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대학원을 다니는 A씨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방안에 고이 놓아둔 노트북이 갑자기 ‘치직’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눌러 붙은 것이다. 연기가 나기 시작하고 채 5분도 안돼 A씨의 멋진 노트북은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보다 앞선 지난 1월 취재 중이던 한 기자의 노트북 가방에서도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에 놀란 주변 사람들이 부리나케 노트북을 꺼냈지만 손쓸 틈도 없이 까맣게 타버린 뒤였다.
최근 노트북과 휴대전화가 순식간에 타버리는 사고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소비자들의 불안이 증폭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접수된 휴대기기 배터리 안전사고는 2005년 9건, 2006년 12건, 2007년 15건으로 최근 들어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그 중 휴대전화 사고가 28건으로 가장 많고, 내비게이션 4건, MP3플레이어 3건, 노트북 2건, PDA가 1건을 차지했다. 특히 올해 들어 노트북 배터리 화재 사고는 크게 늘었다. 제품 회사별로 보고된 사례나 인터넷을 통해 고발된 사례를 합치면 그 수는 집계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술표준원이나 한국소비자원 등 관련기관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뚜렷한 폭발원인과 책임소재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제품을 만든 회사와 소비자 간에 책임 소재를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안전 위해 리튬 대신 리튬이온 사용
최근 잇따른 배터리 사고의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리튬이온전지의 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리튬이온전지는 리튬이온(Li+)의 산화 환원 작용 원리를 이용한다. 일반적으로 리튬이온전지는 흑연을 음극으로, 금속 산화물을 양극 전극으로 사용한다.
노트북이나 휴대전화를 켜면 전지의 흑연 음극에 있던 리튬이온은 전해질을 통해 양극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전자가 도선을 타고 음극에서 양극으로 이동하면서 전류가 흐른다. 리튬이온이 음극에서 양극으로 모두 이동하면 전류는 더 이상 흐르지 않고 전자기기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충전은 그 반대 과정을 따른다. 전기를 다 쓴 노트북을 전원에 연결하면 충전이 시작되는데 이 과정에서 금속산화물 사이에 끼어들어간 리튬이온들은 다시 음극 쪽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전자도 함께 도선을 타고 음극으로 움직이며 배터리는 다시 사용 가능한 ‘충전상태’로 바뀐다.
종종 리튬이온전지와 리튬전지를 혼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리튬전지는 한번 쓰고 버리는 반면 리튬이온전지는 충전이 가능한 ‘2차전지’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최근 리튬이온전지가 휴대전자기기의 에너지원으로 애용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학계와 산업계는 리튬이온전지를 지금까지 개발된 어떤 휴대전지보다 월등한 에너지 공급원으로 보고 있다.
리튬이온전지는 같은 용량의 니켈 카드뮴(Ni-Cd) 배터리보다 훨씬 더 작고, 가볍게 만들 수 있다. 전기 용량도 다른 2차전지의 2배에 이른다. 전기를 많이 쓰는 휴대전화나 노트북용 전원공급 장치로서는 더 없이 좋은 장점이다. 실제로 리튬이온전지가 나오면서 노트북이나 휴대전화가 작고 얇아진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게다가 충전을 반복하면 전기 용량이 줄어드는 ‘기억효과’가 없다는 점도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기억효과란 충전을 하면 할수록 전기용량이 점점 줄어드는 현상으로, 전지의 충전주기가 짧아지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삼중·사중 안전장치
풍부한 전기용량에도 불구하고 리튬이온전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일반 리튬금속은 물이나 공기와 활발히 반응하는 불안정한 성질을 띠고 있다. 리튬은 작은 수분에도 강력히 반응해 빛과 열을 발산한다. 이런 독특한 성질 때문에 리튬을 전지에 사용할 때는 이온상태로 주입한다. 금속보다는 이온 상태가 상대적으로 안정하기 때문이다.
전지 내부에 채워진 유기전해물질도 또 다른 위험요소다. 리튬이온전지에 사용되는 전해물질은 휘발유보다 더 쉽게 불이 붙는 성질을 갖고 있다. 만일 온도가 높은 환경이나 강한 충격, 높은 전류나 전압이 가해지면 이 전해물질이 열을 내면서 전지가 급격히 타들어간다.
이런 이유로 리튬이온전지를 쓰는 휴대전자기기들은 삼중사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다.
노트북과 휴대전화와 연결해 사용하는 충전기와 어댑터는 대부분 바깥에서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높은 전압과 전류를 차단하는 회로가 들어있다. 또 이들 장치 안에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유사한 기능을 하는 차단 회로가 있다.
이들 안전장치 덕분인지 실제로 리튬이온전지 사고는 사용 중에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한국소비자원의 조사결과 전자기기를 사용하던 중 발생한 사고는 16건으로 충전 중에 일어난 사고보다 사고 횟수가 2배 더 많았다.
물론 전지에도 급격한 온도변화와 과전류에 대비한 안전장치가 들어있다. 강한 외부 충격이 전지에 반복해서 가해질 경우 절연부분이 부서지면서 전기가 합선될 때처럼 전류가 무한히 흐르며 내부에 엄청난 열이 발생한다. 흔히 ‘전선폭발’로 불리는 현상이다.
리튬이온전지에는 과전류방지소자(PTC)와 전류차단소자(CID)를 넣어 이처럼 온도나 전류가 급격히 올라가는 것을 막는다.
또 한쪽에는 전지가 과열될 경우 올라간 내부 압력을 빼내는 작은 구멍이 있다.
이밖에 외부에서 습기나 열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표면을 금속과 개스킷으로 감싸 전지 내부를 보호하기도 한다. 노트북 제조사들은 이런 여러 겹의 안전장치 덕에 전지가 과전압이나 과전류로 폭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과열과 충격엔 치명적
그럼에도 최근 휴대전화와 노트북 화재가 잇따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최근 3년간 보고된 사고를 유형별로 살펴보면 전지 내부 압력이 증가하면서 부풀어 오른 경우가 14건으로 가장 많았고 불이 난 경우가 9건, 폭발 또는 타버린 경우가 각각 6건, 부서진 경우가 3건이었다.
학계와 업계는 그 원인을 과열과 외부 충격에서 찾고 있다.
한국전기연구원 엄승욱 책임연구원은 “배터리는 외부에서 열이 가해지면 양극과 음극이 맞닿아 단락이 발생할 수 있으며 외부 충격에도 폭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강한 충격을 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노트북을 켜둔 상태에서 전열기나 밀폐된 공간에 장시간 놓아두면 전지 온도는 급속하게 60~75℃까지 상승한다. 이 정도면 전지 내부에서 충분히 단락(쇼트)이 일어날 수 있는 온도이다. 이렇게 과열된 노트북을 난방기 옆처럼 온도가 높은 환경에 놓아둘 경우 결과는 더 치명적일 수 있다.
반복되는 외부 충격도 전지 사고의 한 원인으로 꼽힌다. 외부 충격으로 전지 표면에 상처가 생기면 배터리 내부로 습기가 유입될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물과 전해물질이 격렬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건 불을 보듯 뻔 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일부에서는 휴대용 전자기기들이 작아지고 얇아지면서 사고가 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중앙처리장치(CPU)나 통신장비가 고성능으로 바뀌면서 더 많은 열을 발생시키고 있지만 제품이 작아지면서 열을 빼내는 통풍구나 과열방지 장치를 넣기가 더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제품이 얇아지면서 충격을 받기가 더 쉬워졌다는 의견이다. 최근 등장하는 노트북의 경우 평균 두께가 15~20mm, 휴대전화는 10mm까지 얇아졌다.
학계나 기업들은 리튬이온전지를 쓸 때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찜질방이나 한낮에 최고 90℃까지 올라가는 여름철 차량 안 등 습도와 온도가 높은 환경을 가급적 피해야 한다. 열이 빠져나가는 통풍구를 막기 쉬운 이불이나 배게 위에 올려놓고 쓰는 것도 좋지 않다.
급속 충전이나 불량 충전기의 사용도 피해야 한다. 보통 전자기기는 방전이나 충전시 리튬이온이 책갈피에 끼워지듯 양극과 음극 사이에 있는 층으로 들어간다. 리튬이온이 음극의 여러 층 사이로 차례로 들어가므로 배터리 충전 속도는 느린 편이다. 그러나 불량충전기를 이용할 경우 강제로 이를 수행하기 때문에 전지에 무리가 간다. 물론 휴대전화를 집어던지거나 떨어뜨리는 것도 금물이다.
디지털 기술 못 따라가는 전지 기술
LG전자와 한국전기연구원은 지난 1월 이천 냉동 창고 화재 피해현장을 취재하던 기자의 노트북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를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발생한 단발성 사고’로 일단 일단락했다. 한국전기연구원은 LG전자 측이 제공한 샘플 전지를 국제 기준에 따라 사고 때와 같은 환경에서 실험한 결과 뚜렷한 이상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3월 초 KBS가 노트북 전원을 끄지 않고 가방에 넣어둘 경우 75℃까지 과열되는 것으로 확인한 또 다른 실험 결과를 발표하자 LG측은 재시험을 의뢰하겠다고 입장을 바꾼 상황이다. 노트북 사고가 ‘배터리 결함’인지 ‘노트북 자체의 결함’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LG전자에 이어 지난달 삼성전자 노트북 화재 사고가 발생하자 기술표준원도 3월 24일부터 1주일간 한국전기연구원에서 국내에 유통되는 전지를 모아 종합적인 재시험에 들어갔다. 실험결과가 나오는 4월 초면 소비자의 불안감도 어느 정도 불식될 전망이다.
리튬이온전지는 한해 수요가 24억 개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한국에서도 이 전지를 사용하는 휴대전화가 연간 1800만여 대, 노트북은 100만 대가 판매되고 있다. 그런 탓에 한번 전지에 문제가 일어나면 기업이 입는 피해도 엄청나다.
2006년 일본의 대표 전자회사인 소니는 노트북 전지 사고로 큰 곤욕을 치렀다. 760만개가 넘는 전지를 리콜했으며, 4000억원을 웃도는 손실을 입었다. 삼성전자나 LG전자를 비롯해 애플, 델 등 다른 국내외 주요 휴대전자기기 회사들도 계속되는 폭발 사고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
정부는 지난 2월 전지 안전사고가 발생할 경우 해당 제품을 강제적으로 입수해 조사할 수 있도록 관련법령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국제표준보다 한층 강화한 노트북 전지의 안전기준을 올 하반기 중에 시행할 계획이다. 올해 말이면 소비자들이 좀더 신뢰할 수 있는 사고 조사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경우 2006년 소니사의 노트북 전지 폭발사고에 따른 제품 리콜조치 이후 관련 법령을 개정하고 올해 11월부터는 강화된 안전기준을 시행할 예정이다.
기술표준원이 제시한 리튬계 배터리를 쓸 때 주의사항
Tip1
배터리가 들어있는 노트북이나 휴대전화, MP3플레이어를 전열기 옆이나 여름철 차량 내부처럼 뜨거운 곳에 방치하지 않는다. 배터리가 과열되면 폭발하거나 화재가 날 수 있다.
Tip2
휴대전자기기가 물이나 음료수에 젖지 않도록 유의하고, 만일 젖은 경우 즉시 수리를 맡긴다. 설사 마른 뒤에도 회로에 남은 찌꺼기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전류가 흐르고 전압이 가해질 수 있다.
Tip3
꼭 정품 충전기와 교류 어댑터를 쓴다. 규격에 맞지 않거나 불량 장치를 쓸 경우 지나치게 높은 전류가 흐르거나 전압이 걸릴 수 있다.
Tip4
배터리를 떨어뜨리거나 뾰족한 송곳으로 찌르는 등 충격을 주지 않도록 주의한다. 충격으로 안전장치가 부서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