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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최첨단 요새 수원 화성

개혁군주 '정조'와 실학자 '정약용'의 작품

수원 화성의 화서문(오른쪽)과 서북공심돈. 성문 앞의 둥근 옹성은 방어를, 성벽보다 높은 서북공심돈은 정찰과 공격의 임무를 위해 지었다.


MBC 드라마 ‘이산’의 한 장면. 한해를 보내며 액운을 쫓는 나례희를 열기 위해 왕족과 문무백관이 궁에 모였다. 정조 ‘이산’은 화로에 불을 놓아 폭죽용 화약을 점화한다. 자신 앞에 불꽃놀이용 폭죽이 아닌 화포용 화약이 들어있다는 음모도 모른 채. 이를 안 세자익위사 우세마 박대수는 위험을 알리려 이산 옆의 물병에 조총을 쏘고, 다른 익위사 관원은 이산을 둘러싸 보호한다. ‘꽝~!’화약은 이산의 눈앞에서 폭발한다.

그로부터 수십년 뒤 정조는 화포공격에도 끄떡없는 수원 화성을 만든다. 국방대 군사전략학부 노영구 교수는 “임진왜란 뒤 병사가 성벽을 타넘던 전투가 화포로 성벽을 부수는 전투로 변했다”며 “화성은 당시 전투양상에 맞춰 설계된 최첨단 요새였다”고 말했다.


높이 낮추고 축성재료 혼합

화성의 성벽은 높이가 평균 4m에 불과하다. 10~20m인 다른 성에 비해 굉장히 낮은 편이어서 사다리만 걸쳐도 쉽게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낮은 성벽은 화포공격에 강하다는 장점이 있다. 성벽이 높으면 하단이 무너질 경우 성 전체가 상부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수 있다.

재료도 중요하다. 성은 흙, 돌, 벽돌로 지을 수 있는데, 각각 장단점이 있다. 화포는 화약을 폭발시켜 쇳덩이를 쏘는 무기로 흙으로 지은 토성은 쇳덩이의 충격을 거의 받지 않는다. 쇳덩이의 운동에너지가 공극이 있는 토성의 흙벽에 분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흙은 빗물에 쉽게 휩쓸리고, 겨울이 되면 흙 속의 수분이 얼어 성벽이 터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성을 지을 때 주로 사용한 재료는 돌로 특히 화강암을 사용했다. 화강암은 강도가 높은 석영이 많이 포함됐기 때문에 충격에 강하다. 연세대 지구시스템학과 권상훈 교수는 “다른 돌과 달리 화강암은 망치로 세게 내려쳐도 망치가 튕겨나갈 만큼 단단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돌로 쌓은 성벽은 돌과 돌의 이음새가 딱 들어맞지 않아 마찰력이 작다. 화포공격을 받아 돌이 빠져나가거나 일부만 부서져도 성곽 전체가 균열될 위험이 있다.

벽돌은 다른 재료보다 뒤늦게 알려져 조선시대의 성에 많이 활용되지는 않았다. 흙을 구워 만든 벽돌 자체는 화포공격에 쉽게 부서진다. 하지만 벽돌과 벽돌 사이에 시멘트 같은 석회를 바르면 성벽 전체가 단단해진다. 벽돌 하나는 약해도 여러 개를 붙이면 강해지는 셈이다. 게다가 화포공격으로 성곽 아래가 파괴돼도 그 부분만 부서질 뿐 석회로 접착시킨 윗부분은 멀쩡하다.

수원 화성은 이 셋을 혼합해 건설했다. 성곽은 대부분 돌로 쌓았지만 가로세로가 40~60cm 정도인 커다란 돌을 사용했다. 기존 성벽은 대개 가로가 60cm, 세로가 20~30cm인 돌로 지었다. 돌을 적게 쓸수록 석성의 약점인 이음새가 적어진다. 또 층층이 쌓은 돌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위아래로 들쭉날쭉하다. 하지만 이음새가 딱 들어맞도록 모서리를 가공하고 위아래 돌을 맞물려 견고함을 더했다.

돌로 지은 성곽 안쪽에는 돌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흙을 쌓았다. 돌의 길이는 대개 70cm로 흙에 박혀 쉽게 빠지지 않았으며, 화포공격에 일부 돌이 부서져도 성벽이 전부 무너지지 않게 심석을 곳곳에 박았다. 심석은 깊이가 150cm에 이르는 돌로 성벽을 중간에서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방어시설은 대개 벽돌로 지었다. 수원 화성은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여러 보조건물을 뒀다. 성문 앞에는 문을 둥글게 막은 벽돌 성벽이 있다. 항아리 모양을 닮았다고 해 옹성이라 불리는 이 성벽은 성의 최대 약점인 성문을 방어한다. 옹성이 있으면 화포로 성문을 바로 공격할 수 없고, 성문으로 접근할 때도 옹성을 돌아서 들어가야 한다. 옹성에서 적을 공격할 수도 있다. 이런 방어시설은 집중 포화를 받는데, 벽돌로 지으면 화포를 맞은 부분만 파괴돼 같은 규격의 벽돌로 쉽게 보수할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옹성은 화성의 4개 대문에 모두 있으며, 남북을 잇는 장안문과 팔달문에는 평상시 마차가 쉽게 지나갈 수 있도록 대문과 일직선상에 문을 만들었다.

옹성 외에도 조총이나 화포를 쏘는 구멍이 필요한 방어시설은 벽돌로 지었다. 수원 화성에는 공심돈이라는 구조물이 있는데, 이것은 성벽보다 높아 먼 곳을 정찰하거나 적을 공격하기 유리했다. 높은 곳에서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하려면 거리에 따라 구멍의 각도가 달라야 한다. 먼 곳을 쏘는 구멍은 지면과 평행하게, 가까운 적을 공격하는 구멍은 수직에 가깝게 뚫었다. 원하는 각도로 구멍을 만들기 위해 돌보다 벽돌을 사용한 점은 어찌보면 당연한 셈이다. 공심돈도 적의 표적이 됐기 때문에 벽돌로 지어 화포공격에 대한 피해에 대비했다.

수원 화성 건설의 일등공신은 실학자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동양과 서양의 건축서적을 탐독해 수원 화성을 설계했다. 공심돈 같은 건물은 명나라 모원의가 편찬한 ‘무비지’나 곽자장의 ‘성서’, 윤경의 ‘보약’ 같은 중국의 병서를 참고했다.
 

옹성 위 수비측 병사는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포위할 수 있다.


화성 건축 마스터플랜, ‘화성성역의궤’

명나라로 귀화해 등옥함이라는 이름을 얻은 스위스 과학자 요하네스 테렌츠가 지은 ‘기기도설’도 거중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기기도설에는 서양 물리학의 기본 개념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각종 장치가 수록됐는데, 거중기는 12개의 도르래로 이뤄져 아무리 무거운 돌이라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거중기를 사용하면 장정 한 사람이 240kg(400근)의 무게를 거뜬히 든다”고 기록됐다.

정약용은 거중기 외에도 도르래와 물레를 이용해 돌을 들어 올리는 장비인 녹로와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수레인 유형거를 개발해 공사에 도입했다. 그 결과 거의 6km에 이르는 성벽과 34개 군사시설, 왕이 머무는 화성행궁, 주민들이 머무는 일반 가옥 모두를 1794년 1월부터 1796년 8월까지 고작 2년 8개월 만에 완성됐다. 지금으로 치면 신도시 하나를 2년 8개월 만에 완성한 셈이다.

새로운 장비를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는 정약용의 모습은 MBC 드라마 ‘이산’의 정조와도 겹친다. 대리청정에 실패한 뒤 궐 밖으로 암행을 나간 이산은 천한 신분의 노인에게 낮은 곳의 물을 끌어 올리는 펌프 같은 장비를 얻는다. 이산은 이를 나라가 경작하는 둔전에 직접 사용한다. 실제로 정조가 정약용에게 직접 기기도설을 보여주며 참고하라고 한 역사를 보면 실학자 정약용은 정조의 뜻을 상당 부분 이어받은 듯하다.

경기대 건축학부 김동욱 교수는 “정조는 종종 정약용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임금의 뜻으로 발표했다”며 “정약용의 학식에 대한 깊은 신뢰를 엿볼 수 있다”고 밝혔다. 수원 화성을 건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은 수원 화성의 설계 계획인 ‘성설’을 지어 정조에게 올렸고, 정조는 ‘어제성화주략’이라는 이름으로 공표했다. 어제성화주략은 ‘임금이 지은 화성 축성을 위한 기본 방안’이란 의미다.

성설도 성을 빨리 건설하는 데 한몫했다. 정약용은 성설에 성의 형태는 물론 성을 쌓는 방법과 재료까지 자세히 담았다. 벽돌을 굽는 가마를 만드는 방법이나 돌을 깎는 방법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다. 일종의 건축 도면이자 장비의 설계도인 셈이다. 이 내용은 ‘화성성역의궤 1권’에 수록됐다.
 

화성성역의궤 1권에 실린 거중기전도와 거중기각도. 거중기는 정약용이 기기도설을 참고해 만들었다.


180년만에 부활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정조는 화성성역의궤가 훗날 큰 역할을 하리라 예측했을까. 수원 화성을 지은 곳은 ‘우로’ 위였다. 우로는 경제활동이 활발했던 18세기 당시 한양(서울)과 공주, 전주, 나주를 잇는 교통로였다. 그래서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졌을 때 수원 화성은 치열한 격전지가 됐고, 수많은 포격으로 화성의 많은 부분이 파손됐다. 1975년부터 5년간 이를 복원했는데, 이때 큰 역할을 한 자료가 화성성역의궤였다. 돌의 크기는 물론 쌓는 방법까지 그림을 곁들여 기록했기 때문에 180년 전 화성을 지을 때와 똑같이 복원할 수 있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때도 복원한 유산은 잘 받아주지 않는 유네스코의 전례를 깨고 선정됐다.

‘조선 때 지은 수원 화성과 얼마나 같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유네스코 심사위원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화성성역의궤를 보고 곧바로 수원 화성을 등록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화성성역의궤도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드라마 이산에 등장하는 도화서의 그림도 수록됐다. 도화서는 궁중 행사를 그림으로 그려 기록으로 남기는 기구였는데, 정조는 국가 행사를 모두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다. 화성성역의궤를 작성할 당시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인 김홍도도 도화서 화원이었다니 화성성역의궤에 김홍도의 그림이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유네스코는 수원 화성을 “동양과 서양의 축성 기술이 만난 근대 초기 군사 건축물”이라며 “유럽과 극동 아시아 성의 모양을 혼합한 특징을 갖고 있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부터 시작해 노론 벽파의 살해 위협과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왕위에 오른 정조 이산. 그가 동·서양의 과학기술을 혼합해 당시 첨단무기였던 화포에도 맞설 수 있는 수원 화성을 건설한 이유는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그의 의지를 만방에 선포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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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전동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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