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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습 1회차
윤정은 기분이 나빴다. 당연히 몹시 좋지 않았다. 토요일에 학교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기분이 좋을 대학생이 한반도에 어디 있겠는가. 이게 다 소연이 때문이라는 걸 떠올리고, 윤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 돌아오기만 해 봐, 아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처음 이 수업을 같이 듣자고 한 건 소연이었다. 교양수업 시간표를 쫙 짜서 윤정에게 들이밀고서 이번 학기에 우리가 들을 수업이라고 확정지어 버렸다. ‘유럽영화론’, ‘20세기 서양사’, ‘프랑스 문화의 이해’ 같은 수업들 사이에 이 수업이 끼어 있었다. 사랑과 결혼. 소연의 생떼 앞에서 저항해봤자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윤정은 그냥 수강신청번호만 받아서 모두 수강신청을 했다. 문제는 소연이었다. 소연은 개강 첫 주부터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무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도 되지 않고, 카톡도 되지 않았다. 다음 주가 되어서야 소연에게서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메일은 이렇게 시작했다.
[ 윤정아! 나 지금 인도야! ]
메일에는 코끼리를 타고 있는 소연, 까맣게 타서 해먹에 누워 있는 소연, 사리를 입고 갠지스 강에 들어간 소연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메일 내용은 꿈에서 코끼리를 보았는데 아무래도 인도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리하여 모든 수업을 혼자 듣게 된 가여운 윤정은 자신이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이 ‘사랑과 결혼’을 듣게 되고 만 것이다. 첫 수업시간에 만난 교수는 안경을 끼고 키가 작으며 목소리가 아주 나긋나긋한 중년의 남자교수였다. 윤정은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자, 너도 나도 앞으로 나가서 무언가를 체크하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었더니만…. 주말에 학교를 오게 되고 말았다.
ID 카드를 찍자, 문이 열렸다. 로봇은 눈을 반짝 뜨면서 코드를 뽑았다. 로봇은 전신이 은색이었다. 하얀 빛이 나오는 눈, 관절들은 제법 잘 만들어서 사람처럼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차윤정 님.”
“아…, 안녕하세요.”
로봇은 가볍게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눈의 반 정도가 올라오고 입 모양이 웃는 모양으로 바뀌었다.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웃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았다. 윤정도 로봇과 딱히 다를 것 없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이 로봇과 데이트를 하는 것이 바로 이 수업의 실습이었다. 윤정이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교수는 데이트 후기 레포트였던 이 수업의 기말 레포트가, 데이트 채점을 위해 특별히 고안한 AI가 실습 후 채점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학기 중에 한 시간 반씩 네 번 로봇과
데이트를 하는 실습이었다. 웬만한 학생들이 공강시간을 이용해 실습시간을 예약했다. 그리고 졸고 있던 윤정은 빈 칸이 주말밖에 남지 않은 예약표를 마주해야 했던 것이다. 주말의 교정에는 사람이 적었다. 로봇은 명랑하게 윤정의 옆에서 걸었다. 윤정도 걸었다. 로봇과 윤정은 목적지도 없이 캠퍼스 안을 이리저리 헤맸다. 광장을 한 바퀴 돌고, 교양관을 한 바퀴 돈 다음, 야외 공연장을 한 바퀴 돌고, 호수 앞에 멈춰
섰다. 호수를 둘러서 수양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때까지 걸린 시간은 도합 이십 분 정도였고, 그때까지 윤정과 로봇은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로봇 쪽이었다.
“날씨가 참 좋습니다.”
“그렇네…요….”
“요즘 듣는 수업은 어떤 게 있으세요?”
“뭐, 서양사 수업이랑 이것저것….”
“어떤 게 재밌으세요?”
“별로….”
“최근에 보신 영화는 있으세요?”
“영화관에 잘 안 가서….”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윤정은 슬슬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윤정이 소연과 늘 수업을 같이 들었던 이유는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는데.
윤정은 언제나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게 너무도 힘들었다. 걸핏하면 화난 걸로 오해나 받고, 사람들과 사이는 나빠지기 일쑤였다. 그냥 묵묵히 수업을 듣는 거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교에는 조별과제라는 것을 비롯해서 다른 사람과 대화하면서 해야 할 게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다행히 윤정에게는 사교성 좋은 소연이 있었다. 소연과 함께 있으면, 윤정은 그저 소연이 시키는 자료 조사를 하거나 프레젠테이션 자료만 묵묵히 만들면 되었는데! 인도에나 가버리고! 윤정이 이를 갈면서 소연을 다시 원망하는데, 로봇이 호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벚꽃이 피었네요! 벚꽃을 보면 무슨 생각이 나세요?”
“아, 체리 블라썸….”
“네, 벚꽃이 영어로 체리 블라썸입니다.”
“체리 블라썸은 마츠다 세이코가 1981년 1월에 발표한 네 번째 싱글인데요. 그때 마츠다 세이코를 제가 제일 좋아해요.”
로봇은 10초 정도 무언가를 찾으려는 표정으로 윤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그 당시에 마츠다 세이코가 정말 예뻤거든요. 약간 살이 쪄서 볼도 통통해지고, 곡은 다른 곡을 더 좋아하지만, 그때 세이코가 정말 최고로 예쁜 세이코예요.”
“아…, 제가 데이트 모드일 때는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서 인터넷에 연결을 못하게 프로그래밍되어 있거든요. 입력해 놓았으니, 나중에 찾아볼게요. 마츠다 세이코는.”
“그래요, 나중에 꼭 찾아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은 푸른 산호초, 일본어로 하면 아오이 산고쇼라는 곡인데요.”
윤정의 목소리는 약간 커졌고,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로봇은 마츠다 세이코, 푸른 산호초, 체리 블라썸 같은 몇가지 키워드를 입력해 두고 다른 쪽으로 채점표를 열었다.
‘자연스러움’ 항목에서 점수를 깎고, ‘배려’ 항목에서 다시 점수를 깎았다. 첫 실습에서 깎일 수 있는 점수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은 깎지 않았다. 첫 실습 상대 중 최하점이었지만, 그렇다고 0점은 아니었다. 여하간 대답을 꼬박꼬박 하고 무언가 말은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실성’점수를 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로봇은 프로그래밍된 대로 가벼운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며 흥분한 윤정의 말을 들었다. 바람이 불어서 수양벚꽃이 로봇의 이마와 윤정의 콧잔등 위에 내려앉았다
실습 2회차
ID 카드를 찍자, 문이 열렸다. 로봇은 코드를 뽑으면서 저번과 똑같이 웃어보였다.
“또 뵙네요, 차윤정 님.”
“네, 안녕하세요….”
로봇과 윤정은 다시 교정으로 걸어 나왔다. 늦봄의 햇살이 교정 안에 반짝거렸고, 로봇의 전신이 그 햇빛을 환하게 반사했다. 로봇과 윤정은 또 아무 말도 없이 광장을 걷기 시작했다. 광장을 세 바퀴 정도 돌았을 때, 이번에도 로봇이 먼저 말을 꺼냈다.
“차윤정 님은 말씀이 참 없으시네요.”
“네….”
“원래 그렇게 말씀이 없으세요?”
“좀….”
로봇과 윤정은 나란히 광장의 벤치에 앉았다. 광장 한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학생들이 윤정과 로봇을 흘끔거렸다.
“뭐야?”
“사랑과 결혼일 걸? 이번에 채점 바뀌었다잖아.”
“그거 데이트하는 수업 아니야?”
“이번엔 다들 로봇이랑만 데이트 한다던데.”
목소리를 낮춰서 중얼거렸지만 윤정의 귀에는 똑똑하게 들렸다.
“쟤는 로봇말고 데이트해 줄 남자도 없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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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키득거리며 걸어갔다. 윤정은 속으로 되뇌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의 말이 맞다. 이것은 로봇이다. 사람이 아니다. 성별도 없고, 색깔도 은색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 아니 로봇과 대화하는 것을 겁낼 필요가 없다. 로봇은 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따돌리지도 않고, 나쁜 소문을 내지도, 저 사람들처럼 빈정대지도 않는다. 이 로봇은 그냥, 그저 로봇일 뿐이잖아.
윤정이 조심스럽게 로봇을 흘끔거리자, 로봇은 다시 눈을 반달모양으로 만들며 웃어보였다. 윤정은 당황하여 다시 앞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눈동자도 못 움직이는 게, 웃기는.
로봇은 침묵을 깨기 위해 몇 가지 주제를 머릿속에서 훑어내리다가 이전 대화 데이터에서 ‘마츠다 세이코’를 찾아냈다. 로봇은 윤정과의 데이트를 마치고 곧바로 간단한 데이터들을 수집해 놓았다.
“저번에 말씀하신 마츠다 세이코라는 일본 가수를 찾아보았습니다.”
“아, 진짜요?”
“말씀하신 체리 블라썸이라는 노래와 푸른 산호초라는 노래의 영상을 50개 정도 확인했습니다.”
“어때요?”
로봇의 로딩이 이전보다 조금 더 오래 걸렸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 물으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좋죠?”
로봇은 다시 한참 동안 말을 멈추었다. 윤정은 로봇이 말을 멈추었다는 상황에 신경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영상 중에 푸른 산호초로 1위하고 우는 척 하는 영상 봤어요? 진짜 그 영상이 대박인데. 눈물은 한 방울도 안 나는데 막 우는 척 하잖아요. 봤어요?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고 MC가 말하는데 카메라가 줌을 해서 보면 안 울고 있거든요. 제가 그런 걸 정말 좋아해요. 사람들이 잘 울고 마음 약한, 사랑스러운 소녀 역할을 기대하니까 기대하는 만큼 한 거잖아요.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그때 세이코가 한국 나이로는 열아홉 살이었을 텐데, 그러면 지금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데. 왜 저는 나이를 이렇게 먹고서도 그게 안 될까요. 사람들이 다른 사람한테 기대하는게 있잖아요. 좀 더 사근사근하길 바란다거나, 꼭 그런 거 말고라도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대답하는, 일반적인 공식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런 걸 세이코는 아주 다 아는 것 같아요, 열아홉 살인데도. 그런데 저는 스물한살을 먹고서도 그게 도저히 안 되더라고요. 인기도 없고. 뭐, 제가 특별히 좋아했던 사람도 별로 없기야 하지만…. 근데 연애 같은 걸 안 하더라도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호감을 가지는 사람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요. 그게 너무 안 되는 거예요. 솔직히 저 좋아하는 사람 세상에 거의 없을 거예요. 그건 그렇고, 천국의 키스도 봤어요? 그때 헤어스타일이 진짜 예쁜데. 예쁘죠?”
로딩 중에 쏟아지는 정보를 정신없이 처리하던 로봇은 새로운 명령어를 받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들어온 명령을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로봇은 프로세스를 정리했다.
“제가 알기로 흔히 예쁘다고 하는 얼굴은 이런 얼굴이나,”
로봇의 가슴에 있는 모니터에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양인으로 치면 이런 얼굴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엔 김태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요?”
“비율이 맞아 떨어지는 얼굴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로봇은 1 : 1 : 1.618의 마스크 모양을 모니터 위에 겹쳐 보여주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얼굴이 비례에 맞춰서 배열되고, 김태희의 얼굴이 다시 배열되었다. 그 뒤에 마츠다 세이코의 얼굴이 등장했다. 마츠다 세이코의 턱은 마스크에서 비죽 튀어나왔고, 코 비율과 눈 비율도 애매하게 어긋났다. 로봇은 윤정이 입술을 물고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캐치했다. 물론 윤정은 신경질적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쁘다는 건 그렇게 계산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
“미추는 계산의 범주 안에 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마츠다 세이코는 예쁘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 계산이랑 맞지 않다고 해도 그렇다고요.”
“그건 아름다운 게 아니죠.”
“그건…, 로봇 씨를 뭐라고 불러야 하죠?”
“절 지칭하실 때는 그냥 로봇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로봇 씨는 계산하는 거 말고 다른 방식을 모르는 거죠. 마츠다 세이코는 예쁘다고요.”
로봇은 미소를 잃지 않고 채점표를 꺼내들었다. 데이트를 하면서 의견이 다를 때 상대방을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는 최하점이었다. 점수가 쭉쭉 깎여 내려갔다. 로봇은 채점을 위해서 반드시 던져야 할 몇 가지 질문 중 하나를 이쯤에서 던지는 게 좋겠다고 계산했다. 이 질문들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실습 점수는 큰 차이가 날 수 있었다. 질문은 랜덤으로 튀어나왔고, 로봇은 무작위로 튀어나온 질문 하나를 출력했다.
“윤정 님은 이 세상의 누구와도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으세요?”
로봇은 응용력이 빠른 오퍼레이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에, 한 마디 덧붙일 수 있었다.
“마츠다 세이코?”
윤정은 멍하니 로봇의 질문을 곱씹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와 함께 저녁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그다지 한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대부분 사람들은 누군가와 저녁을 먹으면서 친교를 쌓을 텐데. 지금껏 자신이 가장 많이 저녁을 함께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윤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세이코랑은 같이 먹고 싶지 않아요. 누굴 초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로봇은 채점표에서 다시 점수를 깎았다. 윤정은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실험체였다. 그때 윤정이 입을 다시 열었다.
“로봇 씨는요?”
지금껏 데이트를 했던 실험체 중, 이 질문에 처음으로 나온 정답이었다. 다른 실험체들은 자신이 누구와 밥을 먹고 싶은지를 말하고, 그 이유를 대서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았다. 같이 밥을 먹고 싶은 사람 중에는 대통령도 있었고 UN 사무총장도 있었고 사랑과 결혼 수업의 교수님도 있었지만 아무도 정답을 말하진 않았다. 정답이 등장하자, 로봇은 처음으로 미리 입력되어 있던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저는 저를 만든 공과대학의 한진영 교수님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창조주구나. 멋지네요.”
윤정의 채점표는 기괴한 모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느 부분에서는 바닥을 찍고 어느 부분에서는 높은
점수를 찍어서 도표를 만든다면 일그러진 불가사리 같은 모양이었다. 한 시간 반이 지났다. 로봇은 있던 보관실로 돌아가서, 원래 자리에 앉으며 처음 문이 열렸을 때와 똑같은 모양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다음 실습 때 뵙겠습니다.”
윤정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로봇의 충전기를, 허리춤에 있는 로봇의 단자에 꽂아주었다.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윤정이 가고 나서 로봇은 내부 매뉴얼을 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실험체가 데이트 도중 하드웨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하드웨어에 영향을 미치는 가능성은 매뉴얼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로봇은 인터넷에 연결해서 다른 매뉴얼들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로봇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해서, 그날 새벽까지 애를 쓰며 매뉴얼을 찾았다. 도무지 방법이 없다고 결정을 내리고 절전모드에 들어간 것은 새벽 세 시가 넘어서였다.
실습 3회차
ID 카드가 찍혔고, 문이 열렸다. 윤정이 약속한 시간보다 20분이나 늦었기에, 로봇은 이미 ‘성실성’ 점수를 깎고 있던 중이었다. 문이 열리고 눈앞에 있는 윤정은 얼굴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로봇의 은색 얼굴을 보자마자 윤정은 무너지듯 주저앉아 큰 소리로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윤정의 안경이 콧망울까지 흘러내려왔다. 주말의 고요한 학교 복도에 윤정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울고 있는 윤정 앞에서 로봇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상대방이 맥락도 없이 울음을 터뜨릴 경우의 수는 로봇에게 예측된 범주가 아니었다. 로봇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울고 있는 윤정을 지켜보다가, 일단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에 윤정을 앉혔다. 윤정은 아무 힘이 없이 로봇이 이끄는대로 의자에 앉았다. 그 다음으로는 쾌적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로봇 보관실에 달려 있는 팬을 작동시켰다. 로봇에게 가장 쾌적한 환경이었다. 로봇은 충전단자도 집어들었다가, 윤정은 충전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내려놓았다. 충전, 사람의 충전. 로봇은 교양관 2층에 있는 자판기를 작동시켜 오렌지주스를 가지고 왔다. 윤정은 오렌지주스를 한 번에 통째로 다 마셔버렸다.
다행히 로봇에게 가장 쾌적한 환경은 윤정에게도 가장 쾌적한 환경이어서, 윤정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윤정은 팬이 전신으로 보내는 시원하고 가느다란 바람을 맞으며 눈을 사르르 감았다. 그리고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로봇은 자신의 자리를 잠든 데이트 상대에게 빼앗긴 채 멍하니 그 앞에 서 있었다. 30분가량 지난 후에야 잠이 들었던 윤정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잠깐 자고 나니 정신도 맑아지고 기분도 훨씬 나아져 있었다. 윤정은 안경을 벗고 가볍게 마른세수를 했다.
“미안해요.”
“아닙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너무 비참하고 살기가 싫어졌어요.”
“우울증인가요?”
“배도 아픈 걸 보면 PMS인가 봐요.”
“생리전증후군이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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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과 윤정의 데이트 시간은 기껏해야 20분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어, 어떡하죠. 지금이라도 나갈까요?”
“나가시고 싶으시면 나가시죠.”
“아…, 아니면 그냥 여기서 얘기할까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로봇은 서둘러 채점 질문을 던졌다.
“제가 당신과 가까운 친구가 되려면 당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대답을 듣기 위해 대기하도록 되어 있는 3분 동안 기다렸지만, 윤정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로봇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윤정은 고개를 흔들었다.
“잠깐만요, 아직.”
3분을 더 기다렸을 무렵, 윤정은 입을 열었다.
“제가 아주 겁이 많다는 거요.”
부정성이 강해서 상대방에게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솔직한 대답이었다. 로봇이 채점을 하고 있을 때, 윤정은 또 정답을 입에 담아 버리고 말았다.
“로봇 씨는 저와 가까운 친구가 되고 싶어요?”
로봇은 아까 윤정을 만났을 때 출력하지 못한 웃는 표정을 곧바로 출력했다.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분이니까요.”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에 윤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번에는 무슨 마스크에 얼굴이 안 맞으면 아름다운 게 아니라면서요.”
“네. 저는 정확한 연산과 맞아떨어지는 대칭을 아름답다고 인식합니다.”
데이트 시간이 끝나고, 로봇과 윤정은 자리를 바꿔 앉았다. 로봇이 대기하고 있던 문이 닫히고 나서, 윤정은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했다. 눈물이 말라붙은 자국들이 물에 지워졌다. 어쩐지 학교에 올 때보다 훨씬 개운한 기분이었다.
하긴, 주말에 집에 있어도 할 일도 없는 걸. 윤정은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눈도 짝짝이고, 눈썹도 짝짝인데. 뭐가 정확한 연산과 대칭이라는 거지. 거울을 보며 웃어보니, 더욱 대칭과는 먼 얼굴이 되었다. 올라가는 입술의 높이마저도. 물이 묻은 얼굴을 가볍게 양손으로 찰싹 때려보았다. 안경을 쓰자 양쪽 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건물을 나오자 초여름의 햇빛이 눈부셨다. 산뜻한 박자로, 윤정은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실습 4회차
마지막 날, 로봇과 윤정은 나란히 학생회관 계단에 앉았다.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뭘 하고 싶으세요?”
“이 수업에서는 윤정 님이 뭘 하고 싶으신지가 더 중요합니다.”
“전…, 잘 모르겠는데.”
아이스 브레이킹 겸, 마지막 실습답게 로봇은 마지막 질문을 꺼냈다.
“윤정 님은 갑자기 죽게 된다면 뭘 하고 싶으세요?”
“네? 어….”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던 윤정은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답을 내놓았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데이트를 해보고 싶어요.”
“좋은 곳입니까?”
“거기서 다들 데이트를 많이 한다고…. 그런데 저는 로봇씨하고밖에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어서요.”
“저도 언젠가 가보면 좋겠네요.”
로봇의 반달로 변하는 텅 빈 눈을 보다가, 윤정은 벌떡 계단에서 일어났다.
“지금 가 봐요!”
로봇은 윤정의 말이 빠르게 입력되지 않아서 잠깐 멈춰 있다가 반문했다.
“지금 덕수궁에 가자는 말씀이십니까? 저는 덕수궁으로 가는 방법을 모릅니다.”
“제가 아니까 괜찮아요. 얼른요!”
“저는 이 학교 주변 3km를 벗어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런 게 어딨어요. 로봇 씨 몸 안에 있는 부속품들은 다 다른데에서 왔을 거 아녜요.”
윤정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로봇은 자신이 근방 3km를 넘어가지 않는다고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트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윤정은 먼저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로봇은 머뭇거리며 윤정을 따라 걸었다.
“빨리 와요, 얼른!”
윤정은 로봇을 위해 지하철 승차권을 구매했다. 로봇은 지하철을 타고, 순식간에 학교 3km를 벗어나버렸다. 매뉴얼을 어겼지만 로봇의 시스템에는 별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별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요?”
“3km를 벗어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다행이네요!”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은 모두 은색으로 번쩍이는 로봇을 흘끔거렸지만, 윤정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사람들이 로봇을 흘끔거리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로봇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알았지만 왜인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2호선 지하철을 타고 나니 덕수궁이 있는 시청까지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돌담길은 덕수궁 옆으로 쭉 뻗어 있었다. 윤정은 로봇과 걸음 속도를 맞춰서 천천히 돌담길을 걷기 시작했다. 윤정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소리가 들렸다. 로봇이 윤정과 걸음 속도를 맞추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이 윤정과 로봇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때 로봇은 계산을 하고 있었다. 데이트 시간이 끝날 때까지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이 길을 끝까지 걸으면 불가능할 것이었다. 로봇이 시간이 없으니 이제 그만 학교로 돌아가자고 말하기 위해 윤정 쪽으로 얼굴을 향했을 때, 시청역 광장에 모여 있던 시위대가 산발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머리에 띠를 두른 누군가가 무어라 소리치며 사람들 일부를 끌고 덕수궁 돌담길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뛰는 사람은 서른 명 남짓이었다. 그 뒤를 형광색 옷을 입은 경찰들이 정신없이 쫓아 뛰어오고 있었다. 멍하니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던 윤정과 로봇은 느닷없이 행렬에 휘말리고 말았다. 뛰어오던 사람 중에 한 명이 윤정을 쳤고, 윤정이 바닥에 꽈당 엉덩방아를 찧었다. 또 다시 매뉴얼에 없는 상황에 당황한 로봇이 프로세스를 정리하고 있을 때, 윤정을 친 사람을 쫓아가던 경찰 한 명이 로봇을 세게 치고 지나갔다. 로봇은 크게 흔들리며 덕수궁 돌담에 처박히고 말았다. 데이트용으로 개발된 오퍼레이션 시스템이 감당하기엔 과도한 충격과 정보량에, 로봇은 결국 가벼운 에러를 일으키고 말았다. 물론, 로봇이 에러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윤정은 몰랐다.
첫 덕수궁 돌담길 데이트가 엉망진창이 되어서 시무룩해진 윤정과 로봇은 다시 2호선 지하철을 탔다. 로봇은 돌담길에 처박았을 때 무릎 관절이 조금 망가져 살짝 다리를 절며 걸었다. 이미 데이트 시간은 한참 지나있었다.
로봇은 윤정에게 한 마지막 질문의 데이터를 찾아내지 못했다. 아니, 이미 그 질문을 했다는 기록조차 상실하고 말았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정도를 지날 무렵이었다. 어린아이 한 명이 타서 로봇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엄마, 로봇이야!”
로봇은 다시 윤정에게 질문을 했다. 역시 질문은 랜덤으로 튀어나왔다.
“윤정님, 저에 대해 이미 좋아하게 된 것들을 얘기해 주세요.”
윤정은 상왕십리역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로봇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봇의 시계에 윤정의 달아오른 뺨, 눈가의 좁쌀 여드름, 뿌옇게 된 안경, 떨리는 입술이 동시에 입력되었다. 윤정은 천천히 손을 뻗어 로봇의 차가운 은색 손가락을 꼭 쥐었다.
“저번에 제가…, 아름답다고 하셨잖아요. 정말이세요?”
로봇의 프로세스는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 아니면 다른 화제로 넘어간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저번에 로봇은 분명 윤정에 대해 아름답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런 반응과 연결되는 것인지 로봇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이 질문에 대해서 나올 대답들로 준비되어 있었던 것은, 상냥함, 다정함, 솔직함, 사려깊음, 재미있음, 유쾌함, 명랑함, 그리고….
로봇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윤정은 소리를 지르며 로봇의 어깨를 흔들었다.
“로봇 씨, 정신차리세요, 로봇 씨!”
연산 과부하로 인한 배터리 방전이었다. 결국 윤정은 로봇을 등에 떠메고 낑낑거리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로봇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무거웠고, 늘 높다고 생각했던 학교 계단은 오늘 따라 백 배는 더 높았다. 로봇의 발이 계단에 질질 끌려가며 하얗게 흠집이 났다.
이번 학기는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채점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자율전공교수 강선일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컴퓨터공학과의 한진영 교수가 만들어 준 AI는 학생들의 행동 자체를 채점해서 깔끔하게 데이터를 정리해 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로봇의 무릎관절이 한 번 나가 있었던 적은 있었지만 (한진영 교수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고쳤다) 역시 21세기는 위대했다. 앞으로도 AI를 활용해야겠다고 결심하며 도출한 데이터를 확인하던 강선일 교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학생의 점수값이 아예 없는 것으로 도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차윤정…, 2학년. 특별히 수업 때 기억이 나는 학생도 아니었다.
강선일 교수는 씨근덕거리며 데이터를 들고 공과대학으로 달려갔다.
“한 교수, 이거 어떻게 된 거야! 값이 하나가 안 나왔잖아!”
“응?”
데이터를 받아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한진영 교수는 손목에 있던 머리끈으로 머리를 둥글게 말아 올리더니만 AI에 접속해서 이리저리 레지스트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강선일 교수는 연구실 한 구석에 앉아서 끊임없이 구시렁거렸다.
“아, 새로운 것 좀 도입해 보려고 하면 꼭 이렇게 문제가 하나씩 생겨요. 이번에 시작한 거라 제대로 안 나오면 애들한테 탈탈 털릴 거라고. 족보도 없고. 좀 잘 좀 해 주라.”
한진영 교수는 한쪽 눈썹만 치켜 올리며 묘하게 웃어보였다.
“얼씨구?”
“왜, 찾았어?”
“아니, 그 데이터는 없는데….”
“그런데?”
“새로 입력도 안 시켜줬는데, AI가 학습한 데이터가 저 혼자 늘었는데?”
“그게 뭐, 지금 그게 문제야?”
“아무튼 데이터는 없어. 아예 날아갔네.”
“진짜 어떡하지…, 그냥 다른 애들 평균값 뽑아서 줘 버릴까….”
강선일 교수의 투덜거림을 뒤로 하고 한진영 교수는 로봇의 데이터가 늘어난 메커니즘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때 윤정은 방학을 맞아 편안하게 늦잠을 자고 있었고, 소연은 뉴델리에서 서울로 가는 항공편을 결제하고 있었으며, 로봇은 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그곳에서 충전기를 꽂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아주 조금 더 확장된 프로세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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