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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과 클라리넷 부는 공학자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 성굉모

서울대 뉴미디어연구소 원격강의스튜디오에서 알토 색소폰을 연주하다가 잠깐 쉬고 있는 성 교수.


‘공학자가 색소폰을 분다고?’

관악산 자락에 있는 뉴미디어연구소를 찾아가자 흔한 공대 분위기와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한쪽에 오선지 악보와 황금빛 색소폰이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클래식에서 가요, 팝송, 재즈, 그리고 교회음악까지 어떤 종류의 음악도 소화해낼 수 있는 악기가 바로 색소폰입니다. 색소폰은 천의 얼굴을 가진 악기죠.”

알토 색소폰으로 때론 은은하게, 때론 신나게 클래식과 가요를 번갈아 연주하던 성굉모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가 색소폰 예찬론을 펼쳤다. 성 교수는 10여 년 전부터 초등학교 동기 동창인 친구의 권유로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은 색소폰의 매력에 푹 빠져 알토를 비롯해 소프라노, 테너 색소폰을 8개나 소장하고 있다.

그의 전공은 소리를 공학적으로 연구하는 음향공학이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독일 아헨공대에서 이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83년 모교 교수로 돌아왔다. 그동안 악기뿐 아니라 초음파진단기, 홈시어터, 카오디오 시스템처럼 소리에 관한 대상이면 무엇이든지 속속들이 연구해왔다. 또 음대 겸임교수직을 맡아 25년째 음악음향학을 강의하고 있다.

“색소폰이나 클라리넷 같은 악기의 구조, 소리 나는 원리를 가르칠 때마다 전공학생에게 악기를 갖고 오라고 부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직접 내 악기를 갖고 음계 정도는 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그의 연주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아마추어 관악 앙상블에서 베이스 클라리넷을 맡고 있다. 사실 그의 소리 사랑은 어릴 때부터 시작됐다.


가짜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도 판별

중학교 때 그는 수학이나 물리를 잘하는 학생 가운데 특별한 존재였다. 음악이론을 좋아하고 음악공부도 잘했기 때문이다. 음악교사는 그에게 작곡을 공부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당시 안익태 선생이 지휘하는 교향악단 연주를 들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던 그는 음악을 전공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과 담임교사가 심하게 반대했다. 전교 1, 2등을 다투던 학생이라면 공대에 가야 한다, 특히 전자산업이 태동하던 시기라 전자공학과에 가는 게 좋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모범생(?)인 그는 음악 공부를 포기하고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래도 틈틈이 공대 합창단 활동을 했다.

1971년 독일 아헨공대에 유학 간 뒤에도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세부전공으로 음향공학을 선택했고 음향공학연구소에 들어갔다. 연구소에서 귀에 들리는 소리에 대한 연구는 아니지만 특수 초음파 변환기를 연구해 박사 논문을 썼다. 물론 악기에 대한 연구도 했다. 전 세계 바이올린 3000개 정도를 음향학적으로 분석했다. 명품부터 공장제까지 겉모양은 비슷한데 어떻게 소리가 다른지를 파악하고 음향측정자료를 바탕으로 음질이 좋은 바이올린인지 판단하는 연구였다. 그는 지금도 음향자료만 보고 가짜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인지 알아낼 수 있다.

“제가 서울대에 돌아왔을 때 우리나라 음향공학 박사 1호였을 겁니다. 우리 연구실에는 소리에 관한 연구라면 별 의뢰가 다 들어왔죠. 일단 외부에서 연구 의뢰가 들어오면 다시는 이와 비슷한 일로 찾아오지 않도록 근본적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천장, 벽, 바닥에서 소리를 99% 이상 흡수하는 무향실에서 성 교수와 연구원들이 소리 측정용 마이크로폰을 들고 의견을 나누고 있다. 무향실 벽면에는 기존의 유리섬유 대신 신물질인 멜라민이 쓰였다.


수중음향 연구에서 국악기 개량까지

메디슨에서는 초음파 영상진단기에 들어가는 초음파센서를, 현대자동차에서는 카오디오 시스템을, LG전자에서는 브라질로 수출하는 스피커를 각각 제작해달라고 요청해왔다. 특히 브라질 삼바 축제에서 나흘 밤낮을 틀어도 타지 않는 튼튼한 스피커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스피커에서 나는 열을 식히면서 오래가는지 시뮬레이션하며 스피커의 형상이나 재질을 찾아냈다.

또 해군에서 수중 무기체계와 관련한 기초연구를 의뢰받기도 했다. 한국 연안에서 계절마다 소리가 어떻게 발생하고 전파되는지, 이런 잡음을 제거하고 원하는 정보만 뽑아내 수신할 수 있는 방법을 지난 9년간 연구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국방부 지정 수중음향특화연구센터 소장을 맡았다.

물론 악기와 관련한 연구도 진행했다. 삼익피아노의 음질을 개선했을 뿐 아니라 국악기를 개량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국립국악원의 의뢰를 받아 가야금, 거문고, 징, 꽹과리 같은 국악기가 내는 소리를 음향학적으로 분석해 국악기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마련했다. 또한 징이나 꽹과리를 만들 때 어떻게 하면 좋은 음색을 낼지 금속공학 전공교수와 함께 연구했다. 아무렇게나 두드리는 것처럼 보이는 전통적인 제작방법에서 벗어나 합금 비율부터 프레스 제작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인형 머리처럼 생긴‘더미헤드’를 설명하는 성 교수. 더미헤드는 소리가 있는 현장에서 사람이 두 귀로 들을 때처럼 신호를 잡기 위해 사용한다.


30가지 넘는 명품악기 소장

“우리 연구실에서는 음악을 잘한다고 학생을 받아주지 않아요. 다른 공학 분야처럼 수학이나 물리를 잘해야 합니다. 그래도 들어오면 제가 말을 바꾸죠. 소리를 배우는 사람이 악기 하나쯤은 익혀야 한다고.”

지난 2월 말에는 연구실 출신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성 교수는 4년간의 연구활동을 발표한 뒤 대학원생들과 함께 콘서트를 열었다. 그는 가끔 제자의 가족들을 초청해 연주회도 갖는다. 한 번은 학교 내 엔지니어하우스 대강당을 빌려 콘서트를 열었고, 다른 때는 학교 후문에 있는 재즈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콘서트를 하면서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는 색소폰이나 클라리넷을 불면서 언제부턴가 악기를 구입해 모으기 시작했다. 전설적인 명기라고 하는 ‘마크Ⅵ’ 알토와 테너 색소폰을 모두 손에 넣었고 자신의 나이와 비슷한 ‘밸런스트 액션 소프라노 색소폰’도 만날 수 있었다. 클라리넷의 경우 음역이나 운지법이 다른 10가지나 소장하고 있다.

“모차르트 시대의 악기에서 유래한 바셋 클라리넷도 구입했는데 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보고 싶다고 해 빌려준 적도 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악기일 겁니다. 또 트럼펫, 트럼본, 유포늄 같은 금관악기도 갖고 있어요. 소장하고 있는 악기는 통틀어 30개가 넘을 겁니다. 악기를 사는 데 너무 많은 비용을 들여 아내에게 늘 미안합니다.”

희귀한 악기를 모은 덕분인지 몰라도 지금은 훌륭한 관악 오케스트라에서 단장까지 맡고 있다. 색소폰을 불던 초기에는 색소폰 앙상블 활동을 했고 클라리넷을 배우기 시작한 뒤에는 베이스 클라리넷까지 마련해 3년 전부터 관악 오케스트라 ‘젤로소 윈드 앙상블’에 몸담고 있다. 베이스 클라리넷은 음대 클라리넷 전공자도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경우가 드문데, 때마침 거기서 베이스 클라리넷 주자를 찾고 있었다. ‘젤로소 윈드 앙상블’은 10대부터 60대까지 학생, 주부에서 의사, 음대 졸업생까지 90여 명이 모인 국내 최고 수준의 아마추어 관악 앙상블이다. 지난해에는 앙상블의 대표직을 맡게 됐고 서울과 지방에서 6회의 연주회를 가졌다. 특히 KBS 홀에서 개최한 정기연주회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에게 악기는 어떤 의미일까. “악기 연주가 연구하는 데 직접 도움 되진 않아도 간접적으로는 도움이 됩니다. 소리를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연구해야 하는데, 소리의 감성적 측면을 이해해야 더 나은 연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사실 감각의 세계를 어떻게 논리의 세계와 연결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요즘 성 교수의 큰 관심거리다. “스피커의 품질을 평가할 때 엔지니어는 측정치를 갖고 평가하지만 이는 뛰어난 귀를 가진 세계적 전문가의 주관적 평가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엔지니어가 평소 자기 전공과 관련한 문화적, 예술적 경험을 많이 한다면 우리의 경쟁력이 높아질 겁니다.” 그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감동적인 색소폰 소리처럼 다가온다.

재치만발 돌발문답 3
난 어쩔 수 없는 모범생?


1. 부인과 색소폰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모범생(?)의 대답은 어쩔 수 없다(웃음). 아내를 선택하겠다. 지난해 아내 생일 때 색소폰으로 생일축하 음악을 연주해줬더니 아내가 너무 좋아하더라.

2. 가장 기억에 남는 콘서트는?
독일에서 공부한 탓에 독일 부근으로 출장을 갈 기회가 많다. 언젠가 이탈리아의 명지휘자인 주세페 시노폴리의 지휘 하에 한국의 첼로연주가인 장한나가 비엔나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또 연주장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콘서트홀 가운데 하나라는 비엔나필하모닉 홀이었다. 소리가 골고루 확산될 뿐 아니라 측면 반사음이 풍부하고 잔향시간이 최적이었다.

3. 가장 애착이 가는 악기는?
희귀한 악기인 바셋 클라리넷과 헝가리 민속악기인 타로가토이다. 바셋 클라리넷은 저음 쪽으로 네 개의 반음이 더 내려가는 게 특징이고, 타로가토는 나무로 만든 소프라노 색소폰에 가깝다. 타로가토는 색소폰 운지법(악기를 연주할 때 손가락을 쓰는 방법)과 헝가리 전통 운지법으로 각각 연주할 수 있는 2종류를 갖고 있다. 집에서는 소리가 너무 큰 색소폰보다 소리가 작고 부드러운 알토 클라리넷을 즐겨 분다.
학교에는 방음이 잘 되는 지하연습실이 있지만 집에서는 이웃한테 소음공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생생현장 따라잡기
우리 색소폰 앙상블의 일본 합동공연일지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

2003년 여름 우리 색소폰 앙상블을 이끌고 일본 오사카공항에 내리자 걱정부터 앞섰다. 우리는 바쁜 와중에 틈을 내 엉성하게 색소폰을 배운 아마추어였는데, 모두 음대에서 색소폰을 전공한 일본 프로 연주자들과 함께 공연을 잘할 수 있을지 하는 염려였다.

색소폰을 배운 지 3년쯤 돼서는 혼자 연습하기보다 여럿이 함께 연주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김무균 선생님께 배운 문하생들을 규합해 아마추어 색소폰 앙상블을 창단했다. 김 선생님의 지휘 하에 35명 정도가 모여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의 4종류 색소폰을 연주했다. 우리 색소폰 앙상블은 실력이 부족했지만 모든 단원과 지휘자의 의욕이 대단했다. 정기연주회를 열었을 뿐 아니라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된 관악축제에 참여했고 부산문화회관을 비롯한 지방 초청 연주회도 가졌다. 마침내 일본 오사카에서 일본의 ‘미베몰 색소폰 앙상블’과 합동 공연을 갖게 된 것이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됐다. 일본 색소폰 앙상블은 소리가 아름답고 깨끗할 뿐 아니라 베이스 색소폰까지 가세해 저음부를 탄탄하게 받혀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소리에 비하면 우리 단원들의 소리는 너무나 거칠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단장으로서 책임감이 몰려왔다.

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뒤 단원들과 회의한 끝에 결국 색소폰 앙상블을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전체 단원 중 20여 명은 극단의 처방에 반발하며 계속 색소폰 앙상블 활동을 하고 싶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 때마침 프랑스에서 귀국해 서울대 음대에서 색소폰을 가르치는 원무연 교수가 떠올랐다. 결국 20여 명은 원 교수의 지도를 받게 됐고 그 뒤 음색이 나날이 발전해 새로운 앙상블을 창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는 사이에 클라리넷까지 관심이 넓어졌고 지금은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아마추어 관악 오케스트라인 ‘젤로소 윈드 앙상블’에서 베이스 클라리넷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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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충환 기자
  • 사진

    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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