG로 하나씩 입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역시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노 교수팀은 몸통의 생김새에 관계없이 부피가 늘어나면 거기에 맞춰 비늘을 자동으로 배치하는 수식을 찾아냈다.
특히 얼굴에서 눈, 코, 입의 움직임을 자동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일은 주목할 만하다. 세계적인 CG 소프트웨어 업체인 ‘소프트이마지’가 최근 얼굴 애니메이션을 자동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야심작으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가격만 10만 달러(약 1억 원)다. 노 교수팀이 개발한 기술이 상용화되면 외국으로 새는 돈을 그만큼 줄일 수 있다.
비주얼미디어랩의 왕성한 연구 성과는 노 교수의 ‘자유방임형’ 지도 덕이기도 하다. 그가 연구실 식구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덕목은 ‘열정’. 연구에 열정이 있는 사람은 굳이 연구하라고 등 떠밀지 않아도 알아서 하기 마련이라고.
사실 비주얼미디어랩의 문턱은 높은 편이다. 문화기술대학원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수학전산대학원’에 가깝다. 홍익대 미대 출신의 석사과정 유미 씨는 비주얼미디어랩에 진학한 뒤 대학 수학과 프로그래밍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틈틈이 해부학 책도 들여다봐야 한다. 열정 없이는 어렵다.
때문에 1년 밖에 안된 신생 연구실이지만 비주얼미디어랩의 실력은 이미 수준급이다. 노 교수는 “아트와 테크놀로지를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세계적으로 드물다”며 “비주얼미디어랩 출신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올해 ‘월·E’ ‘트랜스포머 2’ 같은 쟁쟁한 로봇 영화들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노 교수는 앞으로 진짜 같은 로봇을 CG로 구현하는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한국산 CG 기술이 세계의 ‘러브콜’을 받을 날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