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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이서구 교수의 활성산소 신호전달 메커니즘 규명

활성산소는 무조건 해롭다는 상식 깨

Oxidation by H₂O₂ provides a means for negative regulation of protein tyrosine phosphatase(PTP) activity.
“과산화수소는 단백질 티로신 탈인산가수분해효소를 산화시켜 그 활성을 억제한다.”


‘H₂O₂, 세포신호전달을 위한 필요악’

2006년 6월 30일자 ‘사이언스’의 한 해설논문 제목은 신문의 사회면 기사 냄새를 풍긴다. 국어사전은 필요악(必要惡)을 ‘없는 것이 바람직하나 조직 따위의 운영이나 사회 생활상 부득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H₂O₂, 즉 과산화수소는 소독약에 쓰일 정도로 독한 물질이지만 세포신호전달에 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포내에 존재한다는 의미다. 우리 몸은 수십억 개의 세포로 구성돼있고, 살아있음은 세포들이 계속 서로 신호를 주고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습니다. 과산화수소 같은 물질을 활성산소라고 하죠. 활성산소는 노화를 촉진하고 암 같은 질병을 일으키는 주범입니다.” 이 해설논문의 저자 이화여대 이서구 석좌교수의 설명이다. 해설논문이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그 분야의 연구 현황이나 전망을 소개하는 글이다. 따라서 H₂O₂가 꼭 나쁜 물질만은 아니라는 걸 입증하는데 이 교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0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신희섭 박사와 함께 국가과학자 1호로 선정된 이서구 교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생명과학자다. 1961년 서울대 화학과에 들어간 이 교수는 부전공으로 수학을 공부했다. 1967년 미국 워싱턴의 가톨릭대로 유학가서는 유기화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생물학 쪽은 근처도 가지 않았던 이 교수가 어떻게 저명한 생명과학자가 됐을까.
 

과산화수소와 반응하면 녹색형광을 띠는 물질인 DCF를 처리한 세포에 성장인자로 자극을 주면(오른쪽) 자극을 주지 않은 대조군(왼쪽)에 비해 형광이 훨씬 강해진다. 성장인자가 세포내 과산화수소를 생성시켜 신호를 전달함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과감한 가설 즐겨

“학위를 마치고 인삼에 들어있는 약효성분 같은 천연물을 합성하는 연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도 교수님이 당시 화학 지식으로는 천연물질을 합성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생체 내에서 천연물질을 만드는데 관여하는 촉매인 효소를 배워보라고 하시더군요.” 이렇게 해서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저명한 효소학자 얼 스테트만 박사 실험실을 찾아간 이 교수는 그 뒤 2005년 귀국할 때까지 35년을 NIH에 몸담게 된다.

이 교수는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에 걸쳐 ‘포스포리파제 C’라는 효소의 구조와 기능을 규명한 일련의 논문을 ‘사이언스’나 ‘네이처’ 같은 일류 저널에 줄줄이 발표하면서 유명해졌다.

지금까지 그가 이 분야에서 발표한 논문이 인용된 회수는 1만 회가 넘는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런 성공에 도취될 만도 했겠지만 이 교수는 이 와중에도 다른 연구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이 교수팀은 1980년대 후반 효모에서 활성화되면 과산화수소를 없애는 효소 퍼록시레독신(peroxiredoxin)을 발견했다. 보통 이렇게 새로운 효소의 발견을 보고하는 논문은 일류 저널에 실리기 마련이지만 생명과학분야의 권위지인 ‘셀’은 이 교수팀의 논문게재를 거절했다.

“카탈라아제(catalase)처럼 과산화수소를 없애는 강력한 효소가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촉매 활성이 훨씬 약한 것으로 측정된 퍼록시레독신 데이터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죠. 시료가 오염됐을 가능성도 언급하더군요.” 결국 논문을 ‘생물화학저널’(JBC)에 발표했지만 별 유감은 없다. ‘생물화학저널’은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논문에 관대하다. 그 가운데 일부가 틀린 걸로 판명될 수도 있지만 옳은 것일 경우 생명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 역시 퍼록시레독신의 존재이유에 대해 고민했다. 이미 카탈라아제라는 활성산소 킬러가 있는데 왜 이런 효소가 있을까. 게다가 게놈을 분석한 결과 퍼록시레독신은 효모에 10여 가지, 포유류도 6종류나 있었다. “생명체는 굉장히 효율적인 시스템입니다. 특별한 목적 없이 유전자를 여럿 투자하지 않지요.” 따라서 이 교수는 퍼록시레독신이 우연히 생긴 활성산소를 없애는 게 아니라 뭔가 정교한 조절과정에 관여한다고 추측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들어 과산화수소의 새로운 역할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바로 세포내 신호전달에 관여한다는 실험결과가 나온 것. 이 교수와 같은 NIH 소속인 토렌 핀켈 박사팀은 PDGF라는 성장인자를 쥐의 근육세포에 넣으면 일시적으로 세포내 과산화수소 농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때 세포에서 과산화수소를 없애면 세포분열유도 같은 PDGF의 효과도 줄어든다. 결국 과산화수소는 PDGF의 신호를 세포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 셈.

이 교수는 “신호전달 역할을 하는 과산화수소가 세포를 손상시키지 않는 이유는 세포내 특정 영역에서만 만들어지고 역할을 마친 뒤 퍼록시레독신이 바로 분해하기 때문”이라며 “세포 유형이나 세포내 위치에 따라 특화된 퍼록시레독신이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과산화수소는 어떤 식으로 신호전달에 관여할까.
 

세포내 신호전달 매개체 과산화수소^외부 성장인자가 세포막 수용체에 결합하면 세포막 또는 세포 소기관의 막에 있는 효소(Nox)가 활성화돼 산소(O2)에서 초과 산화이온(O2 -)을 거쳐 과산화수소(H2O2)를 만든다. 과산화수소 의 작용으로 세포분열(아래 사진) 같은 생명 활동이 일어난다.


논문 돌려보낸 ‘사이언스’

이런 근본적인 의문을 풀기 위해 매달린 이 교수팀은 마침내 그 비밀을 밝혔다. 과산화수소가 ‘단백질 티로신 탈인산가수분해효소’(PTP)를 산화시켜 작용을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신호를 받는 단백질 가운데 상당수는 특정 아미노산에 인산이 붙어야 활성화된다. 평소에는 인산이 없는 상태인데 PTP가 인산을 떼어냈기 때문이다. 결국 외부에서 신호가 오면 과산화수소가 생기고 그 결과 PTP가 산화돼 역할을 못하면 신호를 받는 단백질에 인산이 붙으면서 활성화돼 기능을 한다.

“지금 생각하면 명쾌해 보이지만 10년 전 이 가설을 실험으로 입증한 논문을 완성해 ‘사이언스’에 보냈을 때 데이터가 부족해 게재를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과산화수소가 신호전달에 관여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너무 완벽한 메커니즘을 제시한 게 오히려 의구심을 자아낸 셈. “‘사이언스’가 요구한 추가 실험목록을 보니 1년을 매달려도 어렵겠더군요.”

추가 실험을 하는 중에 혹시 다른 실험실에서 같은 결과를 발표할 수도 있겠다 싶어 이 교수는 이번에도 ‘생물화학저널’의 문을 두드렸다. 1998년 6월 19일자로 발표된 이 논문은 일급 저널에 낸 수십편의 논문을 제치고 이 교수가 가장 애착을 보이는 ‘작품’이다.

“일단 논문이 나가면 관련 연구를 하는 팀들이 재현실험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가설의 진위가 저절로 판명되지요.”

이 교수의 가설을 입증하는 연구결과들이 잇달아 발표되면서 그 메커니즘을 제시한 논문 게재를 거부했던 ‘사이언스’도 2003년 이 교수팀의 후속연구결과를 실었다. 그리고 2006년 이 교수에게 과산화수소가 관여하는 신호전달 연구 현황과 전망을 소개하는 글을 써보라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과산화수소의 신호전달을 연구한 이 교수팀의 논문은 현재 1000회 이상 인용됐고 최근 이 분야의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관련 연구자와 논문이 급증하고 있다.

이화여대에 자리 잡은 이 교수 역시 ‘세포신호전달계 바이오의약 연구센터’를 세워 후속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이 분야의 잠재성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포분열이 왕성한 암세포에는 신호전달에 관여하는 과산화수소의 농도가 높습니다. 따라서 과산화수소를 없애는 퍼록시레독신의 작용를 방해하는 약물을 넣어주면 세포를 죽일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과산화수소의 농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즉 세포분열 신호를 전달하는 과산화수소가 암세포를 자살로 이끄는 셈이다.

1998년 논문의 저자가 모두 한국인이라는 점도 특이하다. 박사후연구원이나 안식년을 보내려 NIH에 와있던 연구자들이 이 연구에 참여했기 때문. 당시 공동 제1저자였던 전남대 이성록 교수, 생명공학연구원 권기선 박사는 지금도 활성산소를 연구하고 있다.

“주위를 보면 연구결과 자체보다 유명 저널에 논문을 내는데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칫 반복실험이나 불필요한 실험을 하면서 시간과 정력을 소모할 수 있습니다.”

빨리 인정받고 싶은 조급함을 극복하고 과학적 호기심을 밝히는 과정을 즐긴 이 교수의 ‘쿨’한 자세가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 아닐까.
 

활성산소와 생명현상 활성산소는 너무 많으면 세포를 죽이는 독성물질로 작용하지만, 적당하게 있으면 세포의 성장과 분화를 돕는 아군으로 활동한다. 아예 없으면 세포는 자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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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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