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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도피와 ‘가짜 철학적 경향’

30대 초반의 한 남자가 상담을 왔다. 어머니와 함께였다. 다 큰 어른이 어머니와 병원을 찾는 일은 드물다. 말끔하게 생긴 아들과 달리 쭈글쭈글하게 늙은 어머니는 한 눈에 봐도 고생을 심하게 한 듯 보였다. 상담을 거부하는 아들과 그런 그에게 상담만이라도 받아보자며 사정하는 어머니. 과연 이들에겐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회사 나가기를 거부하는 아들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서 하나뿐인 아들을 키워왔다고 했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공부도 잘 해 어머니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좋은 대학도 한 번에 합격하고 졸업한 뒤에는 짧게나마 유학도 다녀왔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기 위해 어머니는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아끼고 아꼈다.

그런 아들이 유학에서 돌아왔다. 이제 번듯한 기업에 취업하면 한숨 돌리게 될 참이었다. 처음에는 여기저기 자리를 알아보는 듯 싶었다. 한동안 컨설팅 회사에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들은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놀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회사생활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도 싫고, 윗사람의 비위를 맞춰주는 건 더 못 하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적당히 거짓말도 하면서 가식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아들은 “정직하고 인간답게 살고 싶은 나를 받아들이기에는 세상이 너무 천박하고 물질에만 집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처음에 어머니는 아들이 아직 한국 사정에 익숙하지 않아 그렇겠거니 하고 이해하려고 했다. 또 아들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라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어머니의 불안도 커졌다. 아들이 일할 마음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미칠 듯 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더 이상 상황이 나빠지기 전에 아무 일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현실보다 더 큰 가치관에만 매달리는 것도 병

아들은 자신이 정상이라고 주장했다. 어머니가 눈물로 호소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병원에 오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상담 결과 그는 ‘가짜 철학적 경향(pseudophylosophic)’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병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추상적인 이유를 대며 회피하려고 드는 증상이다.

예를 들어 보통 사람은 ‘지금 내가 돈이 없으니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짜 철학적 경향에 사로 잡힌 사람은 ‘사람은 왜 밥을 먹어야할까’, ‘ 왜 세상은 물질 지상주의일까’라는 식으로 고민한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 무척 엉뚱하고 현실도피적인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아들은 상담 중에 의사인 필자에게도 화살을 돌렸다. 그는 “정신적 문제를 논의하면서 돈을 받는다는 게 좀 우습지 않느냐”고 물었다. 지나치게 물질을 요구하는 ‘천박한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또 막노동이라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부탁에는 “자신이 막노동을 한다면 진짜 막노동을 해서 먹고 살아가는 누군가는 나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니냐”며 “인류애에 어긋나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연로한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인류애에 어긋나지 않는 듯했다. 결국 필자는 그에게 초등학생도 다 아는 현실적인 이유, 즉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왜 상담료를 받아야 하는지, 사람이 왜 일을 해야 하는지 등에 관해 설명해야 했다. 다행히 몇 번의 상담 끝에 아들도 차츰 현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현실이란 나쁜 것, 속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고 일단 받아들이는 데서 변화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철학자처럼 이상적인 삶을 꿈꾸며 살 수는 있지만 현실의 문제를 모르고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진정한 철학은 현실의 문제를 책임지고 노력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회피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

‘명품’과 ‘짝퉁’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철학과 가짜 철학적 경향도 다르다. 진정한 철학이 인생의 의미를 추구한다면 가짜 철학은 현실의 책임감을 회피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즉,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이솝의 ‘신포도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할까.

가짜 철학을 논하는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바란다. 특히 성공이나 경제적인 번영을 많이 바란다. 위 사례에 든 아들도 사실 마음속에는 남들처럼 좋은 곳에 취직해서 열심히 살고 싶은 소망이 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추구하고 달성할 자신감은 없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가치는 의미 없고 치졸하다고 비난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만 고상하고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속물 취급을 하기 때문에 주변인들을 화나게 만든다.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때때로 눈앞의 현실이 무서워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현실에 맞서 열심히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세상은 빛과 그림자로 나뉘어 있고, 내 인생에도 그 빛과 그림자가 번갈아 드리워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정신적인 문제도 중요하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법도 중요하다. 시험공부를 안 하고 대책 없이 놀 때 느끼는 불안감은 공부를 하면서 극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11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김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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