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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이 노닐던 신라의 옛 숲

계림, 나정, 그리고 여근곡

신라의 고도 경주에는 천년 세월을 견뎌온 문화유적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래서 경주를 방문하면 뒤꿈치를 들고 가만가만 걸어다니라는 말도 회자되고 있다. 숲과 관련된 흥미로운 문화유적도 마찬가지로 널려 있는 곳이 경주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나정(蘿井) 숲이나 경주 김씨 시조가 난 계림(鷄林)이 그러한 숲이다. 한 씨족의 탄생 신화와 관련 있는 이들 숲 외에도 경주에는 선덕여왕의 지혜와 관련돼 전해 내려오는 여근곡(女根谷) 숲도 있다. 신라인들의 자연관은 어떠했기에 숲을 건국 시조의 탄생처나 인체의 비부로 인식했을까? 나정 숲이나 계림은 다른 나라의 건국 신화나 전설에 전해지는 세계수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리고 역사적인 기록으로도 나타나는 여근곡 숲은 과연 실제로 존재했을까?
 

경주 김씨 시조의 탄생기 계림


숲은 하늘과 인간의 통로

갈 때마다 느끼지만, 계림이나 나정 숲은 천년의 시공을 단숨에 뛰어넘을 만한 숲이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살아 있는 유일한 생명체.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단풍나무와 같은 아름드리 고목들이 수백 년 풍상을 지켜온 자태 그대로 객을 붙잡고 수많은 사연을 토해 내고 있는 계림. 또는 온통 넓은잎나무들로 구성된 계림과는 달리, 신라 천년의 영화를 노래하며 찬양하고자 춤추듯 꿈틀거리는 소나무들이 성스러운 장소를 호위하듯 서 있는 나정 숲. 이처럼 계림이나 나정 숲은 찾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주는 숲이다.

신라 건국 초에는 시림(始林)으로 불렸던 계림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다. 탈해왕이 금성 서쪽에 있는 시림에서 닭 우는소리를 듣고 신하를 보냈더니, 금빛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무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그 궤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왕은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자랄수록 총명하고 지력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궤 속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씨라 했으며, 시림을 계림으로 바꿔 부르고 나라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경주 김씨 시조의 탄생처가 바로 계림임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계림에 얽힌 것과 유사한 이야기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이상한 빛이 하늘로부터 나정 우물 곁에 있는 숲 사이로 드리웠기에 찾아가 보니,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던 자리에 불그스름한 큰 알이 있었다. 이 알을 깨뜨려 보니 총명한 한 사내아이가 나와서 이를 데려다 키웠다. 박만한 알에서 태어났기에 성을 박이라 하고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을 혁거세라 했으며 신라의 시조, 경주 박씨의 시조가 됐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신라의 건국 시조인 박씨나 경주 김씨 시조의 탄생과 관련된 이 두 신화는 나무를 매개로 해 나라를 열게 된 우리의 단군신화와 그 궤를 같이 하기에 흥미롭다. 우리 건국신화에서 시조로 숭상되는 단군은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곰에서 여인으로 화한 웅녀와 혼인해 낳은 반신반인의 인간신임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이 건국신화에서 박달나무인 신단수가 신이 내려오는 통로 역할을 했음도 알 수 있다. 단군처럼 박혁거세나 김알지 역시 나정 숲이나 계림을 통로로 해서 하늘에서 인간세상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한 나라나 한 씨족의 기원이 나무나 숲에서 유래되었다는 내용의 설화는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것은 아니다.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이와 유사한 흔적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나무만이 가진 거대한 덩치, 장구한 수명, 우주적 리듬의 재현, 다산성과 같은 특성들은 고대 인류에게는 우리보다 더 각별했을 것이다. 고대 인류는 나무와 숲의 이러한 특성들을 천지창조의 근원이나 신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통로로, 또는 지상을 떠받치고 있는 중심나무와 같은 상징으로 구체화시켰을 것이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신화나 전설 속에 나타나는 이러한 나무들을 ‘우주수’나 ‘세계수’라 부르고 있다.

한 나라나 어떤 씨족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신성이 필요했을 테고, 그러한 신성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나무나 숲을 통로로 해 얻을 수 있다고 고대 인류는 믿었을 것이다. 하늘의 신성을 받은 한 시조가 나정 숲이나 계림을 통로로 해서 인간 세상에 내려와 한 나라나 한 씨족을 시작했다고 믿었던 신라인의 인식은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권에서 나타나고 있는 우주수나 세계수의 상징체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년의 서기를 느낄 수 있는 계림의 노거수들


불교 세계의 축소판 낭산

그러나 신라인들이 나무나 숲을 창조의 근원, 또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던 신성한 통로로만 인식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풍수사상이나 음양오행설에 따라 자연을 사람처럼 인식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와 같은 흔적은 여근곡 숲에서 찾을 수 있다.

여근곡에 대한 내용은 선덕여왕의 ‘미리 알아낸 세가지 일’(知氣三事)에 나온다.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에 얽힌 세 설화는, 첫째 향기 없는 모란꽃 이야기이고, 둘째 왕이 생전에 자신의 죽을 날을 예언해 도리천에 장사지내달라고 한 이야기이며, 셋째 여근곡 숲에 몰래 침략한 적군을 미리 알아 섬멸한 이야기다.

설화에 대한 내용을 부언하면, 향기 없는 모란꽃 이야기는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 그림과 그 씨 3되를 여왕에게 보낸 데서 유래됐다. 그림을 본 여왕은 그 꽃에 향기 없음을 예언했는데, 이듬해 핀 모란은 과연 향기가 없었다고 한다. 신하들의 물음에 모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을 것임을 미리 알았다고 답해 주었다는 것이 첫째 사연이다. 실은 모란꽃에는 향기가 있다.
둘째 이야기로, 부처님의 나라인 도리천에 장사지내달라는 왕의 당부에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신하들이 어디가 도리천인가를 물었다는 내용이다. 왕은 낭산 남쪽이 도리천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낭산 남쪽이 도리천이라는 선덕여왕의 유언은 당나라를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한 후 왕의 무덤 아래쪽에 있는 신유림(神遊林)에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건립하고 호국신인 사천왕을 모셨을 때야 신하들은 왕의 유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천왕의 위쪽이 바로 부처님 나라인 도리천이기 때문에 사천왕사 위쪽의 낭산은 바로 부처님의 나라라는 이치였다.

도리천과 사천왕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 불교의 우주관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의 존재인식은 흔히 욕계, 색계, 무색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수미산은 욕계의 한 가운데 있다. 수미산의 아래쪽에는 사람들이 축생(짐승)과 함께 사는 연부제라는 세계가 있다. 이 연부제 아래의 가장 밑바닥에 지옥이 있고, 그 위에 아귀의 세계가 있다. 수미산 중턱에는 사람보다 훨씬 살기 좋은 사천왕이 있고, 이 꼭대기에는 도리천(하늘나라)이 있다. 사천왕에는 5백년의 수명을 가진 천인과 천사들이 살고 있으며, 도리천에는 제석천이라는 1천년 이상의 수명을 가진 천주가 살고 있다고 한다. 불교적 우주관에 따르면 사천왕이나 도리천은 신들이 사는 신성한 곳임에 틀림없다. 경주의 낭산은 불교적 우주관의 축소판임을 알 수 있다.

신들이 노닐던 숲(신유림)을 호국신인 사천왕의 거처(절)로 터잡던 신라인들의 예지! 그리해 낭산 꼭대기(선덕여왕릉)를 천주가 사는 도리천(하늘나라)으로 만들었던 신라인들의 불교적 우주관. 이런 짧은 지식을 가지고 신유림을 생각했을 때, 신유림은 더 이상 그저 평범한 주변의 숲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짓기 2백60여년 전에 신유림은 이미 신들이 노닐던 숲으로 여겨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실성왕 12년(413) 8월에 낭산 주변에 누각과 같은 형태의 신비로운 구름이 일어나고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서 노는 것이라고 여긴 왕은 낭산 일대를 신유림으로 보호해 나무 한그루 베지 못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우리 조상들은 신유림과 유사한 신성한 숲을 예로부터 주변에 두어왔다. 단군신화에 나타난 신단수가 그러하며, 고구려의 소수림왕릉이 있던 소수림(小獸林), 백제의 웅진사와 천정대의 원림, 신라의 계림,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가 있던 천경림(天鏡林), 조선의 성황림이나 신림 등이 그러한 숲이었다.

낭산 기슭에 자리잡은 선덕여왕의 왕릉 주변 솔 숲길을 거닐면서 여러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힌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신라인들의 자연관은 어떠했기에, 신들이 노닐던 숲까지 생각했을까? 주춧돌만 남은 사천왕사 주변의 신유림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신유림은 어떤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이었을까? 선덕여왕릉 주변을 덮고 있는 소나무처럼 신유림도 소나무 숲이었을까?
 

유학사 안내 표석에 그려진 여근곡이 흥미롭다.


살아있는 자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란히 전해 오는 여근곡 이야기는 오늘도 흥미롭고 새롭게 다가온다. 영묘사 앞 큰 연못인 옥문지(玉門池)에는 겨울인데도 난데없이 개구리 떼가 모여 울었다. 이것을 심상찮게 여긴 신하가 왕에게 알리니, 선덕여왕은 알천과 필탄 두 장군을 불러 2천 명의 군사를 주어 경주 서쪽 여근곡 밀림 속에 숨어 있는 백제의 복병을 치게 했다. 두 장군은 여근곡 숲 속에 숨어 있던 백제 장군 우소가 거느린 5백여 명의 복병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신하들이 왕에게 적군이 매복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왕은 노란 개구리는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은 여자의 상징으로 음, 백색은 서쪽을 가리키므로 적군의 서방 매복을 알았다고 대답하고, 남근 격인 백제군사가 여근곡 속으로 들어갔으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음양설을 인용해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무대는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경주군 서면 신평리 오봉산 산록이다.

가까이서 볼 땐 모르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면 분명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연상시키는 여근곡과 그 숲. 그 여근곡 숲은 1천 3백여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오늘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여근곡 숲은 자연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인식했던 선조들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을 질적인 대상으로 믿었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믿음은 풍수지리사상과 음양오행설에 의존하며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 왔던 조상들의 자연관이 반영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양대 김병모교수는 최근에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보고했다. 그것은 경주 천마총의 주인공은 자작나무를 신수(神樹)로 섬겼던 북방 기마민족일 것이라는 내용이다. 김교수의 주장은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 장니(흙가리개)와 금관에 근거를 둔 것이다. 신라금관의 외형적 상징은 나무를 숭배하는 유라시아 여러 민족의 민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나뭇가지형이다. 나무를 신성시 여기는 시베리아 샤만들은 최근까지도 나무와 사슴뿔로 소박한 나뭇가지형 관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특히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은 4단의 나뭇가지에 곡옥이 달려있는 유일한 예이다. 이 금관에서 곡옥은 생명수의 열매를 상징하며, 원형의 나뭇잎은 자작나무의 잎을 상징한다고 김교수는 해석하고 있다.

소나무와 잡목림으로 뒤덮인 여근곡 안에 자리잡은 사찰, 유학사에서 맛좋은 약수 한모금을 들이킬 때 눈에 들어온 남근석 하나. 여근곡의 드센 음기를 누르기 위해 절 한 모퉁이에 당당하게 하늘로 곧추선 자태로 서 있는 남근석. 여근곡 안에 서 있는 남근석을 보고 우리 조상들이 가진 넉넉한 자연관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땅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인식했던 선조들의 자연관. 음양의 기를 함께 살리기 위해서 부처를 모신 절집에도 남근석을 안치할 수 있는 여유. 자연을 질적인 대상으로 인식했던 이러한 자연관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되었으며, 오늘날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신라의 옛 숲은 새롭게 발견된 숲이 아니다. 계림이나 나정 숲, 그리고 여근곡 숲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우리 곁에 있으며, 내일도 역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숲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은 변해왔다. 계림이나 나정 숲은 신라 천 년 동안에는 신성한 숲이었지만, 왕조가 바뀌고 시대가 바뀜에 따라 단순한 유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자연을 철저히 착취하고 지배하는 인간중심주의적 산업사회에서는 그저 입장료를 내고 관람할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라인이 부여했던 신성(神性)은 간 데 없고 오래된 나무, 역사적 사연을 간직한 평범한 관광 명소로서 그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을 뿐이다.

여근곡 숲도 마찬가지이다. 과거보러 한양 가던 선비가 애써 외면하고 지나가던 그 길목은 철도와 고속도로, 그리고 국도까지 뚫려서 하루에도 수만명이 알게 모르게 그 앞을 지나치고 있다. 그러나 인체의 비부를 상징하는 이름이 전해 내려오게 된 속 깊은 사연에는 누구하나 관심 두는 이 없다. 주변의 눈총으로 여근곡이란 이름 대신에 이근곡 식당이란 상호로 영업하는 상혼만이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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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전영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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